소설리스트

검은 헌터-43화 (44/186)

[43화] 백귀가 잠든 호수 (4)

정적.

강우가 등장한 이후로 전장은 온통 침묵뿐이었다.

“뭐야?”

백귀를 코앞에 둔 각성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납게 칼을 휘두르던 놈이 태엽이 다한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놈뿐만이 아니었다.

집요하게 원정대를 공격하던 모든 백귀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는 강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길드장님.”

“…로드리게.”

오만석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오랜 전우의 이름을 불렀다.

죽은 줄로만 안 로드리게가 살아 돌아오자 뭉클함마저 느껴졌다.

그가 오만석을 부축하며 말했다.

“역시 무사하셨군요. 그럴 줄 알았슴니다. 우린 아직 죽기엔 가난하니까요.”

그 말에 오만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대, 대장…….”

반면, GK 용병단은 웃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다섯 용병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죽어 버린 탓이었다.

“너, 이 자식들…….”

한쪽 팔이 사라진 송강국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그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그간 단단한 갑옷을 방패 삼아 마물들을 상대해 왔지만, 갑옷이 사라진 탓에 그의 전력은 평소의 반도 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미처 막아 내지 못한 공격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피가 홍수처럼 샘솟고 있었다.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이우민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우, 우리가 도망친 게 아니고…….”

“시끄럽다.”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른 송강국이 고개를 까닥였다.

“일으켜.”

이우민과 용병들이 다급히 일으켜 세우자, 송강국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최소한 싸움이 끝나기 전까진 날 지켜. 적어도 저런 빌어먹을 모습으로 네놈들을 씹어 먹진 않게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이미 송강국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했다.

최소한 백귀가 되지 않는 게 그의 마지막 바람이라면 바람.

제 팔을 물고 다니던 <다이어 울프>를 기어이 처리했으니, 그거면 됐다.

‘재수 더럽게 없군.’

송강국은 가래침을 퉤, 바닥에 뱉었다.

부하들이 거구인 자신을 질질 끌어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는 사이, 그는 저 멀리 여자를 안고 선 남자를 쳐다봤다.

환술로 얼굴을 감춘 남자.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모습이 익숙했다.

‘그놈이로군.’

분명 낮에 자신보다 먼저 다이어 울프를 벤 그놈이었다.

‘고작 하이 포터 따위의 뒤에 서게 되다니…….’

그는 쓰게 웃으며 침엽수에 몸을 기댔다.

그러는 사이, 멈춰 있던 백귀들 쪽에서 움직임이 생겨났다.

척, 척.

거인 백귀였다.

정지된 백귀들 사이로 백귀의 왕이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부탁하지.”

강우는 유아라를 하이 포터 한 명에게 맡겼다.

그녀가 잠시 그의 소매를 움켜쥐며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괜찮다.”

강우의 말에 이내 붙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행동이 자유로워진 강우는 몸을 돌려 걸어오는 놈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곳에 온 건 비단 그와 용병들뿐만은 아니었다.

같이 <텔레포트>된 왕족 백귀들.

그들도 한 켠에 서서 강우와 거인 백귀를 지켜보고 있었다.

“…….”

이윽고 스무 걸음쯤 앞에서 왕이 걸음을 멈췄다.

놈의 키가 머리 두 개 가까이 더 크지만, 위압감은 강우 쪽이 한층 위였다.

현재 그가 유지 중인 <검은 고리> 때문이었다.

불길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고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심장이 거칠게 뛰고 살이 떨리게 했다.

‘15분쯤 되겠군.’

강우는 얼추 <검은 고리>의 유지 시간을 계산했다.

15분이면…….

‘충분하다.’

놈을 상대하는 데 부족하진 않을 듯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해, 해가 뜹니다!”

갑자기 원정대 쪽에서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만세!”

“살았다!”

새하얀 달 아래.

희미한 햇살이 비추고, 그 반대편으로 작은 그림자가 졌다.

모두가 환호하며 감격의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

대개 언데드라면 해를 피하기 마련이다.

해에는 죽음의 그늘을 밀어내는 힘이 있으니까.

전날, 놈들이 밤에 습격을 택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일 터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까부터 태양 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거인 백귀가 천천히 자신의 랜스를 치켜들었다.

스르르르―

“어, 어?!”

대경한 몇몇 각성자들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떠오르는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태양.

아니, 그건 달이었다.

하늘에 있던 흰 달 외에 또 하나의 만월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개기일식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달이 태양을 집어삼키는 가운데, 곧 태양은 달에 완전히 가려졌다.

검은 태양.

불길하도록 검은 태양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기대하던 희망이 사라지자 원정대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환호와 열기는 차갑게 식은 지 오래.

더 이상은 무리라고.

모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에겐 놈들을 상대할 힘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강우와 용병단?

그들이 지금의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3차 각성자의 팔도 장난감처럼 뜯어내던 놈이 아니던가.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곧 송강국이나 오만석도 저런 괴물이 되고 나면, 인류는 사상 최악의 적을 마주하게 될 터였다.

“다른 놈들 쓰러뜨려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거인 놈을 잡아야 해요!”

그때였다.

저 멀리서 지켜보던 오만석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강우의 위치라면 당장에라도 거인 백귀를 찌를 수 있는 거리.

그는 그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오만석의 기대와 달리 강우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여전히 놈과 마주한 채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이 싸움이 단순한 생사를 건 대결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왕족 백귀들이 강우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두 개의 죽음과 하나의 왕좌.

이곳은 진정한 죽음의 왕을 뽑는 자리였다.

암수나 기습 따위로 승부를 결정지어서는 곤란했다.

스륵.

비로소 왕좌를 건 싸움에 시동이 걸렸다.

거인 백귀가 랜스를 강우를 향해 겨누는 사이, 그 역시도 <피바라기>에 검은 마력을 둘렀다.

‘…분노로군.’

강우는 잔뜩 주름진 거인 백귀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놈은 잔뜩 화가 나 있다고.

백귀의 왕은 혼란스러웠다.

항상 자신을 존경으로 섬기던 동족들의 얼굴에서 낯선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불신’.

그는 처음으로 당혹감이란 걸 느꼈다.

어째서 저들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가.

탁해지다 못해 회백색이 된 눈알이 눈앞의 인간 사내에게로 향했다.

놈 때문이었다.

동족들이 자신을 부정하는 건.

그는 남자의 뒤에 선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죽음 위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심지어 드리워진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무려 수십, 수백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었으니까.

이 침엽수림을 모두 뒤덮고도 남을 만치 거대한 그림자였다.

순간, 그는 섬뜩함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랜스를 힘주어 쥐었다.

모든 게 이해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놈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 역시 저 지독한 심연에 삼켜지고 말 거라고.

콰득!

곧 거인 백귀의 랜스와 <피바라기>가 맞부딪쳤다.

* * *

강우가 원정대에 합류하기 약 20분 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제, 제기랄…….”

어느새 젖어 버린 이우민의 바지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두 눈을 부릅뜬 수천의 백귀들이 멍하니 멈춰 선 채 그들을 노려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로드리게도, 나머지 용병들도.

궁지에 몰린 모두가 잔뜩 굳은 채 몸을 벌벌 떨었다.

‘확실히 뭔가 있군.’

하지만 강우는 침착하게 놈들의 상태를 살폈다.

놈들은 침입자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반응.

한동안 그런 대치는 계속됐다.

‘뭘 놓쳤지?’

강우는 계속해서 숲속에서 만난 백귀들과 지금 상황의 연관성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도통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놈들은 분명 원정대를 공격했고, 유아라는 놈들을 피해 달아났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들은 공격하지 않는 거지?

‘놈을 만나 보는 수밖에 없나.’

결국 정답을 알려 줄 수 있는 건 백귀의 왕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강우가 눈앞의 백귀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리려는데, 갑자기 허름한 로브를 입은 백귀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때는 최고급 물건이었을 망토는 이미 해질 대로 해져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강우가 경계의 빛으로 바라보는 사이, 그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이건…….’

앙상한 손 위에 얹혀 있는 건 다름 아닌 <이동석>이었다.

권기한이 가지고 있던 것보다 큰 백색 보석.

강우는 천천히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로드리게와 용병들이 경악스럽게 쳐다봤다.

‘뭐지? 왜 마물이 저놈에게 저런 걸…….’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놈들이 강우를 공격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

강우가 호수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것.

이번에도 놈들이 공격하지 않고 되레 무언가를 건넨 것.

‘호, 혹시 놈도 마물 아니야?!’

‘인간 행세를 하는 마물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잖아?’

용병들의 오해는 거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섣불리 의심을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 자신들의 목숨은 강우가 쥐고 있으니까.

‘탑 때문이로군.’

그러나 혼란스러운 용병들과 다르게 강우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비로소 놈들의 행동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놈들은 탑에서 수백 번이나 죽은 자신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백귀의 왕보다도 더한 죽음을 감당한 자신이다.

놈들은 그런 자신을 ‘왕의 후보’라 여기는 듯했다.

‘우습군.’

강우는 현 상황이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새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석탈해가 놈들을 처리한 방식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 석탈해는 석판의 내용만 확보한 뒤, 이 동굴을 폭파시켜 버렸다.

왕족 백귀들을 수월하게 처리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강우는 그게 늘 의아하던 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굴이 깊었기 때문이다.

왜 놈은 수갈래로 뻗은 동굴을 모두 수색하지 않고 수장시켜 버린 걸까.

그러고 보면 놈은 백귀의 왕조차도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

평소라면 모든 길드원과 했을 놈인데 말이다.

‘어쩌면…….’

거기에도 새로운 비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내 강우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출발한다.”

“나, 나가는 거야?!”

이우민이 처음으로 반색하며 물었다.

그가 원하는 장소는 아니겠지만…….

‘뭐,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콰직!

강우는 들고 있던 <이동석>을 깨뜨렸다.

* * *

콰득! 콰득! 콰득!

연거푸 격돌한 쇠붙이가 강렬한 소음을 흘렸다.

거인 백귀의 랜스는 특이해 어느새 반으로 분리되어 쌍검이 되었다.

모두가 숨죽인 채 전투를 지켜보는 가운데, 강우는 놈의 공격을 받아 내며 계속해서 틈을 찔렀다.

“……!”

당황한 백귀의 왕이 황급히 공격을 막아 냈으나, 완벽히 방어하지는 못했다.

“크아아아!”

검은 마력에 당한 어깨가 찢겨 나가며 왼팔이 떨어지자, 입을 쩍 벌린 놈이 귀가 찢어져라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탓!

떨어진 팔이 스스로 바닥을 박차고 올라 거머리처럼 어깨에 도로 달라붙었다.

보기만 해도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이지만, 이미 과거에 경험한 강우로서는 크게 놀랍지 않았다.

‘단번에 끝내야 한다.’

검은 고리를 사용하던 <데이 나이트>의 실력에 비하면 거인 백귀는 그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죽음도 불사하고 싸울 수 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의 대결은 위험했다.

자그만 상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균열>이니까.

게다가 놈의 공격에는 엄청나게 많은 저주가 걸려 있었다.

죽음의 경험이 그 저주마저 비껴가게 해 줄진 미지수.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그그극!

백귀의 검을 <피바라기>가 훑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흘렸다.

강우는 놈의 검을 머리 위로 흘린 뒤, 그대로 <피바라기>를 위로 올려 그었다.

콰직!

예리한 공격이 턱을 훑고 지나갔다.

턱이 갈라진 놈이 분노한 듯 강하게 검을 내려쳤으나, 이미 강우는 공격 범위를 벗어난 뒤.

어느새 그의 주위로 일렁이는 마력의 파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콰과과과과!

단박에 쏟아진 검은 마력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거인 백귀의 온몸을 두드렸다.

놈이 검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저항하던 찰나.

돌연 뒤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

강우였다.

콰직!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강우의 <피바라기>가 뒤에서 놈의 목을 꿰뚫었다.

그만큼 <검은 고리>를 사용한 강우의 움직임은 무지막지했다.

“이제 잠들 시간이다.”

“크아아악!”

거인 백귀는 목이 찢겨 나가는 것을 감수하며 몸을 돌렸다.

어차피 자신은 절대 죽지 않는 몸.

목이 잘려도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면, 이득을 보는 건 자신이었다.

놈은 이번 공격에 승리를 확신했다.

인간은 강했으나 건방졌고, 자신은 약했으나 신중했으니까.

결국 승자는 자신이라고.

거인 백귀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검이 강우에게로 떨어지던 그 순간.

놈은 여태껏 느끼지 못한 새로운 기세가 강우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강우는 일전에 경험한 일격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은, 묵직한 검.

그때의 감각이 여전히 생생했다.

곧 강우의 눈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殺).”

그건 단순한 찌르기였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간결한 찌르기.

하지만 3차 각성자인 오만석과 송강국의 눈엔 달랐다.

오직 그들만이 그 이면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찌르기 뒤로 끌려오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말이다.

번쩍!

콰드드드득!

두 눈이 멀어 버릴 듯 강렬한 마력의 흐름과 함께…….

툭, 툭, 툭.

어느새 수천, 수만의 살점으로 변한 거인 백귀가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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