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백귀가 잠든 호수 (3)
“달려요!”
GK 용병 하나가 송강국을 부축해 달리는 사이, 최후방에 자리한 유아라가 소리쳤다.
미세한 자상부터 송강국처럼 팔다리를 잃은 중상자까지.
사방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지 않은 자가 없으나,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그만큼 백귀들은 끈질기게 원정대의 뒤를 쫓으며 피와 살을 탐했다.
서걱―!
유아라는 손을 뻗는 백귀 하나의 팔을 날려 버린 뒤, 서둘러 바닥에 넘어진 각성자를 일으켜 함께 달렸다.
그녀의 무사 탈출을 위해 두 명의 하이 포터가 놈들을 견제하는 게 보였다.
남은 원정대의 수는 40명 안팎.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데려온 각성자를 다른 포터에게 맡긴 유아라가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새벽까지라고 했어. 조금만 버티면…….’
하지만 야속하게도 달은 여전히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최소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할 듯했다.
“마, 막다른 길입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가장 최전방에서 원정대를 이끌던 레인저들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침엽수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막다른 길이 드러난 것이다.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언덕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제기랄…….”
뒤늦게 같은 것을 확인한 원정대 전체에 허탈한 탄식이 일었다.
앞에는 절벽, 뒤에는 끔찍한 백귀들.
희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낙심하지 마라!”
하지만 오만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뚫고 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서둘러 멈춰 서며 명령을 내렸다.
“절벽을 등지고 대열을 갖춰!”
콰앙!
오만석의 뜻을 깨달은 레인저들이 달려 나와 백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대열을 정비하도록 시간을 벌 요량이었는데, 다행히 상황을 인지한 백귀들도 추격을 멈춘 채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서 각종 조소가 들려오는 듯했다.
네놈들은 독 안에 든 쥐라고.
어차피 죽여도 죽지 않는 놈들에게 이번 전투는 놀이나 다름없었다.
우지끈―!
만석의 길드원들이 황급히 침엽수를 쓰러뜨려 방책을 만들고, 원거리 무기를 든 헌터들이 그 뒤에 자리했다.
“하아. 하아.”
근거리 전투원들도 모두 각자의 무기를 쥔 채 비장하게 대기 중이었다.
포터들도 메고 있던 짐을 버리고 방책 뒤에 섰다.
어차피 보호받을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안 탓이다.
곧 최후의 항쟁이 벌어질 터.
동이 틀 때까지 버티면 살겠지만, 그게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제기랄…….”
그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송강국이 비관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쓰레기들로는 여기서 절대 살아 나갈 수 없어.”
몇몇 각성자들이 못마땅하게 노려봤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팔이 뜯겨 나간 뒤부터 송강국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저 죽음을 피해 이곳까지 달려왔을 뿐.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선 <이동석>마저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눈앞에 아른거리는 <다이어 울프> 한 마리를 바라봤다.
자신이 직접 가죽을 벗긴 바로 그놈이었다.
거인 백귀는 송강국의 팔을 뜯어 놈에게 먹이로 주었는데, 놈은 그것을 먹지 않고 굳이 입에 물고 다녔다.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이.
그때, 옆에서 버프를 사용하던 오만석이 말했다.
“나약하긴.”
“…뭐야?”
그에 송강국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길드 하나도 제대로 운영 못 해서 빌빌대던 새끼가 어디서 감히…….”
“네 용병단이나 신경 쓰지? 이제 고작 셋 남았네. 어떤 운영을 해야 그렇게 되냐? 방법 좀 알려 줘라.”
오만석의 비꼬는 말에 송강국이 분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말대로 남은 용병단은 자신을 포함해 셋뿐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죽기 살기로 함께한 만석 길드원들과 달리 그의 용병단은 전부 죽거나 달아나 버렸다.
부단장 이형석 역시 다이어 울프에게 죽어 버린 지 오래.
저기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 GK 용병단은 밥값도 못한 놈들이야. 그런데 나불댈 입이 있냐?”
“네놈!”
송강국이 당장에라도 오만석의 목을 비틀 듯 으르렁댔으나, 이미 외팔로 든 양날 도끼만 해도 천근만근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만 갈았다.
“널 여기까지 연명하게 해 준 것도 우리라는 걸 잊지 마. 그러니까 밥값이라도 하려면 앓는 소리 그만하고 싸워. 뒈지기 직전까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놈도 평생 저놈들 꼴로 떠다니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오만석은 송강국을 부축하던 용병에게 지혈제 하나를 건넸다.
하급 치유 마법이 담긴 특제 앰풀이었다.
“네 대장한테 써. 지금은 손 하나라도 아쉬우니까.”
“…….”
용병이 머쓱해하며 그것을 받는 사이, 송강국은 말없이 오만석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이미 그는 대열로 돌아가 원정대를 다독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거인 놈입니다!”
마침내 백귀들 사이에서 거인 백귀가 걸어 나왔다.
놈은 궁지에 몰린 원정대의 처지가 흡족했는지, 한동안 그들을 지켜보았다.
곧 놈이 랜스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크아아아아!
아우우우우―!
“뭐, 뭐야?!”
백귀와 늑대들의 갑작스러운 포효에 움찔한 원정대원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 멀리 쓰러져 있던 각성자와 백귀들이 다시금 일어서는 게 보였다.
조금 전까지 함께하던 전우가 적으로 변모하는 광경이란…….
온 숲을 울리는 놈들의 소리와 시너지를 더해 원정대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저 울음일 뿐이다! 위축되지 마!”
오만석이 다급히 원정대를 다독였지만, 이미 원정대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그가 쓰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 로드리게라도 있었으면…….’
이런 건 그 녀석이 더 잘하는데.
녀석이 절대 도망갔을 리는 없고, 이미 죽어 버린 건가?
오만석은 제대로 작별도 하지 못한 오랜 전우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우우우우―!
놈들의 하울링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동안 땀이 식으며 잊고 있던 한기가 다시 원정대의 전신에 엄습했다.
긴장하기는 유아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떨려 오는 몸을 애써 다잡으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전투를 틈타 달아나는 것도 가능할 법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배낭 대신 무기를 쥔 1차 각성자들을 바라봤다.
비장한 표정과 달리 그들의 팔과 다리는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달아나지 않아.’
강우를 믿지만, 언제나 그렇듯 살아남는 건 바로 본인의 몫이다.
그녀는 최대한 맞서 볼 생각이었다.
이제 피하고 도망치는 건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녀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 잠깐이나마 기운을 줄 거다. 웬만하면 살아남는 데 써라. 뭐, 선택은 네 몫이지만.
강우가 자신에게 건네준 마지막 세 번째.
‘증명하고 싶어. 내가 최소한 쓸모는 있다는 걸.’
강우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신을 향한 증명이었다.
강우에게 강우의 목적이 있듯, 자신에겐 자신만의 목적이 있으니까.
그녀는 다시는 누군가가 거대한 폭력 앞에 무력하게 쓰러지는 걸 두고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게 비록 생면부지의 인간일지라도.
크아아아아!
이윽고 백귀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대기하던 백귀 중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막아라! 해가 뜰 때까지만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살자! 반드시 살아남자!”
“쏴라!”
원정대도 화약과 쇠뇌를 쏘며 마지막 투지를 불태웠다.
콰과과광!
탕! 탕!
콰득!
마침내 방책에 달라붙은 백귀들이 각성자들의 목을 움켜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각성자들 역시 그들을 떨쳐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쇠붙이에 맞아 떨어진 백귀의 신체 일부가 살아 움직이고, 공격당한 각성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에 품은 독기를 잃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탓일까.
바닥까지 떨어진 사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카악!
“옆이다!”
그사이, 다른 수십의 백귀들이 방책을 피해 양옆에서 원정대를 공격했다.
금방이라도 뚫릴 듯했으나, 싸움은 의외로 팽팽했다.
어느새 왼편을 맡은 송강국이 괴력을 발휘해 놈들에게 맞서고 있던 것이다.
“이 버러지들이!”
콰과과과―!
그의 양날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백귀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한 손으로는 버거운지, 어느 순간 도끼를 냅다 집어 던진 그는 거의 맨손으로 싸우다시피 했다.
오만석의 도발이 그의 가슴에도 불을 지핀 게 분명했다.
“크악!”
위기는 오른편이었다.
그쪽은 오만석이 맡았지만, 그는 비전투계 각성자.
대부분이 버프인 그의 마법은 이런 백병전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츠츠츠츳―!
“뭐?!”
오만석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마력의 소용돌이에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어느새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그녀는 다름 아닌 유아라였다.
삽시간에 몸을 장악한 검은 마력에, 주변으로 검은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조심해!”
놀란 각성자들이 황급히 물러서며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강렬한 마력은 처음이었으니까.
3차 각성자인 오만석과 송강국마저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불길하고 날이 선 마력이었다.
유아라는 어느새 자신의 전신을 장악한 검은 기운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마력이야.’
이질적이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마력.
자신이 찢은 게 <이무기의 비늘>이라는 건 알지 못했지만, 그게 강우의 마력이라는 것만은 그녀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멀찍이 선 백귀의 왕도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그건 그에게도 익숙한 기운이기 때문이다.
처음 인간들을 습격했을 때부터 언뜻 느낀 기운.
죽음.
그건 바로 죽음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기운의 주인은 저 여자가 아닌 듯싶었다.
진짜 죽음을 경험한 것치고는 어설픈 눈빛이었으니까.
저 중에 진짜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왕은 즉각 명령을 내렸다.
카아아아!
왕의 손짓에 남아 있던 백귀와 늑대들마저 일제히 원정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사이, 오른편 백귀들을 쑥대밭으로 만든 유아라가 방책을 향해 뛰었다.
탓! 탓!
가벼운 몸놀림으로 방책 위에 올라선 유아라가 달려오는 백귀들을 향해 단검을 치켜들었다.
‘어쩌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심장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친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어쩐지 지금이라면…….
거인 백귀마저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순간, 그녀가 휘두른 검이 검은빛을 발했다.
콰드드드드득!
세 갈래로 뻗어 나간 검은 쐐기들이 장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백귀 수십을 산산이 조각냈다.
“……!”
쓸려 나간 바닥에서 돌들이 비산하고…….
커다란 먼지구름과 함께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한눈으로 봐도 백귀 수십이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당황하기는 유아라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스킬을 사용했어.’
마력의 방출.
그건 명백한 3차 각성이었다.
설마… 이게 그 비늘의 힘인가?
하지만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둘러싼 검은 마력은 여전했으나, 아까 같은 위용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력의 방출은 일회성인 모양이었다.
카아아악!
“다시 온다!”
그사이, 먼지구름 속에서 백귀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놈들은 쓰러진 동족들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계속해서 달려왔다.
“방책을 지켜라!”
오만석과 원정대원들이 죽기 살기로 방책을 수호했으나, 고작 침엽수 몇 그루로 수백의 적을 감당할 순 없었다.
“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원정대의 그 누구도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쓰러지는 백귀보다 쓰러지는 각성자가 더 많았다.
‘조금만 더……!’
아예 방책 밖으로 나선 유아라 역시 쉬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한 마리만 더.
하나만 더.
단번에 백귀 셋을 쓰러뜨렸으나, 이제는 한계였다.
콰득!
유아라가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내는 사이, 한 백귀가 그녀의 어깨를 베어 물었다.
‘큭!’
다행히 살점이 떨어져 나가진 않았지만, 검을 제대로 쥐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깊게 팬 어깨에 피가 흥건했다.
피를 토하도록 대원들을 다독이던 오만석의 목소리도, 송강국의 고함도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았다.
‘한 놈이라도 더!’
그러나 유아라는 계속해서 검을 찌르고 또 찔렀다.
청익의 가르침이 제법 도움됐는지, 그 어설픈 공격에도 백귀들이 썰려 나갔다.
백귀 하나가 그녀의 팔뚝을 찌르고, 다른 하나가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렇게 막 백귀들의 그녀의 몸을 꿰뚫으려던 찰나.
비로소 원정대에 햇빛이 비쳐 들었다.
서걱!
간단히 휘두른 페스카즈에 백귀 두 마리의 목이 그대로 쓸려 나갔다.
“……?!”
놀란 백귀들이 그쪽을 바라보는 사이, 순식간에 그사이를 파고든 남자가 놈들을 도륙 냈다.
콰직! 콰득! 콱!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백귀들의 사지가 장난감처럼 허공을 날아다녔다.
현실감 없는 광경에 유아라는 그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지 못했다.
‘아…….’
곧 기운을 잃은 유아라가 휘청인 순간.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어깨를 받쳐 든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팔에 못 보던 검은 고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이윽고 그녀를 지켜보던 그가 입술을 뗐다.
“…죽기 살기로 도망치라고 했을 텐데.”
“그러려고 했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어째서 눈앞이 흐려지는 걸까.
유아라는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아 냈지만, 남자의 다음 말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생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