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부정 탄 균열 (5)
“…….”
나뭇가지의 곁을 정리하는 동안 GK 용병들은 그런 강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나뭇가지 아닌가?’
강우가 나뭇가지를 너무 진지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진짜 무기를 쥐었다고 착각할 만치 그의 표정은 진중했다.
덕분에 지금 GK 용병들은 잠시 사고마저 정지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침묵은 곧 폭소로 변했다.
“푸하하하!”
“너 지금 뭐 하냐? 불쏘시개라도 만들게?”
“와, 나 방금 너무 진지해서 벙쪘잖아.”
“클클, 완전 미친놈 아니야? 무협지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설마 그걸로 우리를 상대하겠다… 뭐 이런 건 아니지?”
몽둥이를 든 장정 다섯을 상대로 나뭇가지라니.
횃불도 없이 홀로 숲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간혹 포터 중엔 사람 구실 못 하는 놈도 있기 마련.
그들의 눈엔 강우가 딱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그들의 조소가 경악으로 바뀌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르륵!
강우가 나뭇가지에 마력을 불어넣자, 그곳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
그제야 움찔한 GK 용병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2차 각성자는 마력으로 사물이나 신체를 강화할 순 있어도, 저토록 일정하게 마력을 내비치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나 강렬히 불타는 마력이라니…….
한눈에 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마력은 그들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도 그들은 강우가 3차 각성자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균열>에 들어온 3차 각성자는 송강국과 오만석, 그리고 존재감 없기로 소문난 GK 부단장 이형석뿐이었으니까.
호미 같은 무기를 든 남자가 물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하지만 대화는 이번에도 이어지지 않았다.
검은 불길이 사그라든다 싶던 찰나.
강우가 즉각 공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피, 피해!”
삽시간에 접근한 강우가 나뭇가지를 휘두르자, 기겁한 용병 하나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검은 마력에 스친 목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잘릴 뻔한 공격.
등골이 오싹했다.
“조심해! 위험한 놈이다!”
주저앉은 남자가 제 목을 만져 보는 사이, 어느새 산개한 용병 넷이 강우를 향해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몽둥이는 버려진 지 오래.
네 명 모두 잔뜩 굳은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자는 대체…….”
로드리게만이 그 광경을 귀신에 홀린 듯 바라봤다.
꿈을 꾸는 건가?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몽둥이질의 통증은 여전했다.
‘분명 3차 각성자다.’
용병들과 달리 로드리게는 강우가 3차 각성자임을 대번에 알아챘다.
애초에 마력의 방출은 3차 각성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원정대에 저런 자는 없었는데… 저런 자가 어디서 튀어 나왔지?’
“쳐라!”
로드리게가 원정대원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사이, GK 용병들이 강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우는 놈들의 공격을 물 흐르듯 피하며 손을 움직였다.
슥, 슥.
무척이나 간결한 동작이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마력이 실린 나뭇가지가 용병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방한복을 찢었으며, 호미 같던 남자의 무기를 절단했다.
“이런……!”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십여 초.
단 한 번의 격돌에 불과하나, 상대의 수준을 깨닫기에는 결코 무리가 없는 시간이었다.
황급히 물러선 놈들이 다시 강우를 둘러쌌지만, 섣불리 움직이진 못했다.
그때, 옴짝달싹못하는 놈들을 향해 강우가 입을 열었다.
지독하게 느껴질 만큼 살벌한 음성이었다.
“다음엔 죽음이다.”
꿀꺽.
설마 조금 전은 봐주었단 말인가.
용병들은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았지만, 쉽사리 물러서지도 못했다.
원래는 로드리게에게 대충 겁만 줄 생각이었다.
몽둥이에 좀 맞는다고 해서 각성자가 죽을 린 없으니까.
몇 대 얻어맞다 보면 자연스럽게 입도 다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이제는 일이 커져 버렸다.
로드리게는 겁은커녕 분노만 남았고, 자신들은 끝내 몽둥이가 아닌 검을 썼다.
이대로 그가 돌아가 이 일을 알린다면, 단장인 송강국도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보고도 없이 일을 벌인데다 이렇게 무력하게 당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죽여야 해.’
그들은 이 일을 덮을 방도가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용병들의 눈빛이 변했다.
‘결국 머저리는 끝까지 머저리인 모양이군.’
강우는 살기 띤 눈으로 눈빛을 교환하는 놈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놈들은 기어이 끝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강우의 감각 레이더망에 새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건 호수 쪽으로 보낸 <마력 개체>에서 전해 온 것이었다.
강우의 눈이 빛났다.
‘놈들이다.’
강우는 시선을 돌려 놈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수십 개의 마력이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다! 죽여!”
“위험해!”
그때, 강우의 시선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용병들이 달려들었다.
뒤늦게 로드리게가 고함을 질렀으나, 목소리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곧 다섯 개의 무기가 일제히 강우에게로 향했다.
팟!
하지만 그것은 모두 강우에게 닿지 못했다.
놈들의 모든 공격이 허공을 가르는 사이, 어느새 강우는 침엽수 사이를 뚫고 저 앞까지 뛰어나가 있었다.
“어느 틈에……!”
순간 이동이라도 한 걸까?
경악한 용병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 멀리 튀어 나간 강우가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베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은 천으로 싸인 <피바라기>가 들려 있었다.
서걱!
강우가 베어 낸 건 사람이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갈라졌다.
크아아아!
“저게 뭐야?!”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온 건 수십의 인간들이지만, 몸이 기이하게 뒤틀린 몇몇은 도무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그것이 마물임을 깨달은 용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마, 마물이다!”
콰득!
하지만 놈들의 비명에도 강우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 나갔다.
‘갓 태어난 놈들이다.’
강우는 세 번째 백귀를 베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갓 만들어진 놈이라고.
그렇다면 아마 앞서 들어온 길드의 일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강우가 막 네 번째 백귀를 베려던 참이었다.
크아아아!
흠칫 놀란 강우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서 검을 마주하고도 백귀는 소리만 지를 뿐, 반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포효조차도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셋이나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백귀들은 강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놈들은 처음부터 강우가 보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무슨……?’
뒤에 있던 로드리게와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카아악!
백귀들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들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백귀에 둘러싸이게 된 로드리게와 용병들은 놈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뭐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강우는 어느새 저 멀리 달려가는 백귀들의 등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어째서 살육을 즐기는 백귀들이 인간을 무시하는 거지?
불길한 적막과 함께 한차례 한풍이 침엽수림을 울렸다.
그리고 얼마 뒤…….
부우우우우―!
야영지 쪽에서 비상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고함과 쇳소리.
분명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부우우우우―!
“적이다!”
예정됐던 고함에 유아라는 눈을 떴다.
― 오늘 밤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강우가 말한 ‘습격’에 대비해 줄곧 깨어 있는 상태였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가장 먼저 천막을 나섰다.
― 만약 습격이 이뤄진다면, 나를 찾지 마라.
횃불들을 든 각성자들이 이리저리 분주한 가운데, 저 멀리 이쪽으로 달려오는 수십의 인형이 보였다.
슉! 슉!
탕!
쇠뇌와 총을 든 각성자들이 열심히 공격을 퍼붓는 대상은… 하나같이 흰자를 드러낸 백안의 인형들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자들.
그들이 각각의 무기를 든 채 저 어두운 숲속을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언데드.’
유아라에겐 나름 익숙한 마물이었다.
팔달산 <균열>에서 자신이 만든 게 바로 언데드였으니까.
언데드로 변한 미노타우르스가 권기훈을 잡아먹던 장면이 여전히 생생했다.
“늑대와 야인들이 옵니다!”
“사람이 아니다! 마물이다!”
놈들의 마력을 느낀 오만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헐레벌떡 텐트에서 나온 GK 용병단도 빠르게 무기를 들었다.
“로드리게! 어디 있냐, 로드리게!”
오만석이 애타게 로드리게를 찾았으나, 그가 보일 리 만무했다.
“나머지 놈들은 어디 갔어?!”
송강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 긴박한 와중에 용병 다섯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한 사내가 동료들의 행방을 전하자, 송강국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이런 멍청한 놈들이…….”
하지만 질타는 나중이었다.
어느새 적들이 언덕을 다 올라와 있었으니까.
크아아악!
“모두 집중해라!”
곧 백병전이 시작됐다.
각각 검과 창, 방패 따위를 든 근접형 전투원들이 백귀들을 상대하고, 활을 든 몇몇이 그 틈으로 열심히 화살을 쏘았다.
타앗!
유아라 역시 서둘러 새로운 단검에 마력을 두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청익이 준 단검의 이름은 ‘Death And Shadow’
‘죽음과 그림자’라는 다소 유치하기까지 한 이름이지만, 위력만큼은 진짜였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칼날을 살짝 대는 것만으로도 살이 베일 지경이었으니까.
극도로 예리한 검은 그만큼 사용자에게 뛰어난 수준을 요구한다.
조금만 엇나가도 예상과는 다른 공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침착하자.’
서걱!
유아라는 마력을 두른 단검으로 백귀 하나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다행히 언데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놈은 머리가 잘리는 것으로 생명을 잃었다.
자신감을 얻은 유아라는 그 뒤로도 곳곳을 날다람쥐처럼 누비며 백귀들을 도륙 냈다.
“조심해라! 쓰러지지 마라! 쓰러지면 죽는다!”
사방에서 땀 냄새와 썩은 내, 그리고 늑대들의 누린내가 진동했다.
오만석이 열심히 버프를 사용하는 사이, 어느새 최전방에 선 송강국이 자신의 양날 도끼를 휘둘렀다.
“비켜!”
콰과과과과!
도끼에서 쏟아진 마력이 바닥을 가르며 전방에 큰 폭발을 일으켰다.
그 광활한 공격에 백귀가 아닌 만석 길드원 하나도 휩싸였지만, 송강국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그는 살점이 떨어져 바닥을 기는 백귀를 간단히 처리했다.
갑작스러운 습격 탓에 고가의 장비를 다 걸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3차 각성자는 역시 남달랐다.
“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힘내!”
다행히 상대는 숫자에 비해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놈들은 집을 공격당한 벌처럼 그저 무작정 달려들기만 했으니까.
검이든, 도끼든, 놈들은 그 어떤 무기도 모두 막대기처럼 휘두르기만 할 뿐이었다.
전투에 능한 각성자들에게 그런 눈먼 공격이 통할 리 없다.
눈에 띠는 사상자는 꽤 됐지만, 갑작스런 습격에 당한 것치고는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들은 침착하게 놈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뒤, 뒤쪽에도 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느 정도 승리가 눈앞에 있다 싶던 찰나, 갑자기 전투지에서 떨어져 있던 포터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어느새 뒤편 숲속에서도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뒤는 우리가 맡는다!”
몸이 달아오른 송강국이 즉각 용병 둘을 데리고 뒤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쪽을 확인한 유아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아… 안 돼!’
강우가 그녀에게 남기고 간 건 총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오늘 밤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 만약 랜스를 든 거인 백귀가 보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거대한 랜스를 든 백안의 거인.
2미터를 넘기는 백발의 거인이 적들 가운데 서 있었다.
“저놈이 보스다! 제 발로 나타나다니 고맙군!”
“그만둬요!”
유아라가 경고했지만, 그 말이 송강국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보스만 죽이면 이 짜증 나는 레이드도 끝날 테니까.
양날 도끼를 치켜든 그가 앞을 막은 백귀들을 처리하는 사이, 그를 지켜보던 거인 백귀가 돌연 비어 있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그, 그극!
“뭐, 뭐야?!”
“너, 안 다쳤던 거야?! 괜찮…?! 컥!”
왕의 손길에 쓰러져 있던 원정대원이 다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크르르…….
“다, 단장님! 저기 보십쇼!”
그리고 그중에는 GK 용병단 텐트 쪽에서 걸어 나오는 다이어 울프도 있었다.
가죽이 벗겨져 생살이 드러난 흉측한 두 마리와 미처 가죽을 벗기지 못한 한 마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기를 위해 앞다리가 잘린 나머지 한 마리가 텐트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카악!
삽시간에 한 마리가 GK 용병 사내를 덮쳐 자빠뜨리자, 다른 두 마리가 신나게 그 살점을 물어뜯었다.
바닥을 기어온 한 마리도 기어이 그 피 맛을 보았다.
“끄, 끄아아악!”
산 채로 물어뜯긴 남자는 한참 동안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다 숨통이 끊어졌다.
“이, 이게 무슨……!”
경악한 오만석이 주춤하는 사이, 뒤편에서도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그곳에는…….
거인 백귀에게 붙잡혀 산 채로 팔이 뜯겨 나가는 송강국이 있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