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36화 (37/186)

[36화] 부정 탄 균열 (2)

“부정 탄 균열이라…….”

눈앞의 <균열>을 지켜보던 오만석이 중얼거렸다.

비록 4레벨이라고 해도 벌써 길드 두 개를 집어삼킨 <균열>이다.

오만석은 <균열>에도 기세가 있다고 믿기에, 한 번 이상 사고가 난 <균열> 레이드를 치를 땐 더욱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런 <균열>은 계속해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는 그걸 ‘부정 탄 균열’이라 부르곤 했다.

“뭔가 찝찝해.”

오만석이 중얼거리던 그때, 부길드장 로드리게가 다가왔다.

길을 지나가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치 풍채 좋은 민머리 외국인이었다.

“GK 용병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슴니다.”

“뭐? 아직도?”

로드리게의 말에 오만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시계를 살폈다.

용병단은 아무리 늦어도 레이드 시작 두 시간 전까지는 오는 게 관행이다.

그런데 GK 용병단은 비싼 값을 하려는지, 출발을 20분 남겨 두고도 도착하지 않았다.

“연락은 해 봤고?”

“오는 중이라고만 하지, 어디라고는 말하지 않슴니다. 계약해지를 통보할까요?”

다소 단호하기까지 한 로드리게의 말에 오만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용병 없이 저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일단은 정비에 계속 신경 써. 기기도 다시 한번 살피고. 5분 후에도 연락이 없으면 출발을 미룬다.”

“알겠슴니다.”

“후…….”

오만석은 대열로 돌아가는 로드리게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GK 용병단의 지각이 마음에 안 들기는 그도 매한가지이나, 지금 아쉬운 건 이쪽이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겠노라 이름과 길드명을 만석(萬石)이라 지었건만, 실제 삶은 그러지 못했다.

현재 헌터계는 빈익빈 부익부가 점차 심화하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손에 꼽던 2, 3차 각성자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고위 각성자를 다수 포섭한 상위 길드들이 <균열>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중하위권 길드들이 맡을 수 있는 <균열>의 수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그 질도 하락했다.

간혹 일감을 찾지 못한 하위권 길드들이 연합으로 레이드를 벌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만큼 전리품 경쟁이 심하고 보수가 짰다.

이렇게 가다가는 상위 길드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도태될 터.

만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이 필요해.’

실적이 좋은 길드만이 명성을 떨치고, 새로운 길드원을 끌어들일 수 있다.

물론, 상위 각성을 이루면 대부분 계약을 파기하고 새 둥지를 찾아 떠나겠지만, 거기서 나오는 위약금도 꽤 짭짤할 테니, 손해는 아니다.

운이 좋다면 명성이 쌓여 상위 길드 중 하나에 n군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테고.

그게 오만석이 웃돈까지 주며 이번 <균열>에 사활을 건 이유였다.

레이드에 두 번이나 실패한 <균열>은 그 이름값이 꽤 높았으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천지신명님! 하나님! 부처님! 저 그간 나쁜 짓 안 하고 착하게 살았잖습니까! 제발 무사히 클리어하게 해 주십쇼! 그러면 기부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하겠습니다!’

오만석이 속으로 세상의 모든 신들을 찾는 사이, <균열> 앞으로 검은 세단 여섯 대가 도착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GK 용병단이었다.

가장 뒤차에서 내린 용병단장 송강국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오만석을 발견하곤 다가오기 시작했다.

용병단이 발달한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용병단이 귀했다.

특히 GK 용병단은 실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용병단.

3차 각성자를 무려 둘이나 보유한 용병단이다.

그들이 길드 대신 용병단을 꾸린 이유는 간단했다.

탈세가 가능하고, 신원을 보장할 필요가 없으며, 무엇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균열> 입찰부터 뒤처리, 그리고 사고에 따른 책임 면책까지.

머리 아픈 일은 전부 의뢰인이 처리하니, 그들은 그저 싸우고 전리품에 따른 인센티브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일까.

용병단은 일명 ‘양아치’들이 많았다.

“GK 송강국 님이시죠? 만석 길드장 오만석입니다.”

송강국은 오만석이 건넨 악수를 받았으나, 썩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헤비급 파이터 출신이라는 소문답게 거구인 그가 뒤편으로 늘어선 만석 길드원을 훑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게 전부요?”

“아… 예.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저희 숫자가 좀 적습니다. 하지만 모두 경험 많은 베테랑들입니다. 소수 정예라고 할까요?”

“흥, 토끼들이 많이 먹어 봐야 풀떼기나 뜯어 봤겠지.”

“…….”

길드원들을 비하하는 듯한 말투에 오만석의 눈썹이 꿈틀댔으나, 지금은 길드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레이드를 앞두고 있다.

이 정도쯤이야 백번이고, 천 번이고 참아 줄 수 있다.

“레이드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준비하시죠.”

“…….”

송강국은 말없이 자신의 용병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용병단은 총 열다섯 명이었다.

송강국이 레이드용 갑옷을 입는 동안 수하 둘이 다가와 그를 도왔다.

중세 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철제 갑옷으로, 모두 합하면 10억이 넘어가는 고가 장비였다.

장비를 모두 입는 데만 20분이 소요됐기에 레이드 예정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버렸다.

‘…쌍놈.’

하지만 오만석은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저래 가지고 싸울 수는 있는 검니까? 갑옷 입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슴니다. 한마디 할까요?”

“됐다. 용병단도 몇 없는데… 이번 레이드가 끝나도 계속 보게 될 거다.”

오만석은 흥분한 듯 어깨를 들썩이는 로드리게를 만류했다.

남미 출신인 로드리게는 다소 다혈질이지만, 길드장인 그의 말은 잘 들었다.

어느새 고분해진 로드리게를 보며 오만석은 어쩐지 이번 레이드가 수월하지 않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지.”

마침내 고급스러운 상자에 고이 보관돼 있던 양날 도끼까지 챙겨 들자, 지루하던 송강국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

“모두 들어간다!”

오만석의 외침을 시작으로 마침내 레이드가 시작됐다.

약 70명으로 꾸려진 원정대가 <균열>로 향하고, 그중에는 만석 길드에 용병으로 온 강우도 있었다.

지금 그는 만석 길드가 지급한 방한복을 입고 있는데, 하이 포터로 참가한 터라 큰 배낭 하나를 멘 상태였다.

그때, 강우와 같은 행색으로 있던 유아라가 말했다.

“저 용병단 때문에 레이드가 15분이나 지연됐네요.”

설원에 대비해 특제 방한복을 입은 그녀는 양손으로 배낭끈을 얌전히 붙잡고 있었다.

털 후드에 둘러싸여 눈코입만 간신히 보이는 얼굴, 두꺼운 소재 덕에 볼록 튀어나온 배.

같은 옷이지만, 그녀가 입고 있으니 언뜻 거대한 회색 토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강우가 물었다.

“여전히 왜 따라온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이럴 시간에 청익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유익할 텐데.”

“그분도 며칠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여길 따라가는 것도 좋은 수련이 될 거라던데요? 꼭 붙어서 많이 보고 오라 했어요. 이렇게 자리도 만들어 줬고요.”

“…….”

강우는 불과 몇 시간 전 일을 떠올렸다.

집에서 유아라 몰래 나오는 데엔 성공했으나, 그녀를 떼어내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뒤늦게 박수영에게 소식을 들은 그녀가 죽기 살기로 강우를 쫓아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웬걸.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추격술을 선보였다.

기척을 완전히 감추진 않았어도 웬만한 각성자는 금세 놓칠 속도였는데…….

― 이만하면 따라가도 되죠?

― …….

청익이 뭘 가르치긴 한 건가?

결국 강우도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우는 더 이야기하기를 포기하고 벗고 있던 털 후드를 썼다.

“방해되면 버리고 가겠다.”

“옙! 명심하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유아라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경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원래 이렇게 밝았나?’

강우는 이 여자가 과연 팔달산에서 본 그 여자가 맞는지 여전히 의아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뭐, 죽상으로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 * *

“으, 조금 춥네요.”

유아라는 <균열>에 들어서자마자 불어닥친 매서운 한파에 옷깃을 여미며 몸을 떨었다.

<균열>의 내부는 새하얀 설원이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황량한 평원 위로 간간이 녹지 않은 눈이 보이고, 전방을 크게 둘러싼 침엽수림이 보였다.

배낭에 달린 온도계가 영하 2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길드장님!”

그때,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정찰 기기 조작을 맡은 기기병이었다.

“길드장님, 무슨 까닭에서인지 정찰 기기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뭐?!”

놀란 오만석은 정찰병이 들고 있던 모니터와 정찰 로봇을 직접 살폈다.

영하 60도에서도 잘 버티던 기기들이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전원이 꺼져 버렸다.

이건 <균열>의 전파방해도 피해 가는 특수 장비인데…….

“제대로 점검하고 온 거 맞아?”

“부, 분명 밖에서는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불과 2~3분 전까지만 해도 잘 쓴걸요.”

기기병의 말에 오만석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시 기계를 가져올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모든 기계가 일제히 멈춰 버린 걸로 봐선 새 장비를 가져와 봐야 똑같을 듯했다.

‘정말 부정이라도 탄 건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강국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기도 고철을 쓰나 보군.”

“크크크.”

대장을 따라 그 뒤에 선 GK 단원들도 비웃음이 만연했다.

분노한 로드리게가 이를 부득 갈았지만, 오만석의 말이 있어 차마 나서진 못했다.

오만석도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로드리게, 지금부터 모든 정찰은 레인저들에게 맡긴다.”

“…알겠슴니다.”

화를 억누른 로드리게가 레인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오만석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살펴도 보이는 거라곤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침엽수림뿐이다.

‘저 안에 치명적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단 말이지…….’

불길한 예감은 여전하지만, 이미 <균열>에 들어선 이상 반드시 클리어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GK 용병단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리는 중이었다.

‘…용병 길드를 이용할 걸 그랬군.’

하지만 신원이 확실한 용병 길드는 용병단에 비해 가격이 배로 비싸다.

그로서는 이번 <균열> 입찰과 GK 용병단 고용에 가진 재산을 퍼붓다시피 했으니 이게 최선인 셈.

결국 지금 가진 조건으로 모든 걸 끝내야 한다.

오만석은 호흡을 고르며 마력을 운용했다.

화아아아―!

그는 원정대 전원에게 시력과 공간인지 능력이 향상되는 특유의 마법을 사용했다.

비록 용병 따위에게 괄시당하는 길드장이지만, 그도 엄연한 3차 각성자.

그의 마력이 사방으로 화하며 원정대를 휘감았다.

일명 <심봉사도 눈 뜨는 버프>라고 이름 지은 마법이다.

송강국도 조금 놀랐는지, 의외라는 듯 오만석을 바라봤다.

‘쓸 만하군.’

강우도 오만석의 마법은 인정했다.

확실히 주변을 살피는 시야가 달라져 있었다.

이 정도 인원 모두에게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지닌 마력의 양도 상당하다는 뜻.

최소한 수련과 레이드를 게을리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꽤 도움이 되겠어.’

“이상 없습니다!”

이윽고 침엽수림에 먼저 들어간 레인저들이 깃발로 안전을 알리자, 원정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출발이다!”

통신기가 작동하지 않아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불가능했으나, 그들에겐 복명복창이라는 뛰어난 의사전달 수단이 있었다.

곧 그들은 침엽수림에 들어섰다.

전날까지 백귀들이 포효하던 그 숲으로.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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