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검은 기사 (3)
한동안 긴 적막이 흘렀다.
강우도, 데스 나이트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강우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려 주면 좋겠는데.”
[보는 대로다.]
데스 나이트는 천천히 강우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마다 검은 갑옷과 부딪친 롱 소드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규칙적으로 흘렸다.
[너는 이곳에서 나와 함께해야 한다. 그 고리를 완성시킬 때까지.]
“…….”
불과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선 데스 나이트가 가리킨 건 바로 <죽음의 고리>였다.
어쩐지 이런 고급 스킬을 간단히 내준 게 의아했는데, 역시나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자격이라는 게… 탑을 오를 자격이 아니었군.”
그러자 언뜻 검은 투구 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지금의 넌 탑을 오를 수 없다. 불과 몇 분조차 견디지 못하고 먹혀 버리겠지. 탑 내부는 밖과 차원이 달라. 죽게 되면 그대로 영혼이 갈가리 찢겨 소멸한다.]
상당히 언짢은 상황이나, 여기까지 와서 상대가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나직이 한숨을 내쉰 강우가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우리는…….]
잠시 뜸을 들이던 죽음의 기사가 말했다.
[네게 얽매인 존재라고 해 두지.]
‘얽매인?’
얽매인 존재.
‘얽매이다’의 진짜 주체는 얽매인 자가 아닌, 얽매임의 대상이다.
즉, 그는 강우를 주체라 말하고 있었다.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널 이쪽 세상으로 데려온 건 우리다. 네가 이곳으로 온 목적이 있듯, 우리도 널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이 있지.]
데스 나이트의 이야기에는 묘한 구석이 많았다.
‘탑에 막혀 버린다든가’, ‘우리라든가’, ‘이쪽 세상이라든가’.
그는 마치 탑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이 여럿인 것처럼 말했으며, 또 이 세계가 과거가 아닌 별도의 세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지?”
[그건 지금 말해 줄 수 없다. 지금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감당하고 못 하곤 내가 결정한다.”
강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너희가 날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해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다리도 내 것이고, 이 검을 쥔 손도 내 손이다. 나는 결정하는 건 나지, 네가 아니야.”
[…의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의지가 아닌 사실이지.”
[…….]
데스 나이트는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 인간은 정말로 강했다.
처음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의구심으로 가득했으나, 500번이 넘는 전투 끝에 데스 나이트는 알 수 있었다.
이자는 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인간이라는 걸.
어쩌면 석탈해도 그 점을 알고 이자를 살려 두었는지 모른다.
마물보다 더 마물 같은 존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해 줄 수 없는 걸 말할 순 없는 노릇.
결국 데스 나이트가 택한 건 약간의 타협이었다.
[최소한 네 목표에 방해가 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만 알려 주겠다.]
“답답하군.”
[답답해할 것 없다. 네 목표가 우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뭘 한다는 거지?”
강우도 더 듣기를 단념했는지, 다른 질문을 건넸다.
이 기괴한 세상의 비밀을 아직 풀지 못한 이상, 상대적으로 강우는 이곳에서 약자였다.
만약 놈들이 그를 이곳에 가두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난 네 고리를 완성해 줄 것이다. 그게 내 할 일이지. 그 고리가 정확히 다섯 개가 되는 날, 넌 비로소 진정한 탑을 보게 될 거다.]
“그럴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아. 내겐 밖에서도 할 일이 많다.”
[걱정하지 마라, 오래 붙들진 않을 테니. 우선은 고리 두 개가 목표다. 그러면 밖으로 다시 내보내 주지.]
* * *
강우가 지하실에 들어간 뒤.
박도진은 여느 때처럼 수영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밑반찬을 하고,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렸다.
유아라는 자기 옷은 자기가 빨겠다고 했지만, 딱히 속옷이 아닌 이상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는 항상 땀에 절어 있는 그녀의 훈련복을 묵묵히 세탁했다.
색마다 분류해서 빠는 건 물론, 각 지게 개서 그 방문 앞에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아라는 그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다행히 며칠 지나자 그 빚을 갚을 방도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돕고 박수영과 놀아 주는 것으로 그 신세를 갚았다.
박도진은 그마저도 만류하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확실히 남자인 자신이 돌보지 못하는 부분을 챙겨 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도 자신처럼 이 집에 마음 편히 있길 바랄 터였다.
이곳은 그들에게 일종의 도피처이자 안식처.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자격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사는 법을 배워 가는 중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유아라가 설거지하고 간 식기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지난 8일간 아무 기척도 없던 지하실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돌아오셨나?’
박도진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 둔 채 계단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유아라 역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기척을 잘 숨긴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지하에서 8일간 쥐 죽은 듯 지낼 수가 있나?
먹을 것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그렇게 박도진이 막 계단에 다다랐을 때, 마침 지하에서 올라오는 강우가 보였다.
8일 만임에도 수염만 조금 자랐을 뿐, 그는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끝나셨습니까?”
“…별일 없었나?”
“얼마 전, 한선화라는 사람에게서 물건이 왔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아마도 부탁한 물건이 도착한 모양이다.
“유아라는?”
“오늘도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훈련을 받는 듯합니다.”
‘훈련?’
비록 미흡하긴 해도 유아라도 웬만한 각성자에게 밀릴 수준은 아니었다.
홀로 스컬 길드의 수뇌부를 처리한 그녀가 아니던가.
박도진의 수준이 말도 안 되게 높았을 뿐, 그녀라고 녹록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가르칠 사람이라…….
특별히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씻겠다.”
그런데 고민을 마친 강우가 간만에 샤워를 위해 욕실로 막 향하려던 찰나.
박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사… 준비할까요?”
“…….”
그러고 보니 <사이트 스톤>에 있는 동안 한 끼도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기도 했지만, 그만큼 데스 나이트와의 전투에 심취한 탓이었다.
현실은 8일이지만,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서는 무려 50일이나 보냈다.
강우는 오랜만에 떠오른 음식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저 우악스럽던 손으로 요리를 한다는 게 믿기진 않지만 말이다.
“부탁하지.”
“준비하겠습니다.”
강우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 * *
“한강우 씨가 나왔다고요?”
“아저씨, 어디 다녀왔어요? 기다렸잖아요! 지하에 뭐 숨겨 놨죠!”
식사 도중 돌아온 유아라와 박수영이 그간 지하에서 무얼 했느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탓에 다소 골머리를 앓았지만, 박도진이 막아 줘 다행히 잘 넘어갔다.
유아라에게 묻은 청익의 기운이 의외였으나, 강우는 굳이 묻지 않았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비로소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강우는 한선화가 보낸 <이무기의 비늘>과 <추적자의 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모두 품질이 좋은 상품(上品)들.
한선화가 말이 많긴 해도 수완은 확실한 모양이다.
만족스럽게 그것들을 챙긴 강우는 비늘에 마력을 주입한 뒤, 이내 탑에서의 기억을 복기했다.
―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곳을 찾아라. 아직 고리를 밖에서 사용하는 건 몸에 무리가 갈 테니 자제하고. 설사 사용한다 해도 하나뿐이야. 두 개는 죽는다. 명심해. 죽는다.
데스 나이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강우는 오랜만에 비어 있는 자신의 손목을 살폈다.
주인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죽음의 고리>는 각성과도 비슷한 점이 많으나, 그 범위가 신체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 달랐다.
각성이 마력의 성장이라면, <죽음의 고리>는 신체의 성장인 셈.
운 좋게 얻은 만큼 적절히 사용하면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 줄 터였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약 이 주 동안 강우는 데스 나이트에게서 <죽음의 고리> 사용법을 배웠다.
덕분에 이제 고리를 두 개까지 운용할 수 있게 됐으나, 문제는 후유증이었다.
과도한 변이의 힘이 수명을 깎아 먹듯이, <죽음의 고리>는 사용자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현재 강우가 고리 두 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3분 남짓.
그 이후에는 몸이 퍼져 한 시간 가까이 전투가 불가능했다.
<죽음의 고리>는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움직임을 선사해 줄 순 있어도 지구력 면에선 젬병이었다.
그런 걸 실전에서 사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애초에 그런 고리를 다섯 개나 달고서 수십 분을 싸운 데스 나이트가 괴물이었던 거다.
아니, 처음부터 죽은 몸이라 가능했던 건지도.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강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와의 대결로 그는 불과 8일 만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비록 4차 각성은 아직 먼 이야기이나, 실력만큼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의 자신이라면 변이의 힘을 쓰는 박도진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죽음의 고리>까지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면?
설령 석탈해가 5차 각성을 넘는다고 하더라도 상대해 볼 만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우의 눈이 빛났다.
‘우선은 석철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석철의 입국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실력이 일취월장한 만큼 지금이 놈을 잡아낼 절호의 찬스다.
‘놈이 더 강해지기 전에 싹을 자른다.’
그간 핸드폰에 쌓인 키워드 기사들을 보니, 석탈해와 신라 길드도 차곡차곡 성장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 백귀 <균열>도 이틀 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상태.
첫 원정대가 들어간 지 하루가 지났으나, 아직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백귀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상대하지 못하는 놈들이니까.
앞으로 몇 번 더 레이드 실패 기사가 뜨고, 백귀가 <균열> 밖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할 때.
분명 석탈해는 그때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석탈해, 네가 백귀를 만날 일은 없을 거다.’
강우는 놈보다 먼저 백귀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전 세계의 이목을 끌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 버린 놈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거기에 믿고 있던 석철마저 사라진다면?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피바라기>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황한수에게 전화를 걸어 백귀 <균열>에 입찰 중인 길드를 물으며, 그곳에 용병 자리를 구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