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33화 (34/186)

[33화] 검은 기사 (2)

“하…….”

강우는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떠뜨렸다.

하늘을 수놓은 검은 딱정벌레와 무수한 날갯짓 소리, 끓어오르는 용암과 저 멀리 보이는 검은 탑.

어느새 그는 처음 <사이트 스톤>에 들어섰을 때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도돌이표 같은 상황이나, 데스 나이트의 검이 심장을 파고들던 감각만은 생생했다.

살면서 두 번째로 경험한 죽음이다.

‘살(殺)이라…….’

데스 나이트의 기술은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그와 퍽 잘 어울리는 기술명.

한 차례 심호흡을 한 강우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라고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건 아니니, 지체할 여유는 없다.

‘적어도 석철이 입국하기 전에는 마무리 지어야 한다.’

다행히 싸움을 반복할수록 유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몸은 처음처럼 말끔해져 있고, 그러면서도 마물을 처치하고 얻은 마력은 그대로이니까.

이곳에서의 죽음도 하나의 회귀라면, 강우는 회귀할 때마다 강해지는 셈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용암에서 튀어나온 마물들을 처치하고, 탑으로 향했다.

타임 리셋이라도 된 것마냥 데스 나이트는 같은 자세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르르르…….

그의 손짓에 따라 마물 수십 마리가 바닥에서 솟아냈다.

“…….”

강우는 <피바라기>를 고쳐 쥐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꽤 지리멸렬한 싸움이 될 것 같다고.

하지만 그게 얼마가 됐든 결과는 같았다.

‘천 번이든 만 번이든 해치워 주마. 그게 무엇이든.’

강우는 다시 마물들을 향해 검은 마력을 날렸다.

* * *

“어허? 또 자세 흐트러진다?!”

“헉, 헉… 죄송해요.”

유아라는 청익의 지적에 서둘러 자세를 가다듬었다.

물컹한 고무공 위에서 한 발로만―그것도 엄지발가락 하나만으로―균형을 유지한 채 단검을 깊게 찌르는 자세였다.

청익이 개발했다는 암살자 ‘십이자세’ 중 다섯 번째 동작.

온몸에서 쉰내가 날 정도로 길고 모진 고강도 훈련이나, 유아라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버텨 냈다.

‘독하다, 독해.’

유아라의 눈빛에서 독기를 읽은 청익은 혀를 내둘렀다.

― 당신들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검을 가르쳐 주세요.

양복점을 찾아온 유아라는 대뜸 황 노인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당돌한 태도에 청익은 혀를 찼으나…….

‘엥?’

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우 때처럼.

그것도 모자라 황 노인은 그녀를 청익에게 맡겼다.

그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강우야 그렇다고 쳐도 이 여자는 뭐란 말인가.

수장은 이 여자에게서도 뭘 봤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청익은 그녀를 맡았다.

물론 악의가 아주 없었다면 거짓이다.

권기한 때 속을 썩인 것도 있고 하니, 알아서 나가떨어지게 할 생각이었다.

치악산에서의 수련도 다 못 마친 그녀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유아라의 독기는 청익의 상상을 초월했다.

‘이건 치악산보다도 강도가 높은 건데…….’

암살자의 마음가짐이니, 암살자 십이자세니, 그런 건 모두 ‘구라’였다.

단지 그녀를 떨쳐 내기 위해 거짓으로 만들어 낸 훈련들.

그런데도 그녀는 이 반고문 형태인 훈련을 다 따라오고 있었다.

‘제길.’

결국 청익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장이 이 여자를 그냥 거둔 게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그러자 괜히 미안한 마음과 함께 흥미가 일었다.

‘진짜 한번 제대로 키워 봐?’

전투 센스도 나쁘지 않고, 이 나이에 이 정도 집념이라면 정말로 뛰어난 암살자가 탄생할지도 몰랐다.

검계가 아무리 다국적 성향인 길드라고 해도 구성원이 그런 거지, 세계적인 수준의 길드는 아니다.

청익만 해도 전 세계로 치면 한없이 밀려나는 수준.

‘심수련은 애초에 속세 일에는 관심도 없고.’

한국, 아니, 아시아 최고의 암살자라는 심수련은 치악산 <균열>에서 암살자를 양성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제 이름에 걸맞은 천직이라나 뭐라나.

게다가 그녀의 나이는 이미 환갑에 가까웠다.

‘어쩌면 제2의 심수련이 나올지도 모르지.’

유아라에겐 독보적인 ‘독기’가 있었다.

한강우를 만나면서 좀 빠지나 싶었는데, 어느새 그녀에겐 새로운 ‘독기’가 차오른 듯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자세를 계속 유지하던 유아라가 물었다.

“저… 아직 20분 안 지났나요?”

‘아차.’

“쉬어! 쉬어!”

청익은 서둘러 그녀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푸하!”

그러자 유아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달아오른 얼굴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청익은 몰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념에 빠진 사이, 목표하던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도 다 해내다니…….

‘저런 건 나도 못 해. 그래, 결심했다!’

언젠간 자신도 은퇴하는 날이 올 터였다.

물론, 그때는 황 노인도 수장직에서 물러난 뒤겠지만… 검계 특성상 조직에는 항시 뛰어난 암살자가 필요했다.

새로운 수장을 지킬 인물도 필요하고.

‘저 집념이 수장을 지키는 데 쓰인다면… 분명 어마어마할 거야.’

청익은 결심했다.

유아라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워 보기로.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유아라는 검계의 수장을 지킬 마음 따윈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남자로만 가득했으니까.

‘반드시 갚아 줄 거야.’

유아라는 한강우를 만난 뒤로 빚만 계속 지고 있었다.

언니의 일도, 권기한의 일도.

그녀에게 그 빚은 그 어떠한 상처보다도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 그런 건 나도 모른다. 그저… 안고 살아갈 뿐.

안고 살아간다.

강우는 그저 할 말이 없어 뱉은 말이겠으나, 유아라에게는 새 삶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니, 지켜봐 줘.’

그렇게 동상이몽으로 시작된 하나의 사제 관계가 탄생하였다.

* * *

콰득!

“…….”

강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구겼다.

31전 31패.

현재 자신의 전적이었다.

데스 나이트와의 대결은 대등해진다 싶으면 대번에 판이 뒤집혔다.

<죽음의 고리> 때문이었다.

벌써 세 개까지 늘어난 고리는 그 수가 늘어날수록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과거에 본 고리는 최대 두 개가 한계였으나, 데스 나이트에게 그런 제약 따윈 없는 모양이다.

시계를 살핀 강우가 중얼거렸다.

“이젠 몇 개까지 늘어날지가 궁금해질 지경이군.”

강우는 그게 고리일지, 아니면 자신의 죽음일지 알지 못했다.

그저 다시 탑으로 향할 뿐.

어느새 그는 죽음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 * *

캉!

강우의 <피바라기>가 아슬아슬하게 데스 나이트의 목 이음새에 닿았으나, 그리 깊진 않았다.

덕분에 반격을 허용한 강우는 롱 소드에 베여 절명했다.

70번째 죽음이었다.

70전 70패.

* * *

콰과과과!

검은 반월들로 데스 나이트의 동선을 틀어막은 강우가 그 틈을 타 <피바라기>를 찔러 넣었다.

콰득!

일격을 당한 데스 나이트의 왼쪽 어깨가 부서져 나가며 휘청였으나, 어느새 궤적을 바꾼 롱 소드가 강우의 몸을 갈랐다.

101전 101패.

* * *

이번엔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처음보다 배로 불어난 강우의 마력이 주변 공기를 장악하는 가운데, 검은 마력을 견디지 못한 데스 나이트가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승기를 잡은 강우가 상대의 가슴에 <피바라기>를 찔러 넣으려던 그때.

콰득!

언뜻 네 개로 늘어난 <죽음이 고리>와 함께 강우의 시야가 전복됐다.

173전 173패.

* * *

200회 차부터는 조금 다른 전술을 택했다.

데스 나이트가 점차 불어난 강우의 마력을 부담스러워하기에, 강우는 계속 거리를 벌리며 원거리전을 택했다.

계속해서 반월과 쐐기 형태의 검은 마력을 퍼부으며 상대가 밟는 곳마다 자신의 마력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데스 나이트가 빈틈을 보인 찰나.

강우는 처음으로 그의 가슴에 <피바라기>를 찔러 넣었다.

[……!]

콰직!

<피바라기>가 보기 좋게 갑옷을 부수고 들어가자, 언뜻 그 속으로 붉은빛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은 신음과 함께 데스 나이트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강우의 목을 붙들었다.

우득!

255전 255패.

* * *

거듭된 죽음 탓인지,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이번이 스물네 번째 밤인지, 스물다섯 번째 밤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지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강우는 전투가 반복될수록 더한 투지와 흥미가 이는 것을 느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고, 아무리 죽어도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생생해진다니.

강우로서는 이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다.

캉! 캉! 캉!

데스 나이트는 강우가 계속 거리를 벌리며 체력을 빼자, 이젠 전략을 바꿔 대놓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강우의 마력은 그와 비등해진 상태.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는 <죽음의 고리> 다섯을 가진 데스 나이트와도 견줄 수준이었다.

팽팽한 백병전이 이어지고, 마침내 기회를 잡은 <피바라기>가 위에서부터 크게 휘몰아쳤다.

[……!!]

데스 나이트가 기겁하며 팔로 막아 보려 했으나, 강우의 공격이 더 빨랐다.

콰드드득!

<피바라기>에 맺힌 검은 마력이 기사의 투구와 갑옷을 일직선으로 부쉈다.

작게 갈라진 투구의 파편이 튀고, 반으로 쪼개진 갑옷이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 안으로 들어선 건 검은 어둠뿐이나, 확실히 데스 나이트는 타격을 입고 휘청였다.

처음으로 가슴에 박힌 붉은 핵이 제대로 보였다.

서로의 손을 움켜쥔 둘이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마침내 팔마저 일그러뜨린 강우가 붉은 심장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그곳에서 생살이 뜯기는 듯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그그그극!

이윽고 붉은 핵이 데스 나이트의 몸을 완전히 벗어나자…….

쿵!

드디어 기운을 잃은 데스 나이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559전 558패 1승.

그토록 기나긴 싸움이 끝났다.

* * *

데스 나이트가 죽었지만, 강우는 다시 처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물이 등장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는 별다른 방해 없이 탑에 다다를 수 있었다.

“…….”

예상대로 탑 앞에는 데스 나이트가 건재하게 서 있었으나, 더 이상 마물을 소환하지는 않았다.

강우가 다가서자 문을 가로막고 있던 죽음의 기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비로소 강우의 입장을 허락한 것이다.

두 발 옆으로 물러선 그가 말했다.

[넌 자격을 증명했다. 들어가도 좋다.]

559번의 싸움 끝에 다시 듣는 오랜 적수의 목소리였다.

강우는 그 긴 시간 동안 갈망하던 문을 바라봤다.

거꾸로 된 오망성이 새겨진 문.

과연 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559번의 싸움 때문일까.

기사의 말에 조금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건투를 빌지.]

“…고맙다.”

강우는 데스 나이트와 짧은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악수를 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다.

데스 나이트에게 걸려 있던 <죽음의 고리> 하나가 강우의 손목으로 넘어온 것이다.

강우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영혼을 팔아 얻은 게 아니니까. 이건 온전히 너의 것이다. 네 전리품이지.]

…보상이라는 건가.

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말에서 악의나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강우는 죽음의 기사를 뒤로한 채 문으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쿠구구구궁―

그저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 문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알아서 열렸다.

안은 칠흑 같은 어둠뿐.

어둠을 확인한 강우가 돌아보자, 데스 나이트는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보였다.

“…….”

그렇게 강우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탑의 내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쿵!

그가 들어서자마자 문은 기다렸다는 듯 닫혀 버렸다.

탑 안은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공터뿐.

저 먼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느껴지는 존재감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걸음 내디뎠을 무렵, 강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존재 때문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향해 서 있는 존재.

그걸 확인한 강우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

낯익은, 아니, 잊으려야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강우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그러자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상대.

강우를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또 보는군.]

바로 데스 나이트였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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