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32화 (33/186)

[32화] 검은 기사 (1)

박도진이 해 준 콩나물 불고기는 박광석이 해 준 것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그의 요리를 맛본 유아라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입니다.”

박도진은 강우와 유아라가 먹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젓가락을 들었고, 박수영은 ‘우리 아빠 요리 잘해요!’라며 신나게 외쳤다.

강우는 식탁에 둘러앉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온 뒤로 부쩍 이런 시간이 늘었군.’

검계 회동 때도 그렇고, 박광석과의 식사도 그렇고…….

과거엔 경험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시간 대부분을 <균열> 내부에서 보내기도 했거니와, 사람 많은 장소를 피하던 강우는 회식도 잘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석탈해나 석철과 가뭄에 콩 나듯 갖는 술자리가 전부였다.

그땐 워낙 바빴기에 장혜진과 식사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강우는 이런 자리가 다소 어색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군.’

하나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

그건 지난 삶에서 강우가 제대로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혈혈단신이던 그는 항상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남들보다 곱절은 더 노력해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장혜진을 만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계속 싸워 나갔다.

이전의 삶은 투쟁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비록 그 끝은 쿠데타에 실패한 혁명가만도 못한 결과였지만.

― 저 남자… 계속 살 수 있을까요?

박도진이 이 집으로 실려 온 그날 밤.

기절해 있는 그를 보며 유아라가 물었다.

그가 박광석의 죽음으로부터 받았을 충격을 우려한 질문이었다.

―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그건 강우가 답을 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건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우가 뱉은 말은 흔하디흔한 통속적인 말뿐이었다.

― 그런 건 나도 모른다. 그저… 안고 살아갈 뿐.

어쩌면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었다.

강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그러나 유아라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 부질없는 답변에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답을 얻은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문득 그녀가 얻은 답이 궁금했으나, 강우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 저… 여기 며칠 묵고 싶어요.

그 뒤로 유아라는 이 집에 남았다.

황 노인이 강우를 위해 준비했다는 이 단독주택은 사실 그가 홀로 지내기엔 너무 컸다.

1층에 자리한 방만 무려 네 개.

2층까지 합하면 방이 모두 일곱 개나 되는 대저택이다.

혹시 노인은 이런 상황까지 예측했던 걸까?

‘알 수 없군.’

강우는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 * *

권기한의 집무실에서 얻은 서류는 대부분이 각서나 계약서, 로비 장부 따위였다.

아마도 김 실장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놈의 금고에 처박아졌을 서류들.

하지만 강우가 찾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신(新) 각성화 사업 보고서』

마침내 강우는 그곳에서 필요한 서류를 찾아냈다.

<균열>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각성화 일지’였다.

그곳에는 아이들을 제공한 보육원의 목록부터 신상 정보와 실험 일자, 그 과정과 결과까지 쓰여 있었다.

강우는 굳이 과정까지 살펴보진 않았다.

그는 곧장 서류의 마지막 장에 있는 ‘구매자 목록’을 확인했다.

구매자 목록이 빼곡했으나, 두 장이라 양이 많진 않았다.

‘판교.’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판교역’에서 치러진 거래.

나머지는 모두 인천항에서 행해졌는데, 유일하게 한 인물만이 판교역에서 거래를 했다.

비고란에는 ‘얼굴 본 적 없음’, ‘나타나는 이가 매번 바뀜. 전달책이라 추정됨’ 등이 적혀 있었다.

‘판교역에서 거래가 이뤄졌다면… 국내 인물인가?’

물론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의도된 눈속임일 수도 있으니까.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강우는 일지를 덮었다.

‘정말 호공일까?’

판교역 주변 CCTV를 살피는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알아낼 상대라면 권기한이라고 못 알아냈을 리 없다.

분명 놈은 치밀하고 비밀스러운 루트로 아이들을 운반하고 있겠지.

그때였다.

마침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한강우 씨?]

황한수였다.

“알아냈나?”

[예. 두 사람 모두 찾았어요. 그런데… 호공이라는 사람의 행적이 묘연해요. 마지막으로 목격된 게 라스베이거스인데, 4개월 전이에요.]

“라스베이거스?”

[네. 9개월 전에는 마카오에 잠시 있었고요. 카지노를 즐겼던 걸까요?]

도박과 주색을 즐긴 석철과 달리 호공은 그런 쪽에 취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놈은 ‘카지노’ 쪽 인사를 만나기 위해 그 두 곳을 찾았겠지.

카지노라면… 후버인가?

“석철은?”

[석철이란 자는 현재 용병단으로 활약 중이에요. 열 명 안쪽으로 무리 지어 다니는 것 같은데…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그쪽에선 손속이 잔인하기로 명성이 자자한가 봐요. 그 일대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던데요? 지금은 멕시코에서 균열을 모조리 부수고 다닌다네요.]

과연 석철다운 행보였다.

놈은 과거에도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쉴 새 없이 <균열>을 깨부수고 다녔으니까.

모진 손속은 덤이었다.

[그런데 석철도 9개월 전에 마카오에 갔었어요.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역시나 호공과 석철, 둘은 주기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제가 아주 귀중한 정보를 하나 입수했어요.]

“……?”

잠시 뜸을 들이던 황한수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철이 2주 뒤에 한국에 들어온대요.]

“뭐?”

담담하던 강우도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만족하며 황한수가 말을 이었다.

[콘퍼런스에 참가하기로 했나 봐요. 각국 쓰레기 무덤에 관련된 환경 단체 협의인데… 이 사람, 환경에 관심이 많은가?]

석철이 환경 컨퍼런스를?

강우는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당연히 놈이 그런 곳에 관심을 둘 리 없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테지.

“그 외에 더 알아낸 건?”

[아직은 여기까지예요. 더 나오는 게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일단은 석철이 데리고 있는 용병단 목록을 보내 드릴 테니, 살펴보세요.]

“고맙다. 그리고 하나 더 알아볼 게 있는데.”

강우는 판교역에 대한 의뢰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황한수가 보낸 석철의 용병단 목록이 도착했으나,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석철이 온다. 그저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백귀 <균열>이 등장하는 게 약 일주일 뒤, 석철이 한국으로 오는 게 약 이 주 뒤.

어쩌면 석철의 귀환이 백귀와 연관 있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바빠졌군.’

고민을 마친 강우는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박수영의 색칠 공부를 봐주던 박도진이 그를 보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이 삼 일째인데도 별말 없는 걸 보면, 그는 아마도 계속 이곳에서 지낼 생각인 듯했다.

뭐, 군말 없이 요리도 하고, 청소에 빨래도 하니, 강우도 굳이 내쫓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도진의 살림 실력은 ‘발군’이었다.

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을 세우고 있는 옷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짐짓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무지막지한 손을 저런 곳에 쓰다니… 호공이 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며칠 지하에 있겠다.”

“알겠습니다.”

박도진은 지하엔 왜 가는지, 얼마나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수긍할 뿐.

강우는 그 점이 좋았다.

뒤늦게 박수영이 관심을 보였지만, 색칠 공부가 재밌었는지 입술까지 깨문 채 다시 그곳에 집중했다.

강우는 그 길로 계단 아래 있는 지하로 향했다.

며칠간 유아라는 뭘 하는지 낮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밤마다 지친 얼굴로 나타나는 걸 보면 수련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있을는지 모르겠군.’

아무리 박수영이 있다지만, 성인 남자 둘이 있는 집이 그녀라고 편할 리 없을 텐데.

저택 아래 자리한 지하는 전 주인이 취미 공간으로 썼는지, 제법 구색을 잘 갖추고 있었다.

강우는 지하로 내려오는 문을 잠근 뒤, 주머니에서 연둣빛 광물을 꺼냈다.

오랜만에 보는 <사이트 스톤>.

권기한이 죽던 밤, 강우는 마침내 3차 각성을 이뤘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다시 죽음의 기사와 마주할 시간.

강우는 <사이트 스톤>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 *

다시 찾은 <사이트 스톤>의 세상은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달라진 건 3차 각성자가 된 강우뿐.

그는 오늘도 어디론가 바쁘게 날아가는 딱정벌레를 뒤로한 채 탑을 향해 나아갔다.

확실히 이전보다 이곳 공기가 주는 압박감이 줄어 있었다.

이번에도 검은 마력에 휩싸인 문둥병 마물들이 용암에서 튀어나왔으나, 강우의 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마침내 도착한 탑.

그곳에는 검은 갑주를 입은 데스 나이트가 여전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기다린 듯이.

“또 보는군.”

데스 나이트는 여전히 과묵했다.

그는 강우의 인사에도 묵묵히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저번과 같은 패턴이다.

크르르.

강우는 어김없이 소환된 십여 마리의 마물을 바라보며 <피바라기>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놈들이 다 헤친 헝겊 같은 날개를 펄럭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그렇게 한 마물이 강우를 향해 창을 치켜들던 찰나.

츠츠츠츳!

일순간 <피바라기>에서 강렬한 마력 스파크가 튀더니, 곧 반월(半月) 형태의 검은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콰과과과―!

검은 반월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간 반월의 기운이 마물의 사지를 찢고, 그 피를 불태웠다.

살아 숨 쉬던 몸뚱이가 순식간에 한낱 고깃덩어리로 전락했다.

익숙한 피 냄새를 맡으며 강우는 생각했다.

‘아직 부족해.’

3차 각성을 이루고 처음 펼쳐 보는 기술.

1차와 2차 각성이 마력을 이해하고 다루는 경지라면, 3차 각성은 그것을 밖으로 방출하는 경지다.

다행히 과거의 경험이 사라지진 않았는지, 마력을 방출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다만, 그 양이 아쉬울 뿐.

“…….”

강우가 어떠냐는 듯 쳐다보자, 데스 나이트의 기세가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차례나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피바라기>의 궤적을 따라 수십, 수백 마물의 시체가 쌓이고, 흘러나온 피가 거대한 웅덩이를 이루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강우의 호흡도 거칠어졌으나, 마물의 죽음은 고스란히 강우의 마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강우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못 보던 새 많이 달라졌군.]

이윽고 기계적이기까지 한 전투가 끝나자, 데스 나이트의 묵직한 음성이 주변을 울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널브러져 있던 마물의 시체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강우가 앞머리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 내며 물었다.

“이제 자격을 갖춘 셈인가?”

[그럭저럭.]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느새 데스 나이트는 자신의 롱 소드를 뽑아 들고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손조차 대지 않던 검.

“…꽤 인색한 스타일이군.”

애초부터 목표는 정해져 있었으므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대번에 날아오른 강우가 검은 마력을 방출하며 <피바라기>를 찌르자, 데스 나이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롱 소드를 휘둘렀다.

콰과과과!

둘의 격돌은 폭풍을 일으켰다.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바닥이 부서져 나가고, 광풍에 휩쓸린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돌 소나기에 딱정벌레들이 몸을 떠는 가운데,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강우가 물었다.

“오늘은 문 안을 확인했으면 좋겠군.”

[할 수 있다면.]

캉!

강우가 재빨리 갑옷의 이음새를 노리고 옆구리를 찔렀으나, 데스 나이트는 허리를 틀어 간단히 막아 냈다.

그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강우가 그것을 피해 내기 무섭게 롱 소드가 사선으로 불쑥 튀어 올랐다.

목표는 어깨와 흉부.

급히 <피바리기>를 들어서 막았지만, 힘의 격차가 엄청났다.

각성의 경지를 떠나서 상대의 신체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콰드드드득!

검을 쳐 낸 페스카즈에서 불똥이 튀고, 강우는 뒤로 크게 밀려났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달려들며 롱 소드를 양손으로 말아쥐었다.

어느새 그의 손목에 생겨난 검은 팔찌가 선명히 눈에 띄었다.

상급 마물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만 소환 가능하다는 <죽음의 고리>.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 대가로 힘을 얻는 주문이었다.

강우는 어느새 주변을 장악한 강한 살기를 느끼며 데스 나이트의 공격에 대비했다.

허공에서 가죽 찢기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검은 묵직하고 매서웠다.

콰과광!

두 번째 격돌도 강우의 패배였다.

한없이 밀려난 강우는 시큰대는 손목의 통증을 느끼며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아직이로군.’

강우는 패배를 인정했다.

애당초 한 번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막상 부딪쳐 보니 상대의 존재감이 확실히 와닿았다.

어느새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놀라기는 데스 나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그는 미세하게 찌그러진 자신의 어깨를 슬쩍 바라봤다.

막아 내기도 힘들었을 텐데, 강우는 그 와중에도 반격을 노린 것이다.

만약 조금만 더 마력이 강했다면, 어깨를 내줬을 수도 있었다.

‘놀랍군.’

그러나 데스 나이트는 티 내지 않았다.

굳이 상대의 기를 살려 줄 필요는 없지.

그는 멈춰 선 강우에게 물었다.

[포기인가?]

“그럴 리가.”

강우는 다시금 <피바라기>를 겨누었다.

몸은 지쳤으나, 그럴수록 강한 투지가 일었다.

그 모습을 본 데스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순간, 데스 나이트의 신형이 흔들린다 싶더니, 대번에 기세가 바뀌었다.

어느새 불어닥친 뜨거운 바람이 강우의 몸을 덮치고, <죽음의 고리> 두 개를 걸친 상대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검은 투구 속에서 살얼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殺).]

그건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섬뜩한 살기가 쇄도하는 동시에, 검에서 뻗어 나온 검은 쐐기가 강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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