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박도진 (5)
다시 권기한의 집무실.
한동안 눈앞의 여자를 지켜보던 강우가 마침내 그 이름을 떠올렸다.
“…왕선화?”
“누가 왕선화야? 나 한선화야!”
그러자 그녀는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권기한의 집무실에 있던 그녀의 정체는 바로 왕린의 수양딸이라던 한선화였다.
이무기의 비늘을 구해 준.
‘이 여자가 왜 여기에?’
강우는 여전히 골리앗 같은 남자의 턱에 <피바라기>를 댄 채 물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일단 그것부터 치우고 말해요. 우리 편이니까.”
“…….”
그 말에 강우는 잡고 있던 남자를 풀어주었다.
일어선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잠시 강우를 노려보더니, 이내 옷을 털었다.
강우가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한선화가 부서진 문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적어도 그쪽처럼 막무가내로 들어오진 않았네요.”
“…….”
“난 내 할 일을 하러 왔어요. 아빠가 권기한을 털어먹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제 취미가 빈집털이라. 그러는 당신은 여기 무슨 일이죠?”
강우는 대답 대신 한선화와 그 주변을 살폈다.
잔뜩 어질러진 집무실과 그녀의 옆으로 놓인 여행 가방.
아마 그녀도 이곳에서 강우처럼 무언가를 찾으려던 모양이었다.
“필요한 자료가 있을까 해서.”
그 말에 한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근데 어쩌죠? 이놈 금고가 아주 단단한데.”
드르륵.
그녀가 손짓하자 골리앗 사내가 다가가 그 앞에 있던 커다란 자명종 시계를 치웠다.
그러자 그 뒤로 벽에 달린 문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굳건해 보이는 금고 문이.
“마력 금고예요.”
마력 금고.
애초에 제작할 때부터 사용자의 마력을 담는 특수한 금고였다.
과거에 지문이나 얼굴 인식이 있었다면, 지금은 마력 인식이 보안의 대표 격이었다.
앞서 집무실 입구에서 본 마력 인식기에 비하면 수십 배는 더 보안이 철저한 금고.
‘역시 집무실에 금고가 존재했군.’
의심 많은 권기한이라면 은행 VVIP 금고 따위는 쓰지 않을 줄 알았다.
한선화가 입술을 쥐어뜯으며 짜증 난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대로라면 금고째 뜯어내는 수밖에 없는데… 이걸 여기서 어떻게 들고 갈지가 걱정이네요. 밖에 기자들 쫙 깔렸는데…….”
강우는 한선화의 옆으로 다가가 같이 금고를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뜯어서 가져가기엔 덩치가 컸다.
“한 가지만 약속하십시오.”
“…약속이요?”
한선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는 사이, 금고에 손을 댄 강우가 말했다.
“문을 여는 대신 금고에 뭐가 있든 내가 먼저 살핍니다.”
“문을 연다고요?”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으나, 이내 강우의 진지한 표정에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뭐야, 이 남자?’
만약 약속하지 않으면 금고도 내주지 않을 듯한 눈빛이었다.
한선화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열 수만 있으면 그런 게 대수겠어요. 대신 당신 말대로 먼저 ‘확인’만 하는 거예요. 분배는 별개고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우리가 만난 건 아빠한테 비밀로 하기.”
강우는 대답을 듣기 무섭게 금고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 잠금장치’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잘 짜인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
그만큼 마력의 정교한 조작을 요구하지만, 강우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강우는 마력으로 금고 내부를 헤집으며 생각했다.
‘의외로 금고는 값싼 걸 쓰는군.’
물론, 이 금고도 무려 수억을 오가는 물건이나, 수천억을 호가하는 최상급 금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덜컥!
이윽고 시원한 마찰음과 함께 금고가 열렸다.
“저, 정말 연 거예요?!”
한선화의 외침에 옆에 있던 남자도 움찔하며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묵묵히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서류를 비롯해 각종 보석과 달러 등이 담겨 있었는데, 강우가 챙긴 건 서류 뭉치뿐이었다.
생각보다 서류 종류가 많았다.
‘쓸 만한 게 있어야 할 텐데.’
이윽고 강우가 서류만 챙긴 채 자리에서 일어서자, 한선화가 의아한 듯 물었다.
“끝이에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금고 속 보석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니, 돈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이무기 비늘 필요하다며?”
“필요한 건 비늘이지, 돈이 아닙니다. 구할 물량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하!”
그러자 한선화가 기가 찬다는 듯 강우를 바라보더니, 돌연 금고 안에 불쑥 손을 넣어 보석 몇 개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강제로 강우의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강우가 무슨 짓이냐는 듯 바라보자, 그녀가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거라도 가져가요. 사람이 물욕이 있어야지!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게 뭔지 알아요? 사랑? 명예? 외모? 아니, 바로 이런 거예요.”
이어서 그녀가 금고 안에서 주먹만 한 보석 하나를 끄집어냈다.
마치 물방울처럼 생긴 청록색 보석이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 수십억대 반지, 한정판 백, 명품 킬힐, 수백 칸짜리 집, 럭셔리한 카. 그런 게 그 사람을 나타내고 보여 준다고요. 만날 이런 정장만 입고 다녀서는 아무도 잘난 줄 몰라요.”
“…….”
“난 이걸 챙기러 온 거예요. 저번에 한 번 경매에 나왔는데, 권기한이 채 갔거든요. 보통 사람은 이런 걸 원한다고요. 아시겠어요?”
한바탕 꾸짖음(?)을 당한 강우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원하는 건 다 얻었으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뒤편에서는 한선화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다음에 만날 땐 그 돈으로 새 정장 맞춰요! 부족하면 내가 보태 줄게! 내 말 듣고 있어요?!”
‘…괜히 왕린이 딸을 삼은 게 아니군.’
곧 강우는 이한의 수원 본부를 빠져나왔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박도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하얀 도화지였다.
그것이 천장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약 수십 초가 걸렸다.
“…….”
그가 누워 있는 곳은 산뜻한 침대 위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침대에 붙들리기라도 한 듯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결국 일어나기를 포기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고급 전등과 고풍스러운 거울, 전부 새것으로 보이는 가구들까지…….
5성급 호텔이라도 해도 믿을 만한 방이지만, 아무도 살지 않은 것처럼 단조로웠다.
마치 갓 지은 집처럼.
『속보…….』
그때, 밖에서 어렴풋이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박도진은 안간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혁명에 나선 군중들처럼 온몸 곳곳에서 아우성을 쳐 댔다.
그는 곰곰이 마지막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이한 길드의 장안 지부로 찾아가 싸우고, 권기한을 덩치 큰 남자에게 맡기고… 그 뒤에 어떻게 됐지?
‘기절한 건가.’
마지막 기억이 장안 지부를 막 나서던 장면이니,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날 자신은 그대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계치를 벗어난 힘을 사용했다.
이렇게 다시 눈을 뜬 건 기적 같은 일.
간신히 두 발을 바닥에 붙인 박도진은 작은 신음을 흘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아직 이곳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 만큼 안심은 금물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그 옆으로도 방이 몇 개 있으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박도진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아래층을 향해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계단 아래는 축구장 삼아도 될 정도로 큰 거실이 있었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회색, 흰색 투톤으로만 도배된 벽.
가운데 들어선 큼지막한 검은 소파와 그 앞에 깔린 짙은 회색의 러그.
무채색으로만 장식된 거실은 모던하고 클래식한 감성을 자아냈다.
거실 정면에 자리한 통창 너머로는 간이 테라스와 잔디가 깔린 마당이 보였다.
『속보! 권기한 이한 길드장 구속! 균열 확산 속…….』
『헌터 경찰, 권기한 전 길드장 ‘아동 인신 매매 혐의’ 조사 중…….』
『속보! 이한 길드 측에 수사 자료 유출 경찰관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
방에서 들은 말소리의 정체는 바로 뉴스였던 모양이다.
큼지막한 TV에는 채널이 네 개가 틀어져 있었는데, 모두 권기한에 대한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였다.
박도진이 멍한 기분으로 TV를 바라보는 사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수영아……!”
문으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딸 박수영이었다.
박도진의 얼굴이 절로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신발을 던지다시피 벗은 소녀가 후다닥 달려와 그 품에 안겼다.
“아빠! 왜 이렇게 오래 자! 걱정했잖아!”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박도진은 자신의 품에 뺨을 비비는 박수영을 안쓰럽게 끌어안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확인했으니, 아이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분에 못 이겨 그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는 잠시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깼군.”
그때, 박수영에 이어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강우였다.
“최한석 씨…….”
박도진이 얼떨떨하게 강우를 부르자, 그 품에 안겨 있던 박수영이 말했다.
“아빠, 저 아저씨 최한석 아저씨 아니야! 한강우 아저씨야!”
“한강우?”
그러나 강우는 박도진의 의아해하는 시선에도 별 대꾸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장을 본 듯 손에 들린 봉투 안으로 각종 식자재가 내비쳤다.
“수영아, 잠시만.”
박도진은 머뭇머뭇 강우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역시 거실과 같은 투톤 인테리어였는데, 유일하게 밥통만은 빨갰다.
강우는 냉장고에 불려 놓은 쌀을 꺼내 막 밥통에 넣는 참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도진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여긴… 당신의 집인가요? 당신이 절 데려온 겁니까? 아버지는…….”
순식간에 몇 가지 질문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강우는 그의 입을 막으려는 듯 딱 잘라 답했다.
“오늘이 꼬박 삼 일째다. 장안 지부에서 기절한 널 왕린의 수하가 데려왔더군.”
왕린이라면 그 헌터 경찰인가?
아니면 권기한을 데려간 거구의 사내?
박도진이 바쁘게 기억을 더듬는 가운데, 강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아이는 기억을 잃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잔뜩 굳은 박도진의 표정에 강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린이 그날의 기억을 조작했다. 네 딸은 박광석을 기억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죽은 걸로 알고 있어.”
“…….”
“원한다면 되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네 판단이지.”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건 박도진에게 있어서도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거.”
강우가 건넨 건 작은 쪽지였다.
그곳에 적힌 건 한 납골당 주소였다.
“당신 아버지는 그곳에 모셨다. 그건 청익이 한 거다. 네가 골목에서 상대했던 자이지.”
“…….”
쪽지를 쥔 박도진의 손이 한없이 떨리고 눈가가 붉어졌다.
가슴이 미어졌다.
이윽고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글쎄,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군. 나도 혼란스러워.”
현 상황처럼 의뭉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답변을 듣기로 한 것 같은데.”
“…물어보십시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박도진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그가 자신에게 말할 부탁이란 무엇일까?
아버지를 대신 모셔 주고, 딸을 배려해 주고, 자신을 3일 동안 돌봐 주고…….
의왕 <균열>에서조차도 꺼내지 않은 부탁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긴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우의 답변은 허탈했다.
“밥 먹고 가라.”
“…예?”
“여럿이서 먹는 건 처음이라… 실수로 쌀을 많이 했어.”
“……?”
강우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자, 박도진은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다.
홀로 3차 각성자를 도륙 내고, 늘 쌀쌀맞게 굴던 그가 하는 부탁이란 게 고작 ‘밥 먹고 가라’라니.
“진심…입니까?”
“지금 이 쌀들이 거짓으로 보이나?”
강우가 가리킨 밥솥엔 정말로 쌀이 수북했다.
장담하건대, 저대로 취사를 했다간 밥솥이 넘칠 터였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박수영이 당신 아버지가 해 주던 콩불을 기억하던데, 난감하군.”
언뜻 봉지 안을 살피니, 콩나물과 돼지고기가 보였다.
아무래도 강우는 박수영에게 콩불을 해 주려던 모양이었다.
그때, 박수영이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왔다.
“아저씨, 밥은 아직이에요?”
“…조금만 기다려라.”
“제가… 좀 볼까요?”
“……?”
그래도 한때는 박수영의 밥을 책임진 박도진이라 살림살이에는 나름 빠삭했다.
그는 강우 대신 봉지에서 고기와 콩나물을 꺼내더니, 딸에게 물었다.
“수영아, 아저씨 말고 아빠가 해 주는 콩나물 불고기는 어때?”
그러자 슬쩍 강우의 눈치를 살핀 박수영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혹시 아저씨가 속상해할까 봐 이렇게 하는 거야. 나는 더 좋아!”
하지만 강우가 그 말을 못 들을 리 없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을 텐데.”
“아닙니다. 3일이나 신세를 졌는데…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그렇게 두 팔을 걷어붙인 박도진은 요리를 시작했다.
“아, 그런데 말을 못 했는데, 한 사람이 더 있―”
“저 왔어요.”
강우가 막 말을 꺼내려던 그때, 집 안으로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유아라였다.
한 손에 참기름을 든 그녀가 박도진을 보고 흠칫하며 말했다.
“이, 일어났어요? 참기름을 빠뜨렸다고 해서…….”
“지낼 곳이 없다고 해서 며칠 2층에서 묵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박도진은 별 반응 없이 콩나물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고.
설사 죽는 날까지 평생 콩나물 머리를 따라고 해도 따르겠다고.
평생 참회하는 기분으로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