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29화 (30/186)

[29화] 박도진 (3)

“전부 정리하란 말이야! 우리와 연관된 건 철저히 다 끊으라고 해! 필요하면 죽여서라도!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이한의 이 자도 절대 못 나오게 해! 빨리!”

“예!”

권기한의 성화에 수하들이 허겁지겁 집무실을 벗어났다.

한밤중에 불려온 장안 지부장 안상혁만이 홀로 권기한과 남아 눈치를 볼 뿐이었다.

집무실 내부가 서릿발이라도 내린 듯 한기가 돌았다.

‘왜 하필 우리 지부로…….’

안상혁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한 길드의 중심은 이곳 장안 지부가 됐다.

본래 있던 본부의 수뇌부가 전부 죽어 버린 탓이었다.

사실상 컨트롤 타워나 다름없던 김 실장의 부재로 이한의 관리 체제는 엉망이었다.

그간 대외 활동에 집중한 권기한만이 그걸 모르고 있을 뿐.

“현재 남은 전력이 얼마나 되지?”

“자, 장안 지부 소속 2차 각성자가 열입니다. 합류한 타 지부까지 합하면 스물이 좀 안 됩니다만… 현재 계속 합류 중 있습니다.”

“3차는?”

“3차 각성자는… 기, 길드장님뿐입니다.”

“이런 씨발!”

권기한은 이마가 지끈거림을 느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거지?’

불과 몇 시간이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길드의 존망이 휘청일 정도로 나락 끝에 설 수 있는 건가?

그것도 국내 굴지의 랭킹 6위 길드가?

‘무려 백 명이다.’

백 명이 넘는 이한 길드원이 의왕 IC에 갇혀 버렸다.

길드 내 3차 각성자를 모조리 작전에 동원했으니, 사실상 그들이 이한의 주 전력인 셈.

그런데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균열 내 사고가 흔하다고 해도 그 정도 규모면 파장이 엄청날 텐데…….’

권기한은 뒤늦게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놈들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았을 때, 일을 숨길 게 아니라 오히려 기자를 부르고 증인들을 만들어야 했다.

몰래 촬영이라도 해 놨어야 하는데…….

놈들을 쥐 잡 듯 소탕하려 한 계획이 오히려 자신의 목을 조이는 덫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균열>을 고스란히 내주고 말았으니, 이제 <균열>이 닫혀 버리면 누군가가 뭘 알아내려야 알아낼 도리가 없다.

시신도, 증거도 모조리 사라져 버릴 테니까.

클리어된 <균열>만큼 증거를 인멸하기 좋은 곳은 없다.

그동안 <균열>을 그렇게 사용해 온 권기한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제기랄!”

권기한의 거친 손짓에 장안 지부장의 책상이 와장창 쓸려 나갔다.

안상혁이 안타깝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봤으나,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부장 안상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젠장!’

“죄, 죄송합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함을 느낀 안상혁은 미처 무음으로 해 두지 않은 자신을 몇 번이고 힐책하며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권기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런데 막 핸드폰을 끄려던 찰나.

언뜻 화면에 떠오른 문자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 와중에도 벨소리는 눈치도 없이 계속됐다.

어쩐지 오늘 아빠의 얼굴이 우울해 보이네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무슨 걱정 있나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 오늘 있었나요?

“빨리 안 꺼, 이 새끼야!”

“기, 길드장님…….”

권기한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보자, 안상혁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뭐야?”

안상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낚아채다시피 핸드폰을 빼앗은 권기한이 그것을 살폈다.

곧 그의 표정도 안상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뭐야?”

영혼이 빠져나가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기운을 잃은 권기한이 휘청대며 집무실 책상을 부여잡았다.

“기, 길드장님!”

“놔… 놔 봐.”

권기한은 다시 한번 두 눈을 부릅뜨고 핸드폰 메시지를 살폈다.

그를 휘청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인터넷 기사였다.

길드원 하나가 지부장에게 보고를 올린 문자에는 기사 링크가 여럿 달려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같이 참담했다.

『속보입니다. 평소 훌륭한 인품과 멋진 팬서비스로 명성을 모아 온 이한 길드에 대한 폭로가 이어져 파장이 예상됩니다. 현재 SNS상에는 권 길드장의 것이라 추정되는 녹취록이 떠돌고 있는데요.』

『단독 공개! 이한 길드 만행 추가 폭로!』

『권기한, 아이들로 장사했나? 입양 간다던 아이들은 어디로?』

『빨래방으로 전환한 이한 길드? 불법 자금 세탁 경위 포착!』

“대, 대체 어떤 새끼들이…….”

핸드폰을 쥔 권기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상혁이 불안하게 그를 지켜보던 찰나.

콰직!

아니나 다를까, 화를 견디지 못한 권기한이 안상혁의 핸드폰을 집어 던져 버렸다.

씩씩대는 그의 숨소리가 얼어붙은 집무실 공기마저 데울 정도였다.

“이 개새끼들! 내가 그동안 먹인 돈이 얼마인데! 당장 MBS 쪽 사무장한테 연락해! 오보라고, 정정 보도하라고! 그리고 이 경무관한테도……!”

“그, 그걸로 쉽게 막힐 것 같지…….”

“이 개새끼가!”

“컥!”

권기한이 냅다 지른 주먹에 안상혁의 늑골이 그대로 부러졌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가 신음을 흘렸으나, 권기한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코앞까지 들이민 그의 두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너도 지금 나 무시하냐?”

“저, 절대 아닙니다.”

“당장 연락해!”

“아, 알겠습니다!”

안상혁은 기괴한 움직임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망가진 핸드폰 대신 집무실 전화를 쓸 수도 있겠으나, 그는 권기한과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미친놈… 이젠 여기도 끝이다!’

안상혁은 권기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신형 벤틀리를 타고 장안 지부를 떠났다.

그러면서 평소 친분이 있던 몇몇 지부장에게 연락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연신 차에 달린 ‘카폰(Car―Phone)’을 조작했다.

“권기한 새끼 드디어 미쳤어! 어딘가 계속 께름칙하다 싶더니만… 불러도 절대 오지 마! 오면 죽는다! 개죽음이야! 이한이고 나발이고, 다 쫑났다고! 가진 거 있으면 그거 가지고 가족이랑 다 튀어! 뭐?! 야, 인마! 해외든 태평양이든 균열 안이든, 거기가 어디가 됐든 튀라고! 한국은 절대 안 돼! 이한은 끝났어!”

그리고 얼마 뒤.

안상혁이 떠난 자리에 정장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우두커니 장안 지부를 올려다보는 그는 다름 아닌 박도진이었다.

차갑다 못해 냉기가 도는 그의 눈은 한겨울 칼바람보다 매서웠다.

맹견(猛犬).

곧 그가 건물 안으로 향했다.

* * *

“권기한 씨는 아직입니까?”

“안에 계신 거 아닙니까? 권기한 씨! 미지일보 이민석입니다! 여쭐 것이 있습니다!”

“익명의 제보가 사실입니까?! 정말로 아이들을 두고 실험과 거래가 있었나요?”

이한 길드의 수원 본부는 이미 밀려든 기자와 누리꾼들로 시끄러웠다.

남은 직원들이 간신히 입구에서 기자들을 막아 내고 있으나, 깨진 유리창 등을 봤을 때 이미 대부분은 도망친 게 분명했다.

‘곤란하군.’

멀찍이 선 강우는 직원과 실랑이 중인 기자들을 보며 난색을 보였다.

권기한이 부재한 틈을 타 집무실을 살필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기자들의 반응이 빨랐기 때문이다.

‘이것도 다 검계의 작전인가?’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결국 입구로 들어가길 포기한 강우는 빌딩 뒤로 향했다.

분명 황 노인이라면 언론에 이한의 만행을 폭로하기 전에 필요한 증거는 모두 수집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계가 수집한 건 수집한 거고, 강우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를 원했다.

놈의 집무실에 검계가 찾지 못한, 쓸 만한 정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꼭 놈들의 비리가 아니더라도 국내 6위 길드쯤이면 제법 유용한 정보를 갖고 있을 터였다.

<균열> 내 정보라든가, 타 길드 정보라든가…….

그리고 강우가 이한 길드의 일에 관여한 건 비단 청익 때문만은 아니었다.

놈들이 아이들을 강제로 각성시키고 매매까지 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린 각성자가 귀하다 해도 그런 거래는 위험부담이 크다.’

지금은 비록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성인이 되는 날이 올 터였다.

훗날 그 아이들이 복수를 벌일 건 자명한 일.

그런데도 아이들을 데려갔다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거나 확실한 통제 수단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한 일을 할 이는…….

‘호공.’

강우는 어쩐지 이번 일에 호공이 관련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놈은 필요하다면 그런 짓도 서슴없이 벌일 수 있는 놈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놈은 마물들을 사육하고, 그 새끼들로 실험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국제적 비난을 받으며 중단하긴 했으나, 그만큼 놈은 일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윽고 빌딩 뒤편에 도착한 강우는 주변을 살핀 뒤, 검은 천으로 감싼 <피바라기>를 이용해 빌딩을 오르기 시작했다.

콰직!

<피바라기>를 박아 넣고, 벽을 박차 위로 점프한다.

그리고 다시 <피바라기>를 박아 그것을 반복한다.

‘이런 등반은 설벽 이후로 오랜만이군.’

이한 길드의 빌딩은 보안상 뒤편에 3층까지 유리창이 없었다.

덕분에 건물 뒤를 신경 쓰는 이는 전무.

강우는 4층까지 암벽을 등반하듯 오른 뒤, 유유히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강우는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최상층인 7층으로 향했다.

7층에 자리한 건 큼지막한 비서실과 실내 골프장, 그리고 권기한의 집무실뿐인데, 다들 도망간 탓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운이 좋군.’

집무실 앞으로 마력 인식기가 존재했지만, 당연히 그걸 이용할 일은 없었다.

강우는 마력을 맺힌 주먹으로 문을 부숴 버렸다.

콰직!

삐이이이이―!

문이 부서지며 비상음이 울렸으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이곳으로 달려오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안심한 강우가 막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마력을 차단하던 문이 사라지자 안쪽에서 새로운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누군가가 강우보다 먼저 집무실에 들어서 있었다.

‘검계인가?’

강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집무실에 막 한 발짝을 들이던 그때.

언뜻 왼편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강우가 몸을 트는 것과 동시에 생전 처음 보는 괴한이 눈에 띄었다.

팟!

근육으로 꽉 끼는 정장을 입은 괴한이 그를 향해 양팔을 벌리며 달려왔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다짜고짜 달려든 괴한이 강우를 끌어안고 구르려 했으나, 강우는 재빠르게 한 발을 뒤로 빼며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괴한의 얼굴을 그대로 밀쳐 버렸다.

콰당!

괴한의 덩치는 강우보다 곱절은 더 컸지만, 고작 강우의 한 손에 밀려 허무하게 뒤로 자빠졌다.

그렇게 강우가 상대의 목에 <피바라기>를 가져다 대던 찰나.

“머, 멈춰요!”

골리앗 같은 괴한의 뒤로 한 여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저 여자는…….’

골리앗과 달리 여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강우는 잠시 그대로 멈춰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검은 헌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