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박도진 (1)
잠시 적막이 흘렀다.
강우가 박도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본 권기한도, 검계 단원들과 이한 길드원도.
모두가 시간이 멈춘 듯 우두커니 두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박도진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거였습니까? 당신이 내게 약속을 받아 낸 이유가?”
강우에게서 대답이 없자, 박도진이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다시 말했다.
“다… 알고 있었군요.”
그의 입술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마치 입에서 흐르는 피눈물처럼 보였다.
“맹견!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놈과 아는 사이야?!”
권기한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박도진은 꿈쩍도 하지 않고 강우만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대답을 기다리듯이.
비로소 강우의 입이 열렸다.
“변하는 건 없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박도진의 머릿속을 울렸다.
“넌 네 할 일을 해라. 사사로운 감정이 너와 네 딸을 구원하진 못할 테니.”
박도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애초에 피를 줄 생각이 없었다는 겁니까?”
“우습군. 그저 서로 할 일을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그런 걱정을 하다니.”
강우는 <피바라기>를 들었다.
오늘 밤 자신이 죽을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일도 없을 테지.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박도진은 계속 머뭇거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한 듯했다.
“계속 멍하니 있겠다면…….”
콰득!
삽시간에 뻗어 나간 강우의 <피바라기>가 박도진의 변형된 팔을 때렸다.
그가 크게 뒤로 밀려나는 사이, 예상대로 페스카즈에서 검은 불길이 일어났다.
‘과연.’
미노타우르스 때처럼 마력이 훨씬 자연스럽게 운용되기 시작했다.
강한 상대를 맞이한 몸이 반사적으로 각성(覺醒)한 것이다.
“…….”
비로소 강우를 마주한 박도진의 눈빛도 변했다.
처음 공허하던 것과 달리 무언가가 들어선 눈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당신의 진짜 얼굴입니까?”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그에게는 강우의 진짜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박도진이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포클레인이라 불러도 좋을 초대형 팔이 강우를 덮쳤다.
콰과과과과―!
강우는 재빨리 뒤로 점프를 뛰어 그것을 피했다.
그러고는 <피바라기>를 역수로 쥐며 박도진을 향해 내달렸다.
박도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이를 악문 표정으로 사납게 달려왔다.
정면승부였다.
콰광! 쾅! 쾅!
검은 불길이 인 <피바라기>와 박도진의 변형된 팔이 수차례 부딪치며 무지막지한 소리를 자아냈다.
몇몇은 숨죽이고 그 격돌을 지켜봤으며, 몇몇은 터져 나오는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뭘 뜸 들이는 거야, 이 새끼들아! 다 죽여!”
오직 권기한만이 또렷한 정신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그는 이미 맹견과 비등한 존재가 있다는 것에 경악한 상태였다.
결국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드디어 권기한이 일선에 나섰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그가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생포는 그만둔다. 모조리 사지를 찢어 죽인다.”
한국 6위 길드의 수장이 마력을 내비치자, 그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권기한은 마치 날개라도 날린 듯 쏜살같이 달려 나가더니, C를 부축하던 E에게 검을 휘둘렀다.
“큭!”
권기한의 공격에 남자는 안고 있던 C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어느새 그가 들고 있던 검은 권기한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딪친 모양 그대로 녹아내렸다.
“모조리 죽여라.”
“전부 숨통을 끊어!”
비로소 정신을 차린 이한 길드원들도 허겁지겁 단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였다.
“저, 적입니다!”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돌연 밖에서 대기하던 검계원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척살(刺殺)!”
“존명!”
“끄아아악!”
1차 각성자부터 2차 각성자까지.
이백여 명에 이르는 단원들이 <균열> 입구에서부터 이한 길드원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아직 시신을 확인하지 못 했는데?’
강우는 그들의 이른 진입이 의아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지, 이놈들아!”
선봉에 선 건 청익이었다.
그의 청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상대가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나갔다.
그 옆에서 열심히 단검을 휘두르는 유아라도 보였다.
뒤늦게 D의 외침이 귀에 달린 통신기로 전해졌다.
[시신 확인했다! 청익님이 아니야! 둘 다 인형이다!]
[청익 님 여깄으시다!]
[…청익 님?!]
다행히 둘은 무사했던 모양이다.
본대의 합류로 <균열> 안은 난장으로 변했다.
“이 버러지 새끼들이… 나를 따라라!”
분노로 일그러진 권기한이 청익을 향해 마주 달리는 사이, 강우와 박도진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생채기가 난 강우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강우의 마력을 고스란히 다 받아 낸 박도진의 팔은 아까보다 더 기이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도진은 머뭇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강우가 죽을 경우를 걱정하는 듯했다.
박도진의 공격을 피한 강우가 말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론 아무것도 구해 내지 못한다.”
“…….”
박도진이 다시 입술을 깨물었을 때, 강우는 그 망설임의 찰나를 놓치지 않고 <피바라기>를 휘둘렀다.
스걱!
페스카즈가 박도진의 어깨를 찢고 지나갔다.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그가 크게 물러서는 가운데, 강우는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몸속의 마력이 요동치다 못해 끓어오르고 있었다.
‘3차 각성이 목전이다.’
확실했다.
그건 분명한 3차 각성이다.
마력이 세 번째 벽을 깨기 위해 아까부터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맹견! 나를 엄호해!”
저 멀리서 검계단원들을 견뎌 내지 못한 권기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흠칫한 박도진이 강우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그에게로 튀어 나갔다.
강우는 굳이 그 뒤를 쫓지 않았다.
그건 그저 그의 선택일 뿐이니까.
청익과 유아라도 무사하겠다, 딱히 그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콰과과과과―!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보랏빛 팔이 전장을 쓸고, 피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추풍낙엽처럼 자빠져 신음했다.
몇 번을 봐도 어마어마한 파괴력이다.
맹견이 아니라 파괴의 신 ‘시바’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잡아! 놓치면 안 된다!”
수많은 단원들이 그 둘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권기한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채찍처럼 갈라진 그의 검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갈 때마다 단원 서넛이 바닥을 굴렀다.
그사이, 권기한에게 도달한 박도진이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검계원들 머리 위를 껑충껑충 뛰어넘어 <균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용병과 이한 길드원들에겐 애초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기, 길드장님!”
“항복! 항복하겠다!”
뒤늦게 그들이 무기를 버리며 항복했으나, 황 노인은 평소 보던 양복점 주인이 아니었다.
노인의 표정은 차갑다 못해 싸늘했다.
“모두 참(斬)한다.”
“존명!”
잠시 뒤.
<균열>에 살아남은 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 *
“어떻게 된 겁니까?”
<균열> 내부가 모두 수습된 뒤.
D의 물음에 황 노인 대신 청익이 답했다.
“간신히 도망쳤지. 박도진 그놈, 엄청나게 세더라고.”
청익의 말은 이랬다.
이한 길드의 장안 지부를 찾아갔을 때, 그들은 함정에 빠졌다.
청익을 상대한 건 역시나 박도진.
그는 청익이 무력함을 느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였다.
그래서 청익은 굳이 그에게 맞서지 않았다.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친 것이다.
“얼마나 집요하게 따라오는지, 진짜 미친개 같았다니까.”
다행히 박도진은 지구력이 그리 좋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추격을 멈추었다고 했다.
“그 기이한 팔도 장시간 유지할 순 없는 모양이야.”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그의 마력을 느끼지 못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는 호공의 말처럼 ‘변이자’이고, 그중에서도 꽤 희귀한 케이스였다.
‘신체 변형이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마력이 신체 변형 시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그건 그가 흑혈병을 앓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수명을 깎아 먹고 있는 건 분명하군.’
“그런데 그런 놈을 상대하다니… 어떻게 된 거냐?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몇 차 각성자야? 2차 맞아?”
청익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어째서?”
“글쎄.”
박도진이 전력을 다했다면, 강우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우와의 거래 때문인지 그러지 않았다.
혹시라도 치료제를 받지 못할까 걱정했겠지.
청익이 고개를 갸웃대는 사이, 상념을 마친 강우가 황 노인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잡아야지. 아직 이한은 끝난 게 아니네. 분명 다른 지부원들을 불러들일 테고, 그간 숨겨 둔 비장의 수까지 모조리 끄집어낼 거야. 우린 그때를 여유롭게 기다리면 되네. 어차피 대부분의 정예는 오늘 잃었을 테니,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
“…박도진은 일부러 보내 준 겁니까?”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쓸데없는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역시.
검계단원이 백 넘게 모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박도진과 권기한을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도진을 상대하며 큰 피해를 입었겠지.
황 노인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주요 전력을 잃은 권기한은 이제 조무래기에 불과했으니까.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청익을 비롯한 정예 몇이 가면 충분히 처리가 가능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박도진 뿐.
강우가 말했다.
“권기한이 죽으면 박도진은 더 이상 검계를 적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박도진이 권기한을 따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딸 박수영의 치료.
하지만 이제 강우라는 대안이 등장했으니, 굳이 권기한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그간의 예의 차원에서라면 몰라도.
오늘의 구출도 그런 이유에서였겠지.
“죽일 겁니까?”
“검계와 검을 마주하고 살아남은 예는 없네.”
“글쎄요. 단원 중에 분명 그런 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강우의 말에 황 노인은 잠시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그 뜻을 깨닫곤 말했다.
“왕린 때의 일을 말하는 거로군. 그건 경우가 다르네. 그땐 테스트에 불과했으니.”
“박도진이라고 그러지 말하는 법은 없겠군요.”
“…….”
황 노인이 예리해진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능하겠는가?”
“박도진이 검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군이 되는 건 가능합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건 누구의 아군이지?”
설마 박도진이 자신의 수하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잠시 뜸 들이던 강우가 답했다.
“검계의 아군이겠죠. 현재 전 검계 소속이니까요.”
“…그렇군.”
황 노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고생했네. 보수는 한수가 연락할 걸세.”
그 길로 강우는 몸을 돌려 <균열> 밖으로 향했다.
이제 이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 가지 확인해야 할 일도 생겼다.
“저…….”
언뜻 유아라가 말을 걸 듯 머뭇대는 걸 확인했으나, 강우는 굳이 반응하진 않았다.
강우가 나간 뒤.
발만 동동 구르던 유아라가 황급히 그를 따라나섰다.
* * *
“이게 무슨 개 같은…….”
조수석에 탄 권기한이 이를 부드득 갈며 상처 난 팔을 점검했다.
검계는 보란 듯이 권기한의 차만 따로 빼 두었다.
친절하게도 ‘이거 타고 도망가’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 점이 권기한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패배할 걸 애초에 알고 있었단 말인가.
뒤늦게 아까의 기억이 떠오른 권기한이 으르렁대며 말했다.
“맹견, 분명하게 설명해. 그놈들이랑 아는 사이였냐?”
하지만 박도진은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주인이 묻잖아, 이 개새끼야!”
쨍그랑!
분을 못 이긴 권기한이 수십억을 호가하는 세단의 창을 부쉈다.
그러나 박도진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대신 그는 핸들을 꺾어 길가에 차를 댔다.
도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를 앞둔 상태였다.
“뭐야?!”
권기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박도진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건들지 않겠다고 했잖습니까.”
“뭐?”
박도진이 굳힌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엔 작은 울분마저 담겨있었다.
“최소한 아이들 일에는 관여하지 않게 해준다고, 그때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
권기한이 기가 찬 듯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 이 새끼야! 다 그런 돈으로 네 딸년 살린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웬 선비 행세야?!”
박도진은 그런 그를 잠시간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뭘 그만해, 새끼야!”
하지만 박도진은 아랑곳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오늘 목숨을 구해 드렸으니, 그 값은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뭐? 박도진, 이 새끼야! 내가 그동안 너한테 퍼부은 돈이 얼만데!”
“그간…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박도진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도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야! 박도진!”
권기한이 아무리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도 박도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에 홀로 남겨진 권기한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 새끼가 감히 날 배신해?”
그러고 보니 청익과 유아라, 두 연놈도 분명 살아있었다.
마력에 갈려 시신도 남지 않았다고 하더니…….
설마 그때부터 이미 자신을 배신한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권기한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감히 날 물로 봐?”
이럴 순 없다.
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국내 6위 길드에까지 오른 이한의 길드장이란 말이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한동안 이를 갈던 권기한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곧 수하가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직접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는 수하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당장 박도진 그 아비 놈 숨통을 끊어! 아주 사지를 다 잘라 놓으란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던진 권기한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감히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지.”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액셀을 밟았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