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변이자 (5)
권기한의 등장을 시작으로 이한 길드원들이 갈대숲에서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우도, 단원들도 이미 일찍이 마력으로 감지하고 있던 놈들이었다.
그중에는 권기한을 제외하고도 3차 각성자가 무려 넷이나 끼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뒤따라온 1차 각성자들까지 합하면 무려 150명에 육박하는 숫자.
강우는 D 쪽을 슬쩍 살피며 <피바라기>를 고쳐 쥐었다.
D를 상대하는 쪽에도 3차 각성자가 있었다.
‘이한이 이 정도 세력은 안 될 텐데… 용병을 고용했군.’
한국에서 불법적인 일을 행하는 건 검계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대표적일 뿐, 어디에나 어둠의 세력은 있기 마련.
저들 역시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하는 청부업자일 확률이 높았다.
‘이들 중에 청익을 상대한 자가 있는 건가?’
정말로 저 나무에 매달린 게 청익과 유아라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놈들 중에 청익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용을 보인 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권기한이 물었다.
“모두 얼굴에 뭔 짓을 해 놨군. 환술인가? 네놈들은 누구지? 뭐 하는 놈들인데 다짜고짜 공격한 거냐고. 팔달산에서 권기훈과 권기석을 죽인 것도 네놈들 짓이지? 설마… 송학이냐?”
역시나 3차 각성자인 권기한은 왕린의 환술을 단숨에 알아챘다.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자 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쉽게 떠들면 이렇게 준비한 공로가 아쉽겠지. 한두 놈만 살려 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라. 얼굴 가죽을 벗겨 그 잘난 면상을 직접 확인해 주지.”
권기한의 명령에 대기하던 이한 길드원과 용병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 단원 A가 말했다.
“일단은 저 시신이 청익이 맞는지부터 확인한다. 그때까진 아무도 동요하지 마. 마음을 가라앉혀.”
“하지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A의 냉정한 말투에 단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이곳의 리더 격인 듯싶었다.
“B는 D를 도와 시신을 확인해. 나머지는 이 새끼들부터 족치고. 어차피 우리는 시간만 끌면 된다는 걸 잊지 마.”
“…알겠다.”
그녀의 지시에 단원들이 마지못해 대답하는 사이,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쳐라!”
전투는 지체 없이 시작됐다.
수십의 각성자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B가 작전대로 공터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강우와 A를 비롯한 나머지 단원들은 달려오는 적들을 마주하며 튀어 나갔다.
“고작 넷이서 뭘 해 보겠다고 설치는 꼴이라니!”
처음 마주한 적은 이마에 붉은 두건을 두른 놈이었다.
강우는 찔러 오는 놈의 창을 피한 뒤, 그대로 목을 그어 버렸다.
“크학!”
그러고는 이어서 접근해 오는 다른 각성자 둘을 <피바라기>로 찔렀다.
푹! 푹!
<균열> 내부인 만큼 손속에 사정은 없었다.
단숨에 목이 꿰뚫린 놈들이 피 분수를 뿜는 사이, 강우는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미노타우르스의 힘을 머금은 페스카즈가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놈들의 살과 뼈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저, 저 새끼다! 저 페스카즈를 쥔 놈이 김 실장님의 원수다!”
그때, 강우를 알아본 몇몇이 고함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분노가 힘의 격차를 줄여 주는 건 아니었다.
“컥!”
강우의 <피바라기>에 허벅지를 찔린 남자가 바닥을 구르고, 이어서 한 사내가 목을 움켜쥐며 피를 토했다.
황금빛 페스카즈가 달빛을 발할 때마다 어김없이 길드원 하나가 쓰러졌다.
마치 달이 그들을 단죄하는 듯한 광경.
“미친!”
“대, 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
그들의 눈에 강우는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선 장승처럼 보였다.
도무지 쓰러질 줄 모르는 장승 말이다.
달의 가호를 받는 천하대장군이 그들의 눈앞에 검을 들고 우뚝 서 있었다.
주변으로 삽시간에 다섯 구의 시체가 쌓였으나, 강우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아 보였다.
털썩.
마침내 마지막 상대의 몸에서 <피바라기>를 뽑아내자, 이미 심장이 멎은 남자의 몸이 지푸라기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강우는 참고 있던 숨을 깊게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눈빛에 몸을 떨지 않는 자,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눈에 두려움이 물씬했다.
“…….”
하지만 강우의 시선은 그들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기다리는 건 다른 존재였으니까.
언뜻 보니,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뚫은 B와 D가 거목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강우의 안광이 번뜩였다.
콰득!
삽시간에 떨어진 쇳덩이가 발밑을 때리고, 재빨리 물러선 강우가 눈앞의 상대를 노려봤다.
흉물스러운 철퇴를 든 3차 각성자였다.
강우가 <피바라기>에 마력을 두르는 동안 놈이 철퇴를 어깨에 걸치며 물었다.
“냄새가 나. 너희도 암살 용병이지? 어디냐? 흑풍? 소진? 그것도 아니면… 검계?”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놈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 한쪽 정도는 뭉개 놔야 입을 열려나?”
씨익 웃는다 싶던 찰나, 놈의 신형이 흔들리며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순식간에 발에 마력을 집중한 걸 보니, 마력 운용이 제법 뛰어난 놈이었다.
그러나 이미 숱한 각성자들을 상대해 본 강우의 눈엔 그저 ‘제법’인 수준.
강우는 철퇴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거리를 좁혔다.
“무, 무슨?!”
슥!
철퇴사내는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앞에서 번뜩이는 <피바라기>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단검이 그의 얼굴을 갈랐다.
털썩.
남자는 철퇴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놈도 아니군.’
강우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이 세상에는 마력을 다루는 데 급급할 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는 각성자가 드물었다.
마력에 너무 많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김 실장이 그랬고, 방금 죽인 이름 모를 이 남자도 그랬다.
‘하긴… 제대로된 3차 각성자도 드물던 시기지.’
아직은 다들 겉멋만 든 풋내기일 뿐.
상념을 마친 강우는 고개를 돌려 다음 상대를 찾았다.
하지만 조금 전 3차 각성자의 허무한 죽음을 확인한 뒤로는 그 누구도 강우에게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권기한의 두 눈도 어느새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그의 눈에 이한 길드원과 용병들 사이를 누비는 네 명의 단원이 가득 들어섰다.
스무 배가 넘는 숫자 차이에도 놈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의 승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절대 송학 따위가 아니야! 이런 놈들이 대체 어디서…….’
이번에 용병을 고용하는 데 들인 돈이 얼만데… 놈들을 잡기는커녕, 정말 몰살이라도 당할 듯한 분위기였다.
상대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3차 각성자마저 단숨에 처치할 실력인 줄 알았다면.
결코 이따위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열심히 준비한 게 제 무덤이라는 걸 알았다면 말이다.
‘김 실장 놈이 죽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해져 왔으나,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권기한이 허겁지겁 수하에게 물었다.
“매, 맹견! 맹견은 아직이야?!”
“여, 연락을 취했습니다!”
“여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개새끼가!”
혼란에 빠진 권기한의 눈이 광기로 번뜩이는 사이, 강우는 전장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깐 몰랐는데, 종종 붉은 두건을 목이나 손목에 두른 몇몇이 눈에 들어왔다.
‘흑풍, 소진도 아니라면, 놈들은 붉은 기수인 모양이군.’
붉은 기수 또한 한국에서 나름 유명한 용병 길드 중 하나였다.
물론, 검계의 전력에 비하면 1/4도 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이 자식 뭐야?!”
이한 길드원들 속에서 위용을 과시하던 단원 C가 갑작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강우가 기다리던 상대가 등장한 듯했다.
돌연 전장에 난입한, 정장 입은 남자.
“맹견!”
권기한이 환희에 차 그 이름을 부르는 사이, 그를 맞이한 단원 C가 자신의 무기인 세검을 찔렀다.
과연 검계의 정예다운 반응속도.
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은 그보다도 곱절은 더 빨랐다.
단번에 세검을 뿌리친 그가 왼손을 휘두르자, 대번에 커진 손이 C를 덮쳤다.
콰과과과과!
크게 쓸려 나간 바닥과 함께 뿌연 먼지구름이 일고, 이어서 쓰러진 C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바닥에서 터져 나온 진흙이 사방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저건…….’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남다른 신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강우는 땅으로 늘어뜨린 사내의 기형적인 보랏빛 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내의 몸보다도 더 크게 부풀어 오른 팔.
마치 최명식 때를 보는 듯했다.
‘청익과의 전투에서 골목을 쓸어버린 건 마물이 아니었군.’
그건 저 남자의 팔이던 것이다.
단원 C를 제압한 사내의 안광이 번뜩이나 싶던 찰나, 삽시간에 튀어 나간 그가 단원 A를 공격했다.
“크윽!”
홀로 이한 길드원 스물을 도륙 내던 그녀도 일격을 견뎌 내지 못하고 크게 물러섰다.
무려 3차 각성자인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근력.
어느새 할퀴어진 그녀의 어깻죽지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하기는 나머지 단원인 E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별말 없이 적을 상대하던 E는 쓰러진 C를 황급히 챙기며 A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권기한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잘했다, 맹견! 모조리 붙잡아 와라!”
놈의 웃음소리에 정체불명의 사내는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잠시 제 주인을 돌아본 그는 다시 강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그를 노려보던 강우와 시선이 닿았다.
‘……!’
마치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내가 바닥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수미터가 단번에 좁혀졌다.
캉!
<피바라기>와 남자의 비대해진 손이 부딪치며 쇠붙이 소리를 흘렸다.
변형된 남자의 손은 강철보다 묵직하고 단단했다.
‘괴물 같은 힘이군.’
힘에서 밀린 강우가 두 걸음 물러서는 사이, 사내는 계속해서 강우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캉! 캉! 캉!
사정없이 내려치는 남자의 손에서 검보랏빛 마력이 일렁이고, 강우의 온몸을 옥좨 왔다.
어찌나 강한지,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뼈가 저릴 지경.
‘빠르고 강하다.’
강우는 상대의 공격을 흘리며 침착하게 대응해 나갔다.
하지만 섣불리 공격하진 못했다.
상대가 확실히 현재의 자신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일전과 같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듯했다.
같은 3차 각성자를 간단히 제압해 버리는 존재.
진짜배기 3차 각성자다.
그런 남자는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한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외딴곳에 자리해 아무도 찾지 않는, 마치 호수와 같은 눈이라고 해야할까.
그 안에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게 진짜 모습이었군.’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 눈이 마주치나 싶은 찰나, 사내가 갑자기 멈칫했다.
뒤늦게 그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상대에게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기회를 잡은 강우가 <피바라기>를 찌르자, 사내는 황급히 고개를 틀며 거리를 벌렸다.
공허하던 눈이 처음으로 생기를 되찾으며 작게 흔들렸다.
그의 두 눈이 빠르게 강우를 훑고, 곧 시선이 <피바라기>에 닿았다.
“……!”
순간, 남자의 신형이 크게 움찔했다.
그는 즉각 알 수 있었다.
저건 자신이 수십 번도 더 살펴본 그 남자의 검이라고.
아버지를 구한 검이자, 소중한 딸을 구해 준 자의 검.
처음으로 남자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뭐 하는 거냐, 맹견! 지체 말고 처리해! 팔다리쯤 잘라도 좋다!”
뒤편에서 권기한이 고함을 질렀으나, 남자는 도통 움직일 줄 몰랐다.
그가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강우는 천천히 다가갔다.
마주 본 남자의 눈이 맹수를 마주한 토끼처럼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다.
뒤늦게 그가 입을 열었다.
“최한…석 씨?”
강우도 그 눈빛을 마주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박도진.”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