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변이자 (4)
이한의 함정이라 예상되는 <균열>은 수원과 인접한 의왕시에 있었다.
의왕 IC 한가운데 나타난 거대한 홀.
덕분에 고속도로가 통제돼 그 주변에 남은 건 온통 이한 길드원뿐이었다.
무언가를 숨기거나 감추기 딱 좋은 장소다.
굳이 레이드 시간을 밤으로 잡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균열 안은 정리가 끝났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권기한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입 준비해.”
“알겠습니다.”
며칠 전, 김 실장이 죽은 후로 권기한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평소 무능력한 놈이라 욕했어도, 그는 엄연한 이한의 2인자이자 권기한의 수족 같은 존재.
그런 수하가 죽었으니 권기한이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설프긴 해도 놈도 3차 각성에 발을 들였는데… 그런데도 제대로 겨루지도 못하고 죽었다. 분명히 뭐가 있어. 최한석, 그 새끼가 함정이었을 줄이야…….’
김 실장의 수하들은 그가 독에 당했다고 했다.
3차 각성자는 이미 인간의 신체를 초월한 존재.
그런 각성자를 단번에 죽을 수 있는 독이라면, 그건 <균열>에서 발견한 특수한 독일 확률이 높았다.
‘균열 내 독을 사용하는 집단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어. 균열에서 독을 뽑아내 사용할 정도라면… 여간내기들이 아니야. 어쩌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놈들일지도.’
아직 <균열>은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게 더 많은 미지의 장소.
덕분에 <균열>의 정보는 곧 힘으로 이어졌고, 많은 비밀을 가진 길드일수록 더 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밀을 감추는 데에도 힘이 필요했으니까.
‘설마 상위 길드 놈들의 장난질은 아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위기감이 엄습했다.
아직 놈들의 정체도,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벌어졌고,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그에겐 가장 강력한 패가 남아 있다는 것.
[맹견, 도착했습니다.]
“대기하라고 해. 놈들이 도착하면 뒤를 잡고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마침 그 패가 도착했다.
권기한은 그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혀 있던 체증이 내려간 듯 잠시나마 편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직 스코어는 일대일이지.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들이라도 맹견을 상대할 순 없을 거다.’
맹견(猛犬).
그 이름답게 놈은 권기한이 아는 인간 중 제일 강한 존재였다.
비록 세상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현재 한국 최강이라는 이승우에 비견될 만한 남자.
이미 숱하게 그 실력을 확인했으니, 의심의 여지는 없다.
항구에서 홀로 수십의 각성자를 작살 낸 그 골칫덩어리마저 잡아낸 놈이 아니던가.
‘놈을 만난 건 정말 천운이지.’
비록 놈은 길들여지지 않았으나, 주인을 물 수 있는 놈도 아니었다.
가진 힘에 비해 바보 같은 구석이 많은 놈.
권기한은 비로소 불안감을 떨쳐 냈다.
‘와라, 쥐새끼들아.’
그는 이미 정리가 끝난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 * *
검은 세단 두 대가 의왕 IC를 향해 달렸다.
이번에 검계가 파견한 인원은 강우를 포함해 모두 여섯.
길드 하나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치고는 적은 숫자이지만, 그만큼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도 만만치 않았다.
차에는 각각 세 사람씩 타 있는데, 강우의 자리는 두 번째 세단의 뒷좌석이었다.
“…….”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세 사람은 차 안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색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강우는 오히려 그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모두가 검계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 쓸데없는 통성명으로 피로를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강우는 지나가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 내 평생을 세상에 헌신하며 살겠네! 그렇게 해도 다 갚지 못하겠지만, 절대, 절대로 잊지 않겠네!
이 차에 오르기 전, 강우는 박광석의 전화를 받았다.
손녀가 근 1년 반 만에 바깥 땅을 밟았다며, 그는 강우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찌나 기뻐하는지, 그 담담한 강우마저 마음이 동할 정도였다.
‘그렇게나 좋을까.’
박광석이 보낸 사진에는 병실이 아닌 놀이터 미끄럼틀에 앉아 손가락 V를 해 보이는 박수영이 있었다.
강우가 잠시 그 둘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이, 이윽고 검은 세단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덩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많이도 모였군.”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 버린 그의 이름은 ‘D’였다.
파견된 단원들은 서로를 알파벳으로 불렀다.
강우는 제일 마지막인 F.
“…….”
강우가 차에서 내리자, 앞선 세단에서도 세 사람이 내려 있었다.
D의 말대로 이미 <균열> 앞은 이한 길드원들로 득실대는 상태였다.
하지만 느껴지는 마력으로 봐선 대부분이 1차 각성자 수준.
어느새 시가를 입에 문 D가 중얼거렸다.
“진짜 전력은 균열 안에 있는 모양인데. 단단히 준비했나 봐?”
말과 달리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내 강우를 포함한 여섯 단원은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위는 조용하다 못 해 고요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헬리콥터의 날갯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질 뿐.
그 위에서 비추는 밝은 원형의 빛이 마치 저격수처럼 그들을 쫓았다.
강우가 주변 기운을 살폈으나, 느껴지는 건 없었다.
‘유아라와 청익은 안에 있는 건가?’
만약 정말로 붙잡혔다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 여섯? 미친놈들이군.”
그런데 <균열> 앞에 다다랐을 때, 이한 길드원 하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든 나대는 놈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단검을 든 놈은 강우와 단원들을 보며 조소하더니, 이내 겁도 없이 얼굴을 내밀어 단원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종종 쥐고 있던 검으로 가슴이나 배를 쿡쿡 찌르며 위협하기도 했다.
“…….”
몇몇 단원의 미간이 꿈틀댔으나 단지 그뿐.
그들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하룻강아지의 도발이기도 하고, 별동대인 그들의 임무는 청익의 생사와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권기한을 생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권기한을 만나기 전까진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아니었다.
그는 굳이 상대의 도발을 참지 않았다.
우지끈!
“끄아아악!”
놈이 강우의 가슴을 단검으로 겨누던 순간, 강우는 그대로 그 손목을 비틀어 버렸다.
“혀, 형우야!”
“이 새끼가!”
놈이 손목을 감싸 쥐고 자지러지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사이, 그 동료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곧 강우의 싸늘한 눈빛이 닿자, 그들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메두사의 눈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꺼져라.”
“……!”
그 묵직한 목소리가 일종의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이내 기세에 눌린 놈들이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D가 작게 웃었다.
“화끈한데 그래?”
“…….”
강우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홀로 <균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단원들이 서로를 황당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쟤 누구야?”
“난들 아나. 언뜻 신입이라는 것 같던데.”
“…불도저 같은 놈이 들어왔네.”
“난 쟤 마음에 든다. 불도저 F. 멋있잖아?”
“근데 넌 누구냐?”
“…….”
곧 그들도 강우의 뒤를 따라 하나둘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 * *
밤이었다.
무수한 별이 수 놓인 밤하늘 아래, 살가운 갈대숲이 펼쳐져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란 호수가 보였다.
피를 보기에는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강우가 청익과 유아라의 기운을 쫓는 사이, 뒤이어 다섯 명의 단원이 들어왔다.
여자라 추정되는 단원 A가 짧은 감상평을 내뱉었다.
“멋진데? 별장 삼으면 딱 맞겠다.”
“별장이 아니라 무덤이겠지.”
그들을 뒤따라 밖에서 대기하던 이한 길드원들도 <균열>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놈들 중 하나의 대꾸에 A가 입술을 삐죽였다.
“낭만 없는 놈들이네.”
“걸어라.”
놈들은 강우와 단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종용했다.
딱히 별다른 수는 없기에, 그들은 천천히 갈대숲을 걸었다.
주변을 살피던 C가 단원들을 향해 속삭였다.
“아직 균열 내 마력이 강해. 보스는 아직 살아 있다.”
“우릴 가둘 생각은 아닌 모양이군. 청익 님은? 마력이 느껴져?”
“아니. 아직은 느껴지는 게 없어.”
강우도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계속해서 청익과 유아라를 찾았으나, 둘의 기운은 통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이곳에 없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마력을 감추는 특수한 마법을 걸어 놨거나.
그렇게 그들은 약 10분여를 계속 걷기만 했다.
결국 덩치 D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성화를 냈다.
“언제까지 끌고 갈 거냐, 이 소갈머리 자식들아! 한바탕 붙든지, 함정을 팠으면 포위를 해서 달려들든지 해! 더 이상은 못 간다!”
강우도 발걸음을 멈춘 지 오래였다.
놈들의 작전이 무엇이든, 자신들의 도주를 걱정하는 거라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돼.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갈 길이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이한 길드원 중 하나가 자신 있게 검계 단원들을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결국 D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게 놈들의 심리전일 터였다.
“뭔가 많이 준비한 모양인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원들은 놈들이 보여 주고자 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걸음을 멈춘 이한 길드원이 갈대숲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얼굴에 조소가 만연했다.
“여기다.”
놈은 그 한마디만 남긴 채 뒤편에 있는 동료들에게로 가 버렸다.
단원들이 서로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참지 못한 D가 가장 먼저 갈대숲을 헤쳐 나갔다.
“이 자식들, 별것도 아닌 걸로 시간 보낸 거면…….”
그런데 씩씩대며 걸어 나가던 D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
강우의 눈에 미세하게 떨리는 D의 등이 들어왔다.
저 덩치를 꼼짝 못 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강우는 앞으로 걸어가 D의 옆에 섰다.
갈대숲 끝에 펼쳐진 건, 수만 제곱미터에 달할 만큼 넓은 공터였다.
그리고 그 공터 한가운데 자리한 아름드리나무.
장정 열 명이 끌어안아도 다 못 안을 그 엄청난 크기의 거목은, 누군가가 잎사귀를 다 떨구기라도 했는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
하지만 그 거대한 나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가지 끝에 걸린 검은 그림자.
그것은 두 개의 인형(人形)이었다.
나무에 목이 매달린 두 남녀가 바람이 불 때마다 을씨년스럽게 대롱거렸다.
“처, 청익 님?”
어느새 다가온 A가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대는 사이, 멍하니 있던 D가 돌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의 비명 같은 고함이 온 갈대숲으로 울려 퍼졌다.
“청익님―!”
말릴 새도 없었다.
단숨에 수십 미터를 쏘아져 나간 D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나 그를 포위했다.
공터 밑에 참호라도 마련해 둔 모양이다.
그때, 갈대숲에서도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짜로 들어올 줄이야. 예상보다 더 쓸개 빠진 놈들이었군.”
그건 검계원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남자였다.
D가 십여 명의 적에 고전하는 가운데, 어느새 걸어 나온 권기한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환영한다, 네놈들의 형장(刑場)에 온 걸.”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