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변이자 (1)
“대체 어떤 자식들이야!”
쨍그랑!
권기한이 냅다 집어 던진 술잔이 깨지자, 보고를 마친 수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길드장의 분노가 더 커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말을 이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워낙 신출귀몰한데다가 어제 잡은 감시책은 자기가 누구와 일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철저히 신분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권기한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평소 매스컴을 통해 보이던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먹잇감을 눈앞에서 빼앗긴 맹수의 눈빛이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결국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죄송?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퍽!
끝내 분을 참지 못한 권기한이 수하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남자는 날아가다시피 해 벽에 부딪쳤지만, 이내 서둘러 달려와 다시 길드장의 앞에 섰다.
권기한은 씩씩대며 생각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 감히…….’
며칠 전부터 정체불명의 세력이 이한을 공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균열> 레이드를 방해하는 정도에 그치더니, 이제는 수원 일대의 <균열>을 모조리 사재기해 헐값에 다른 길드에 파는 식으로 레이드를 막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자금줄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다.’
레이드를 치르지 못하는 길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뿐만 아니라 놈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길드의 자금줄도 막기 시작했다.
불법적으로 유령회사나 대부 업체를 통해 돈세탁을 벌이던 사업장이 세상에 까발려졌고, 인신매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사업장이 공격받았으며, <균열>에서 발견된 마약을 밀수해 유통하려던 신사업도 철저히 무너졌다.
갑자기 웬 놈이 항구에 나타나 마약을 모조리 강탈해 간 것이다.
경비를 맡은 각성자들은 그 한 놈에 의해 죄다 반불구가 되어 버렸다.
마약을 도둑맞은 걸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권기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태울 뿐이었다.
‘항구에 있던 각성자가 서른이 넘었을 텐데……. 그렇다면 놈은 분명 3차 각성자다. 그런 놈이 대체 어디서 나타났지? 설마 송학과 카반에서?’
그 괴한의 정체는 청익이지만, 권기한이 그걸 알 도리는 없었다.
그의 의심은 자연스럽게 현재 경쟁 중인 두 길드로 향했다.
‘놈들한테 그럴 여력은 없을 텐데…….’
각성자와 <균열> 확보에 급급한 두 길드장이 그 귀한 3차 각성자를 빼내면서까지 자신을 방해할까 싶었다.
그 정도 전력이면 차라리 레이드를 몇 번 더 뛰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
‘제기랄, 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한참을 고민에 잠겨 이를 갈던 권기한이 다시 물었다.
“저번에 말한 두 연놈은 어떻게 됐어?”
“유아라는 얼마 전 장안 지부를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돼 현재 추적 중입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년이 갑자기 왜 우리 지부를 감시해?”
“아무래도 뭔가 캐내려던 것 같습니다. 아직 밝혀진 건 아니지만, 길드를 공격한 자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하…….”
권기한은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설마 인천항 밀수를 방해한 게 유아라일까?
만약 그 여자가 3차 각성자라면 이야기가 얼추 딱 맞아떨어졌다.
팔달산에서 동생이 죽은 것도, 홀로 각성자 수십을 불구로 만든 것도.
“강우석이란 놈은?”
“그놈도 찾아냈습니다. 진짜 이름은 한강우고, 몇 주 전까지 연신내의 한 빌라에 세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딴 남자가 한강우의 명의로 살고 있습니다.”
“딴 놈? 그게 누군데?”
“최한석이라는 자입니다. 얼마 전, 붉은 오크 숲에서 한 중년을 구한 영상으로 화제가 된 각성자입니다.”
“…모델로 쓰려고 한 그놈 말이야?”
“그렇습니다.”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권기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최한석은 요즘 각 길드들이 자사 광고 모델로 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놈이었다.
그래서 이한도 놈을 찾고 있었는데…….
“그 자식이 왜 거기서 나와?”
“…현재 파악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또 한 번 ‘뭐 하는 중입니다’ 이런 대답이 나오면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권기한은 잔뜩 기가 죽은 수하를 못마땅하게 보며 말했다.
“당장 그 최한석이란 놈부터 잡아와. 한강우란 이름으로 살고 있으면 관련이 있겠지. 김 실장아, 네 짬밥이 몇 년인데 이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해? 지금이 얼마나 바쁜 시기인데,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그리고 맹견, 그 새끼는 부른 지가 언젠데 아직 연락도 없어?”
“며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득.
분노로 권기한의 이가 갈렸다.
“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당장 튀어오라고 해! 저녁까지 안 오면 더 이상 거래는 없는 걸로 알라고! 개새끼 하나 제대로 못 다루고, 정말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수하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남겨진 권기한은 바닥에 깨진 유리잔 조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한강우, 유아라, 최한석… 감히 이 권기한한테 도전을 해? 그게 어떻게 되돌아가는지 두고 봐라.”
* * *
박도진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를 만나고 정확히 이틀 뒤였다.
그는 강우에게 한 카페로 나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박도진, 그 사람 좀 수상하던데요? 직장도 없고, 평소 행적도 묘연해요. 헌터 등록도 안 돼 있고요.]
각성자가 헌터 등록이 안 돼 있다면, 어딘가 켕기는 게 있는 건 분명했다.
정말 아버지 박광석의 말대로 불법적인 일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한과는?”
[그건 아직 파악 중인데… 통장에 매달 거금이 꽂히고 있어요. 근데 그 돈을 지급하는 회사가 유령회사예요. 그 회사 실소유주가 누군지 알아내야 하는데, 워낙 꼭꼭 숨겨 놔서……. 수상한 냄새가 엄청나게 풍기네요.]
“알겠다. 저번에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그 두 사람은 아직 진행 중이에요. 하지만 곧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다.”
[근데… 저번에 말을 못 했는데, 단원도 의뢰비는 내야 해요. 대신 할인 있으니까 큰 부담은…….]
“그래서 저번 균열 의뢰비를 지급 안 했군.”
[…알고 있었어요?]
“그럼 된 걸로 알고 끊겠다.”
[…네.]
마침 황한수에게 연락도 왔겠다, 강우는 박도진의 요청에 응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녁 7시.
카페에 도착하자 먼저 와 기다리던 박도진이 강우를 맞이했다.
여전히 피로한 얼굴이었다.
평소 행적이 묘연하다는 그는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걸까?
그는 강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 피… 정체가 뭡니까?”
딱히 숨길 내용은 아니기에 강우도 곧장 대답했다.
“야수병의 피입니다.”
“야수병이라고요?”
하지만 박도진은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는 미노타우로스의 피를 자신의 몸에 직접 넣어 봤을 것이다.
당연히 효과를 봤을 테고, 백방으로 그 피의 정체를 알아보러 다녔겠지.
하지만 <피바라기>로 정화한 피를 파악할 수 있는 자는 현재로선 없었다.
아직 <피바라기>가 알려지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박도진이 말했다.
“몬스터의 피가 인간에게 맞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하겠죠. 특별한 방법으로 정제를 마친 피입니다.”
“…….”
강우의 발언은 박도진이 주사기를 썼다는 전제하에 꺼낸 것이었다.
이미 들킨 이상 그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알고 계셨군요. 확실히 효과가 있더군요. 부작용은 없는 겁니까?”
“내가 아는 한은. 하지만 일시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박도진의 얼굴에 잠시 실망의 빛이 스쳤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적이라도 좋습니다. 수영이가 다시 병원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박도진의 눈에도 그 아버지와 같은 간절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부성애란 이런 걸까.
강우가 그 빛을 눈여겨보는 가운데, 그가 물었다.
“뭘 원하십니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지만… 아버지께 듣기로는 한 번 거절하셨더군요. 혹시 더 필요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말씀해 주십시오. 뭘 드리면 그 피를 파시겠습니까?”
그 절실한 눈을 마주하며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번.”
“…네?”
“단 한 번의 대답이면 됩니다. 언제고 내가 듣고 싶은 답을 들려준다면, 그 피를 계속 공급해 드리죠. 몇 번이고.”
“……!”
예상치 못한 강우의 제안에 박도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생 시중을 들라 했어도 그 말을 따랐을 것이다.
불합리한 일을 저지르라 했어도 그 말을 따랐을 거고.
그런데 단 한 번의 대답이라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대답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박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답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박도진이 망설이자,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강우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박도진은 상대가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번 제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결국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알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테이블 위에 주사기 하나를 올려 둔 강우는 그 길로 카페를 다시 나섰다.
* * *
강우가 박도진과 거래를 튼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숨긴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흑혈병 환자이면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존재.’
지난 시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결과, 강우는 언젠가 들은 호공의 말을 떠올렸다.
― 간혹 마력을 갖지 않는 각성자가 있습니다.
놈과 <피바리기>의 능력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들은 말이었다.
― 그들은 계약이나 특별한 물건을 통해 마력을 공급받습니다. 흥미로운 일이죠. 만약 그 능력의 비밀을 밝혀내게 된다면 엄청난 혁명이 될 겁니다. 어쩌면 마력을 얻는 새로운 루트가 생겨날지도 모르니까요. 심지어 타인의 마력을 빼앗아 오는 게 가능해질지도…….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온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피바라기>의 숙주였던 최명식도 그런 경우였다.
놈이 사용한 마력은 본인이 아닌 검의 것이었으니까.
호공은 그 같은 이들을 <변이자>라 불렀다.
신체가 타인의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으로 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본래 마력은 피가 아니기에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강우가 유아라에게 마력을 주입한다고 해서 그녀의 마력이 강해지지 않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호공이 변이자들에게 관심을 보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이트 스톤>의 세상에서 마물을 죽이고 마력을 얻었을 때, 강우가 놀란 것도 그 때문이고.
‘박도진은 변이자인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만약 그가 정말로 변이자라면, 그 가치가 무궁무진할 터였다.
각성자 신분을 감춘 각성자란 그 무엇보다 위협적인 비장의 무기가 될 테니까.
설사 박도진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도 그 능력과 변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어느 쪽이든 야수병의 피를 담보로 만나기엔 강우 쪽이 훨씬 이득인 관계였다.
야수병의 피야 또 구하면 그만.
미노타우로스급의 피는 어렵겠지만, 하급 야수병이라면 시중에도 충분히 유통되고 있었다.
‘일단은 그를 데리고 있는 조직부터 알아내야 한다.’
강우의 추측대로라면, 박도진을 지원하는 건 이한 길드일 확률이 높았다.
그의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후원하는 게 이한이기 때문이다.
VIP실 병동은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되는 곳.
그렇다면 박도진은 이한 길드에서 나름 영향력 있는 존재가 분명했다.
어쩌면 이한을 운영하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그일 수도 있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런데 강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앞 골목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강우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황한수였다.
“무슨 일이지?”
[한강우 씨, 이한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