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흑혈병(黑血病) (2)
『거절하겠다.』
강우는 청익의 제안을 거절했다.
유아라를 살린 건 자신의 결정이지만, 그렇다고 권기한의 일까지 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자신은 그 외에도 할 일이 많다.
『예상은 했다만… 알겠어. 우리 선에서 처리할게.』
청익도 더 매달리지 않았고, 대화를 마친 강우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만약 권기한이 검계의 눈을 피해 접근한다고 해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가로막으면 벨 뿐.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자신은 잃을 게 없으니까.
잃을 게 없는 존재는 두려운 것도 없는 법이다.
* * *
집으로 돌아온 강우는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단독 영상! LV. 3 균열에 찾아온 동화 같은 이야기. ‘갈대숲 청년을 찾습니다’ 훈훈.』
『중년을 살리고 떠난 의인. 과연 그의 정체는?』
…….
인터넷은 오늘 남자를 살린 강우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누군가가 캠으로 촬영까지 했는지, 그를 살려 내는 과정이 흐릿한 동영상에 담겨 있었다.
보기만 해도 낯 뜨거운 제목과 영상 속 장면들.
당장 기자들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은 심정이지만, 기사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방송국에 칼을 들고 찾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모자를 눌러쓴 덕분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들을 살렸다.
‘피를 갈아 주지 않길 잘했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강우는 동영상을 껐다.
그러고는 남자에게 피를 주입하던 때를 복기했다.
‘분명 마력이 반응한 것 같은데…….’
긴박함 때문이었을까.
강우는 아까 남자를 구하면서 그간 느끼지 못한 묘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곤두섰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듯했다.
마치 마력이 날카롭게 긴장한 듯 팽팽해진 느낌.
‘아니. 처음이 아니다.’
처음 이 빌라에 발을 들이기 전에도.
검계 입단을 위해 양복점을 찾았을 때와 유아라를 구했을 때도.
생각해 보면 마력이 알 수 없는 흐름을 일으킨 적이 종종 있었다.
‘설마…….’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강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설마 자신은 이미 긴장이 팽배한 상황에 길들어져 버린 게 아닐까.
전생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숱한 전장을 누비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위협을 느끼는 때가 드물다.’
과거로 돌아온 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지만, <사이트 스톤> 세상 때를 제외하면 크게 긴장하거나 위험에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력이 움직이지 않은 건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장혜진을 기대하며 빌라에 들어섰을 때와 황 노인을 찾아갔을 때는 그렇다 쳐도, 왜 유아라와 남자를 구할 때도 마력이 반응했을까?
‘이상한 일이군.’
한동안 고민하던 강우는 마침내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낯선 상황이 나를 긴장케 한다.’
전생에도 강우는 딱히 호인은 아니었다.
장혜진을 끔찍이 아꼈지만, 딱 그녀에게만 한정됐을 뿐.
타인에게까지 살가운 건 아니었다.
게다가 각성자가 되고 나서는 그런 성정이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살생을 거듭한 탓이겠지.
‘그래서였군.’
즉, 강우는 남을 살갑게 대하거나 대해지는 상황 자체가 어색한 것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남에게 호의를 보이거나 받는 것만으로도 몸이 긴장하다니.
자신에게 호의적인 황 노인과 청익, 왕린이 불편한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느 때 마력이 반응하는지 알아냈으나,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일단은 균열에 집중하자. 우선 가면부터 바꿔야겠군.’
왕린이 가면에 담을 수 있는 얼굴은 단 하나뿐이다.
이미 알려진 얼굴을 계속 사용할 순 없는 노릇.
강우는 이번 주까지만 쓰고 다른 가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바꾸면 좋겠지만, 가면을 시도 때도 없이 주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 가면의 이름은 뭐가 될는지.
강우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강우의 기계적인 <균열> 레이드는 계속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우연은 세 번째 날 찾아왔다.
“최씨? 최씨 맞지?!”
‘…이런.’
<균열> 레이드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낯익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우가 구해 준 그 중년 남자였다.
등에 커다란 봇짐을 지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 레이드에서 포터를 맡은 모양이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일부러 의정부 쪽 <균열>을 택한 건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인연인가 싶었다.
강우가 붕대로 감긴 남자의 오른팔을 보며 물었다.
“괜찮으신 모양이군요.”
“그럼 괜찮고말고! 자네가 살려 준 덕분에 이렇게 계속 일도 하지 않나. 병원에서 말하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
남자는 정말로 쌩쌩하다는 듯 과장되게 팔을 돌려 보였다.
“그래도 아직 회복이 다 되지 않았을 텐데요?”
“에이, 이 사람아. 헌터들 다치는 게 뭐 드문 일인가? 안 죽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다쳤다고 다 쉬면 어떻게 먹고살아? 오히려 힘이 샘솟는 것 같다니까, 하하하!”
단 며칠 만에 저런 회복 속도라니…….
확실히 미노타우로스의 피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처가 덧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럼.”
강우는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지만, 당연히 남자가 생명의 은인을 그냥 보내 줄 리 만무했다.
그가 강우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저번에 말한 막걸리, 오늘 하지 않겠나? 고맙기도 하고… 꼭 대접하고 싶네.”
“괜찮습니다.”
“제발 부탁이네. 밥이라도 꼭 한 끼 대접하고 싶어.”
남자의 눈빛이 어찌나 간절한지,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설상가상 남자와의 실랑이로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부탁이네.”
이쯤 되자 강우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금은 궁금한 마음도 생겼다.
과연 남자의 호의만으로도 정말 마력이 반응할 것인가.
“…알겠습니다.”
* * *
남자의 이름은 박광석이었다.
올해로 57세라는 그는 강우를 노원의 한 임대 아파트로 데려갔다.
거실 하나와 방 두 개.
가구라고는 식탁과 장롱이 전부인 아담한 살림이었다.
“이리 앉게.”
식탁에 강우를 앉힌 박광석은 서둘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문이 열리자 김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돼지고기 좋아하나?”
“…네.”
박광석이 부랴부랴 요리를 준비하는 사이, 강우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식탁에 올려 둔 장식장에는 액자가 몇 개 놓여 있는데, 대부분이 한 소녀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도 저 소녀가 저번에 말한 손녀인 듯싶었다.
병원에 있다던.
문득 궁금해진 강우가 물었다.
“손녀분인가 보군요.”
“아… 맞네.”
콩나물과 돼지고기를 볶던 박광석이 살짝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무거운 말투였다.
강우가 다시 묻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이름은 박수영이네. 올해 여섯 살이지. 지금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있어.”
“그렇군요.”
굳이 무슨 병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박광석이 완성된 콩나물 불고기를 내왔다.
대패 삼겹살과 콩나물, 파만 들어간, 간단한 요리였다.
“미안하네. 재료가 이것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
며칠 전, 검계 회동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조촐한 식단.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뭐가 낫다 이런 건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가 해 준 음식을 먹는 게 오랜만이라 다소 어색했을 뿐.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잘 먹겠습니다.”
한입 먹어 보자 담백한 게,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곧 막걸리가 담긴 두 개의 사발이 부딪치고,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켠 박광석이 기분 좋게 웃었다.
“크, 좋군. 각성자가 되고 나서 가장 불만인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술맛이 떨어졌다는 걸세.”
마력으로 강화된 몸이 알코올에도 내성이 생겼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각성자들을 겨냥하고 만든 독한 술도 제법 많았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스물다섯입니다.”
“생각보다 어리군.”
박광석은 한 잔을 또 쭉 들이켰다.
아직 왼손에 적응되지 않았는지, 젓가락질은 다소 서툴렀다.
몇 번의 거듭된 젓가락질로 간신히 고기를 집어 먹은 그가 말했다.
“고생을 많이 했나 본데. 어릴 적 풍파를 많이 겪은 눈이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또 정확하지.”
“…….”
강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이후로 학창 시절은 딱히 떠올리고 싶은 추억이 없다.
스무 살 때 장혜진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인생에는 의미라는 게 생겼으니까.
“나도 아들이 하나 있네. 자네보다 두 살 많지.”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녀가 여섯 살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 아들은 20대 초반에 애를 낳은 모양이다.
자신을 보니 갑자기 아들이 떠오른 걸까?
그때까지만 해도 강우는 그가 왜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알지 못했다.
연거푸 막걸리를 마신 박광석이 새로운 병을 따며 말했다.
“아들놈은 집에 안 들어온 지 벌써 3년이 넘었어. 못난 놈이 자기 딸을 나한테 맡기고 돈을 벌러 간다지 뭔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랬군요.”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자식을 낳았으니,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겠지.
강우도 종종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어진 박광석의 말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일 년 전부터 매달 이천만 원씩 보내고 있더군.”
이천만 원?
매달 그 정도의 돈을 보낼 정도면, 아들이 꽤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밑천도 없는 20대 청년이 그만한 돈을 만질 직업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아드님도 각성자인 모양이군요.”
“맞네. 아비도, 자식도 각성자지.”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월 이천만 원씩 벌 수준의 각성자라면 생계 걱정은 없을 텐데…….
아프다는 손녀의 병원비로도 충분할 터였다.
“문제는 놈이 딱히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진 않다는 걸세.”
“뭔가 짚이는 게 있군요.”
“그걸 말해 줄 순 없네만… 그 정도 활약을 하는 헌터가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걸 보면 대충 예상이 가지. 집에 못 들어올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나는 아들놈이 보낸 돈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있네.”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단순한 취중진담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 맞네. 아비도, 자식도 각성자지.
뒤늦게 강우는 조금 전 박광석이 말을 떠올렸다.
어딘가 자조가 섞인 듯한 말투.
굳이 자신과 아들을 그렇게 칭할 필요가 있었을까?
‘슬슬 일어나야겠군.’
박광석이 또 한 잔을 비우는 사이, 강우는 잔을 내려놓았다.
계속 있어 봐야 그의 푸념만 늘어날 듯싶었으니까.
그와의 독대에서 마력의 반응을 기대했으나, 크게 느껴지는 바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강우를 지켜보던 박광석이 말했다.
“지금까지 아들이 보낸 돈이 5억이 넘네. 자기 자식 병원비에 보태라고 했지만, 뭔 짓을 하고 번 줄도 모르는 돈으로 손녀를 치료할 순 없어. 내가 그 돈을 자네에게 모두 주겠네.”
대뜸 5억을 주겠다니.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취했나?’
하지만 애초에 각성자가 막걸리 몇 병에 취할 리 없다.
즉, 지금의 그는 진심이라는 뜻.
강우가 금세 차가워진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그 돈을 받을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그러나 박광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반드시 자네가 받아 줬으면 좋겠네. 자네만이… 자네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고는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강우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흑혈병이라고 아나?”
그의 눈에서 더없는 절실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