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흑혈병(黑血病) (1)
“거기 손 안 떼?! 지금부터 손대는 놈들은 모두 도둑놈으로 간주한다!”
“네가 뭔데?!”
붉은 오크 보스가 죽은 갈대숲은 그 전리품을 놓고 흔한 드잡이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보상에 관심이 없던 강우는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남은 오크를 찾아다녔다.
십여 개의 길드가 하이에나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보상을 욕심내 봐야 피곤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강우에겐 보상보다 3차 각성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었다.
‘백귀들이 나오기까지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해.’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할 때 <피바라기>에서 검은 불길이 일던 걸 보면, 지금 그의 상태는 과거 군대 계급으로 치면 ‘진’ 상태였다.
소령(진), 대위(진)처럼 진급을 확정받은 상태.
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마력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선 그 느낌에 눈을 떠야 하는데… 무언가가 막혀 있는 듯한 기분이다.’
과거에는 수천수만 번도 더 뿜어져 나오던 마력이 속을 썩이니 더 갑갑했다.
3차 각성을 이루면 <사이트 스톤>도 다시 반응할 것 같은데…….
‘조급해진 탓인가.’
그런데 강우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한쪽에서 큰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악!”
“여, 여기 좀 도와줘! 박씨가 이상해!”
아무래도 부상자가 있는 모양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오른쪽 손등이 찢어진 남자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까 강우에게 막걸리를 마시자며 너스레를 떨던 50대 남자였다.
“의, 의료진 오라고 해! 빨리!”
남자의 동료로 보이는 몇몇이 서둘러 상처 부위에 소독제를 뿌리고 천으로 감싸 압박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자의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어찌나 몸부림이 심한지, <균열>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강우의 눈이 좁혀졌다.
‘독이군.’
강우는 붕대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에 주목했다.
남자의 출혈에 검붉은 색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오크 중에는 자신들의 분뇨를 독으로 쓰는 놈들이 있는데, 아마도 거기에 당한 듯했다.
이대로라면 남자는 앞으로 몇 분 안에 사망할 확률이 높았다.
그를 붙잡고 있던 동료가 애타게 외쳤다.
“박씨, 조금만 참아! 곧 의료진이 올 거야!”
거짓이다.
의술을 익힌 각성자는 귀하니까.
이런 소규모 길드들에게 그런 고급 인력이 있을 리 없다.
“으으……!”
동료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남자는 이제 귀도 잘 들리지 않는지 반응이 없었다.
어느새 흰자위를 드러낸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당황한 동료가 주변을 향해 애원했다.
“누, 누구 치료제 가진 사람 없어?!”
<균열>을 드나드는 각성자라면 누구나 상비약 하나쯤은 갖고 다니기 마련.
그중에는 출혈을 멎게 하거나 새살을 돋게 하는 등 기적적인 효과를 가진 마법 아이템도 있지만,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억 원까지도 오가는 치료제를 남에게 내놓을 자는 없었다.
“제, 제발……!”
동료가 애처롭게 중얼대는 가운데, 묵묵히 지켜보던 강우도 몸을 돌렸다.
<피바라기>를 이용해 감염된 피를 갈아 줄 수도 있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그런데 그때였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남자가 발작을 일으키자, 그를 안고 있던 동료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바, 박씨, 정신 차려! 손녀딸을 생각해야지! 자네가 죽으면 병원에 있는 손녀는 누가 돌봐?! 부모도 없는데, 진짜 고아 만들 거야?!”
‘…제길.’
강우는 그 길로 몸을 돌려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부모 없는 손녀딸이라니.
자식을 허무하게 잃은 그로선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싶었지만…….
그게 이 남자를 살릴 운명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남자가 강우가 있는 곳에서 다친 게 운명이라면, 그것도 그의 복일 테니까.
“아, 아까 보스 잡은 사람 아니야?”
뒤늦게 강우를 알아본 사람들이 흠칫하며 길을 비켜 주었다.
독이 퍼질 대로 퍼진 남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푹!
강우가 <피바라기>로 그의 팔꿈치를 찌르자, 옆에 있던 동료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이야!”
“독에 중독됐습니다. 우선 피부터 뽑아내야 합니다.”
“독?!”
강우의 말에 남자와 같은 길드원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웅성댔다.
하지만 곧 별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제발 살려만 주게.”
대답을 듣자마자 강우는 남자의 팔을 팔꿈치 아래로 크게 베었다.
팔을 잃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터.
강우가 아무렇지 않게 팔을 가르자, 지켜보던 몇몇이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갈라진 속살을 살피던 강우가 말했다.
“깨끗한 물과 붕대를 가져다주십시오.”
그러자 남자의 동료들이 서둘러 물병과 붕대를 들고 왔다.
그들의 간절한 표정을 보아하니, 남자는 동료들에게 꽤 괜찮은 존재였던 듯했다.
강우는 독이 달라붙은 뼈를 대충 씻기곤 물었다.
“혈액형을 압니까?”
“오, 오형…….”
강우는 남자의 피를 완전히 교체하는 대신 <피바라기>가 가지고 있던 미노타우로스의 피를 인간의 것으로 변환시켜 소량 주입했다.
야수병의 피는 재생 능력이 뛰어나 독을 해독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꿀꺽.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강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의 눈엔 수혈이 독을 빼내는 과정처럼 보일 터.
이윽고 몸부림을 멈춘 남자의 몸이 축 늘어지자, 지켜보던 동료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정신을 잃은 겁니다. 지금은 숨통만 겨우 터놓은 상태이니까, 서둘러 병원에 데려가야 합니다. 잘못하면 팔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피를 완전히 갈아 내는 것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강우가 할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죽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이제부터는 남자의 살고자 하는 의지에 달렸다.
“고, 고마워! 아니, 감사합니다! 서둘러!”
거듭 감사를 표한 남자의 동료들이 부랴부랴 그를 업고 <균열> 입구로 달려 나갔다.
짝, 짝, 짝짝짝―!
지켜보던 사람들이 강우를 향해 하나둘 손뼉을 치는 사이,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균열>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골목으로 들어가 검계의 가면을 벗었다.
강우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며칠 새 의사가 된 것 같군.’
* * *
붉은 오크 레이드를 마친 강우는 왕린의 어플을 켜 약속 장소를 찾았다.
그곳은 어느 골목에 자리한 작은 카페였는데, 손님도 없고, 주인도 없는, 희한한 곳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세련미가 돋보이는 노란 원피스와 시원하게 위로 올려 묶은 갈색 머리.
흰 피부에 미모까지 뛰어나서 전달책이라 보기에는 다소 눈에 띄는 여자였다.
강우가 그 앞으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 왔어요?”
마치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였다.
“…….”
여자가 손에 쥔 책이 거꾸로 들려 있지만, 강우는 별말 없이 건너편에 앉았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안 더우세요?”
강우는 자신의 검은 정장을 내려다봤다.
특수 소재라 딱히 덥거나 하진 않지만, 확실히 겉보기에는 답답해 보이긴 했다.
특히 5월에 입기에는 더더욱.
그러나 강우는 별 대답 없이 용건만 물었다.
“부탁한 물건은 준비됐습니까?”
“호호, 급하신 분이네.”
작게 웃은 그녀는 자신의 명품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살폈다.
“이무기의 비늘 조각 다섯이랑 추적자의 실 맞죠? 다 쓰고 남은 돈은 1,300만 원이에요. 이무기의 비늘이 꽤 비싸서.”
이무기의 비늘이 비싸다지만, 나중엔 지금보다 몇 곱절은 더 비싸질 터였다.
그땐 없어서 못 구할 물건이 될 테니까.
여자가 내민 태블릿 화면을 보니 <마석>과 <이동석>이 판매된 금액은 삼억이 조금 넘었다.
“이동석은 좀 싸게 팔렸어요. 그놈이 거기에 제 이름을 새겼더라고요. 유치하긴. 기념품이었나?”
“상관없습니다. 물건은?”
퉁명스러운 강우의 말투에 여자가 아쉽다는 듯 다리를 고쳐 꼬며 이야기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꽉 막힌 분이네. 얼굴은 시원하게 생겼는데.”
“물건.”
“…에휴.”
작게 숨을 내쉰 그녀가 말했다.
“물건은 빠르면 다음 주 즈음 도착할 거예요. 요즘 이무기가 통 안 나와서 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추적자의 실은 지금이라도 드릴 수 있는데… 드려요?”
“아니. 같이 줘도 됩니다.”
용건을 마친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자가 물었다.
“벌써 가요?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지.”
강우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마시고 가요. 나 잘생긴 각성자랑 커피 마셔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
맹랑한 여자였다.
강우는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카페를 나섰고, 홀로 남은 여자는 그런 강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승부욕 일게 만드네. 하긴, 쉬우면 재미없긴 하지. 응?”
태블릿을 가방에 다시 넣으려던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내려 둔 책이 거꾸로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중얼댔다.
“…봤을까?”
* * *
[크크큭! 너, 왕선화 만났다며?!]
대뜸 전화를 건 청익이 수화기 너머에서 낄낄 웃었다.
“왕선화?”
[그 전달책 말이야.]
카페에서 만난 여자의 이름이 왕선화인 모양이었다.
근데 왕씨라니…….
“아는 여자인가?”
[당연히 알지. 걔가 왕린의 딸이거든.]
어쩐지 성이 이상하다 했다.
그나저나 자신의 딸도 전달책으로 쓰는 건가.
전달책치고 권한이 많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이가 많던데.”
왕린의 나이는 이제 기껏해야 마흔이 됐을까.
이십 대 중반의 딸을 갖기엔 젊은 나이였다.
[수양딸이야. 나도 정확히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전달책은 우리를 모른다고 한 것 같은데.”
[걔는 예외지. 딸이잖아. 나중에 그쪽 일을 완전히 맡기려는 것 같아.]
…후계자라 이건가.
강우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청익이 다시 말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걔 또라이니까 조심해. 성질 완전 장난 아냐. 왕선화라고 부르지도 말고. 걔 원래 이름은 한선화거든. 우리나 왕선화라 부르는 거지, 본인은 그렇게 불리는 거 싫어해.]
또 마주칠 일이 있겠냐 싶었지만, 강우는 대충 수긍했다.
“알겠다.”
[근데 너, 재미난 일을 했더라?]
“재미난 일?”
[균열에서 말이야. 각성자 하나를 살렸다며? 다들 너 찾겠다고 난리던데. 벌써 뉴스에도 나왔어.]
“…….”
불과 세 시간도 안 지난 일이 기사까지 나다니, 오늘따라 기자들이 부지런했던 모양이다.
[어차피 가면 써서 알아볼 사람도 없겠지만. 근데 어떻게 한 거야? 그거 완전 맹독이라던데… 해독제도 없이 어떻게 살려 낸 거야?]
하지만 <피바라기>를 사용했다고 사실대로 밝힐 순 없는 노릇.
강우는 대충 대답했다.
“피를 좀 흐르게 했을 뿐이다.”
[그게 그걸로 되나? 그나저나 조금 마음이 변했나 봐? 이제 우리랑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끊겠다.”
[뭐? 야, 잠깐만…….]
툭.
강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쩌다 이런 일에 계속 얽매이게 되는 건지…….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점차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청익의 문자였다.
『다짜고짜 끊어 버리기 있냐? 어차피 전화도 안 받을 것 같으니까 문자로 할게. 이번에 권기한 쪽 움직임이 포착됐어. 너랑 유아라를 찾는 것 같은데… 하필 이때 그 아가씨가 사라졌단 말이야? 아무래도 권기한을 잡으러 간 것 같아. 그 여자도 참 대책 없는 아가씨지.』
유아라의 결정은 강우도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그가 권기한의 존재를 알려 준 순간부터 그녀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녀의 선택이지, 강우의 탓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린 처음부터 권기한이 목표였어. 그놈, 보기보다 더러운 놈이거든. 유아라야 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제부터 본인의 몫이고. 그래서 말인데…….』
청익이 물었다.
『어때? 네가 한번 맡아 볼래?』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