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회동 (1)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시각.
회동 장소는 청담동의 한 한식당이었다.
한옥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3층짜리 초호화 식당은 커다란 정원과 용의 비늘 같은 기와지붕이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우가 정원에 들어서자, 대기하던 직원 넷이 동시에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
전생에도 포장마차나 찾던 강우로서는 부담스러운 대접.
그는 다소 불편함을 느끼며 안내를 맡은 직원을 따라갔다.
그녀가 데려간 곳은 제일 꼭대기 층인 3층이었는데, 복도 양옆으로 미닫이가 달린 네 개의 방이 보였다.
그중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은 단 하나.
강우는 그곳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아, 일찍 왔네?”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청익이었다.
그가 반가운 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는 가운데, 강우는 테이블 위에 세팅된 접시 네 개와 주인 없는 방석 세 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회동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청익이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맞아, 회동. 스무 명한테 초대장을 보냈는데, 아무도 안 왔지 뭐야. 내가 실수로 수장의 인장을 찍는다는 걸 까먹어서……. 근데 뭐, 자주 있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주인공만 있으면 되지. 어서 와서 앉아.”
“…….”
강우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막 문지방을 넘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어서 오십시오!”
“빨리빨리 안내해! 바쁘신 몸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직원과 시끌벅적한 목소리들.
그 소리를 들은 청익이 말했다.
“아, 왔나 보네. 너 보고 싶다던 사람.”
이윽고 3층으로 올라오는 뚱뚱한 남자가 보였다.
커다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삼각형 미니 선글라스와 찜질방에서 방금 나온 듯 헐렁한 황토색 개량 한복.
일전에도 만난 적 있는 왕린이었다.
그를 본 강우의 감상은 짧았다.
‘꼭 저팔계 같군.’
경호원을 넷이나 달고 온 왕린은 직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복도를 걸어오더니, 이내 강우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
그림 도둑과 그림 주인의 두 번째 만남.
잠시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만 봤다.
그때, 청익이 강우에게 대뜸 <전음>을 보냈다.
[가만있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소린가 싶던 찰나, 갑자기 왕린이 경호원들을 불렀다.
“잡아.”
두두두―
허겁지겁 달려오는 경호원들에 마룻바닥이 정신없이 울리고, 강우는 어느새 자신의 양팔을 붙잡은 그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아무리 황 노인의 명령이라지만, 다짜고짜 집을 찾아가 총질을 해 댄다면 강우 자신이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듯했다.
더군다나 얻어맞기까지 했다면 더더욱.
역시나 다가온 왕린은 냅다 강우의 복부를 때렸다.
퍽!
진심 어린 주먹질에 강우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사이, 그가 말했다.
“감히 내 얼굴에 손댄 값이다. 피부과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그리고 네놈이 깬 유리랑 물건 값이 얼만지 알아? 이 정도로 끝내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왕린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강우를 붙잡고 있던 경호원들도 그제야 손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익이 건너편 자리에 뒤뚱거리며 앉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니, 처음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그리고 안 그러면 어떻게 그림을 훔쳐 와? 집에 들어가야 뭘 훔쳐도 훔칠 것 아니야.”
그러자 왕린이 기가 찬다는 듯 이야기했다.
“초인종을 눌러, 초인종을! 초인종은 멋이냐? 누를 때만이라도 느껴 보라고 최고급 에메랄드까지 박아 넣었는데! 어떻게 된 새끼들이 초인종을 누르는 놈이 없어. 상식 없는 자식들. 아파트도 안 살아 봤나? 벨 없어?”
강우와 청익이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는 가운데, 왕린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엔 헌터 경찰에 신고를 한 놈도 있었지. 헌터들을 맞이하는 새 훔쳐 간 놈이 바로 눈앞에 있었어.”
“크크큭, 어느 정도 난이도인지 내가 테스트를 해 봐야 했으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경찰을 부르고 알펜시의 기적을 훔쳐 간 주인공은 청익인 듯했다.
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 나쁜 감정은 없어 보였다.
되레 둘은 옛 추억이 즐거운 듯 낄낄대며 웃음을 흘렸다.
‘…힘들군.’
강우로서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은 광경이었다.
자신이 알던 검계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그때, 왕린이 여전히 입구에 서 있는 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딱딱하게 서서 뭐 해? 어서 와서 앉아.”
“…….”
뒤끝은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강우가 청익의 옆에 앉자, 왕린이 품속에서 술병 하나를 꺼냈다.
분홍 꽃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백자였다.
“한잔해.”
쪼르륵.
두꺼운 흰 술잔에 술이 차오르고, 세 사람은 그것을 한 잔씩 마셨다.
저런 술병이 어떻게 품속에 들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와 별개로 맛은 좋았다.
언뜻 매화 향이 나는 듯했다.
술이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왕린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앞으로 매일 지정된 장소에 내 수하들이 있을 거야. 처리할 물건이나 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걔들한테 말하도록 해.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차피 전달책이라 우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든. 튈 걱정도 없어. 몇 놈을 도륙 냈더니, 이젠 달아날 생각조차 못 하더라고.”
이어서 그가 건넨 건 검은 스마트폰이었다.
“작업 다 마친 거니까 앞으로 편하게 써. 웬만한 번호도 다 등록돼 있다.”
아마도 이 핸드폰이 검계용 연락 수단인 듯했다.
핸드폰을 켜자 바탕화면에 어플 하나가 보였는데, 눌러 보니 지도와 함께 빨간 점 몇 개가 반짝거렸다.
“그 점이 전달책의 위치야. 매일 바뀌니까 참고하고.”
홀로 한 잔 더 들이켠 왕린이 말을 이었다.
“명심해. 이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 돈으로 못 할 게 없지. 주먹도 돈이면 살 수 있어. 하지만 그 주먹이 다시 네 돈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걸 알아 둬라. 주먹과 돈, 둘 다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이상.”
대뜸 빤한 조언을 건넨 왕린이 손짓하자,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재빨리 다가와 그의 몸을 일으켰다.
청익이 물었다.
“벌써? 수장 안 보고 가? 밥은?”
“어차피 노인네 와 봐야 또 잔소리만 듣지. 알잖아, 노인네 이런 곳 싫어하는 거. 대체 돈 벌어서 어디다 쓰려는지……. 난 더 좋은 데 갈 거다.”
회동이라더니, 각자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 앞에서 멈칫한 왕린이 강우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다음부턴 형님이라 불러. 또 지금처럼 입 꾹 다물고 있으면 가만 안 둔다.”
그러고는 정말로 그대로 가 버렸다.
황당한 표정인 강우를 보며 청익이 킥킥댔다.
“이해해 줘. 우리가 원래 좀 자유로운 영혼이라.”
이런 걸 그렇게 포장할 수 있는 건가.
강우가 다소 어지러움을 느낄 무렵, 마침내 황 노인이 도착했다.
청익과 강우가 일어나 황 노인을 맞이하자, 그는 조금 전까지 왕린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앉게.”
그들이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음식을 내왔다.
도미찜과 소갈비가 메인인 한정식 식단.
요즘은 보기 힘든 음식들이었다.
청익이 못 참겠다는 듯 소갈비 하나를 맨손으로 집어 드는 사이, 황 노인이 물었다.
“그래, 첫 의뢰를 마친 소감은 어떤가?”
“다소 난해했습니다.”
강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그런 식의 의뢰는 절대 사절이었다.
그런 강우의 눈을 바라보던 황 노인이 다시 말했다.
“좀 더 확실한 의뢰를 원했나 보군.”
황 노인은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이 앞으로 그러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청익, 잠시 자리를 비켜 다오.”
“…예?”
그러자 옆에서 소갈비를 맛나게 뜯던 청익이 고기를 문 채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요?”
“그래.”
“아니, 이제 막 집었는데…….”
청익은 툴툴댔지만, 황 노인이 노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내내 그는 갈비에 남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일부러 점심도 안 먹었는데…….]
“다 들린다, 청익.”
저게 수장과 단원이 보일 수 있는 관계란 말인가.
강우는 허물없어 보이는 둘을 보며 새삼 생각했다.
‘검계가 이런 집단이었다니.’
검계의 새 발견이었다.
자신이 알던 검계는 돈이 되는 의뢰라면 사람 목숨도 파리처럼 다루는 살육자 집단이었는데…….
어딘가 맹꽁이 같은 황한수, 나사 빠진 놈 같은 청익,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왕린까지.
지금까지 강우가 만난 검계 인사는 그의 예상을 철저히 빗나가는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수장이라도 정상인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가.’
이윽고 미닫이를 닫은 청익의 기척이 사라지자, 황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새 청익과 나누던 인자한 눈빛은 사라진 상태였다.
“한수에게 사람 둘을 찾게 했더군. 그들을 왜 찾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나?”
강우는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놈들에 대해 뭔가 알아낸 건가?
그가 고민하는 새 황 노인이 다시 물었다.
“혹 원한 때문인가?”
“…개인적인 일입니다.”
강우는 황 노인의 질문에 단 한마디로 못 박아 버렸다.
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황 노인이 안타까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말 우습겠지만… 원망과 분노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법이라네.”
“…….”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는 말이지만, 강우는 예의상 아무 말이라도 했다.
“참고하겠습니다.”
황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처음 자신을 찾아온 날, 그의 눈에서 처음 읽은 건 공허함이었다.
그런 눈은 무엇도 담겨 있지 않지만, 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검같이.
“이번 의뢰로 내가 보여 주고 싶어 한 건 검계의 정체성이라네.”
‘검계의 정체성?’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강우는 묵묵히 황 노인의 말을 들었다.
“자네는 유아라를 살렸더군. 그건 사실 내가 원하던 바이기도 하네.”
황 노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검계가 세상의 활인검이 되길 원하네.”
활인검(活人劍).
사람을 구하는 검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묻지. 자네는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자인가?”
하지만 검계가 이런 집단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우가 검계에 들어온 건 석탈해의 비밀에 대한 정보와 당장 필요한 소속 때문이었으니까.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마음먹기 나름이지.”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강우도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그럼 당신은 평생 그 길을 걸었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길에서 어긋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언뜻 도발로 들릴 수 있는 질문이나 황 노인은 담담히 답했다.
“최대한 노력하는 중이네.”
확답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한 가지 가설이 확실해졌다.
‘역시 석탈해에 대해 무언가 알아내긴 했군.’
검계가 활인검이라면, 석탈해는 살인검이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불태울 붉은 검.
정말로 검계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의뢰를 맡는 거라면, 그들이 석탈해를 암살하려던 이유도 그와 관련 있겠지.
강우의 눈에서 고민의 빛을 읽은 황 노인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네. 어쨌든 자네는 이제 검계의 단원이니까. 차차 생각해 보고 알려 주게.”
황 노인은 강우에게 반쪽짜리 검은 가면을 하나 건넸다.
“검계의 가면이라네.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하게.”
검계의 가면.
그 기능은 강우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챙기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내게 더 묻고 싶은 게 있나? 아니면 요구할 거라든가.”
고민하던 강우가 말했다.
“이번처럼 균열을 몇 개 소개해 주십시오.”
“균열을?”
“예.”
3차 각성을 이루기 위해선 실전이 중요하다.
스스로 <균열>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원하던 가면도 얻었겠다, 이번처럼 위장 신분을 부여해 준다면 그로서도 제법 편할 듯했다.
“그렇게 하지. 2~3레벨의 균열이면 되겠나?”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알겠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네만, 곧 권기한이 움직임을 보일 걸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럼 어서 들지.”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 노인은 수저를 들었고, 강우도 식사를 시작했다.
“와! 정말 너무들 하시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청익도 허겁지겁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식사는 요란했고, 식사 내내 황 노인과 짧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 셋이서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였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