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4화 (15/186)

[14화] 유아라 (2)

강우는 처참한 모습의 권기석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꿈틀대는 걸 보니 아직 죽진 않은 듯하지만, 언제 숨통이 끊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래가지는 못하겠군.’

강우는 눈앞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도 이미 주변 광경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인지한 상태였다.

유아라는 모종의 이유로 권기훈 일당을 공격했고, 그 잔인한 손속으로 볼 때, 예상대로 원한 관계인 게 분명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원한 관계.

이윽고 강우를 차갑게 바라보던 유아라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나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상관있지. 이 정도 스케일이라면 분명 참가한 각성자들도 전부 조사를 받을 거다. 그런데 넌… 죽을 생각인 것 같군.”

그 말에 유아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강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자는 자신이 죽으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윽고 그의 정체를 깨달은 그녀가 말했다.

“검계의 사람이군요.”

“…….”

강우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여기로 되돌아온 이상, 유아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녀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휘말릴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 말대로 난 죽을 테지만, 애먼 사람들에게 피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요. 걱정하는 대로 휘말리기 싫으면.”

말을 마친 유아라는 권기석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강우는 대뜸 놈을 넘어오더니,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강우와 마주한 유아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뜻이죠?”

“잠시 고민하는 중이다. 나는 아직 결정을 못 내렸거든.”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강우는 고민했다.

황 노인은 왜 던전을 확인하라고 했을까?

왜 권씨 형제의 비밀을 알려 준 걸까?

대체 무엇을 바라고?

유아라가 스컬 길드의 수뇌부를 전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것만큼 깔끔한 일이 없을 텐데…….

어쩐지 의뢰가 너무 단순하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굳이 날 이 안에 가둔 건… 아직 입단 테스트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인가?’

황 노인으로서는 이번 경우만큼 강우를 파악하기 좋은 의뢰가 없었다.

명령과 달리 쪽지를 먼저 살피지는 않는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노인은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권씨 형제의 비밀을 어떻게 이용할 거냐고.

‘그 노인이 어떤 자인지 잠시 잊고 있었군.’

대뜸 찾아온 생면부지의 남자를 그냥 받아 줄 만큼 황 노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과연 검계의 수장다운 노림수.

강우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비켜요.”

그때,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유아라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단검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그마치 2년이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을 전부 죽이기 위해 그녀가 준비한 시간.

‘오상훈, 김재명, 권기훈, 그리고 권기석.’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뇌던 이름들.

언니를 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게 만든 놈들.

언니는 그 꼬리표에 짓눌려 차가운 시신이 되었고, 덕분에 그녀의 가족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 구렁텅이 속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건 유아라 자신뿐.

이제야 모두의 복수를 이루게 됐는데… 여기서 끝낼 순 없었다.

“그놈은 죽어야 해.”

기어코 유아라는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강우는 점차 가까워져 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기 없이 붉게 충혈된 눈.

그녀의 죽음을 예감한 건 저 텅 빈 눈동자 때문이다.

허무와 분노가 얽힌 눈이자, 생의 이유를 잃어버린 자의 눈.

그 안은 지독하리만큼 거대한 무력감과 공허가 자리해 있었다.

강우는 그 익숙한 눈빛을 마주하면서 낯선 감정을 느꼈다.

‘연민인가. 아니면…….’

그로서도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타앗!

그때,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유아라의 단검이 강우의 콧등을 스쳤다.

야수병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상태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피곤하게 됐군.’

강우는 <피바라기>를 고쳐 쥐며 자세를 취했다.

상대는 암살자 타입에 부상자.

지금이야 기세가 매섭지만, 시간을 끌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터였다.

슬쩍 돌아보니, 다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아직 오상훈의 시체를 뜯어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팟!

그사이, 다시금 달려든 유아라가 발을 내질렀다.

무릎을 들어 발차기를 막은 강우는 <피바라기>를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린 뒤, 그녀의 상체가 기울어진 틈을 타 다리를 걸었다.

그러나 유아라는 잠깐 휘청였을 뿐, 재빨리 균형을 잡으며 다시 단검을 찔러 왔다.

몇 번이고 마주친 검에서 귀를 찢을 듯한 마찰음이 흘러나왔다.

유아라는 분노한 얼굴이지만,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권기석의 죽음 외에는 용무가 없다는 듯이.

대신 그녀의 침묵은 더 거센 메아리가 되어 강우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계속되는 파상 공세에도 강우는 모조리 막아 내며 시간을 끌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아라의 공격은 점점 거칠어져만 갔다.

격해진 그녀의 호흡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호흡이 불규칙하다. 암살자 교육을 받았지만, 정식으로 다 받은 건 아니야.’

비록 강우는 암살자가 아니지만, 그간 숱한 암해(暗害)꾼들을 상대해 보았기에 유아라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간 만나 본 암살자들에 비하면, 그녀는 아기 암살자라 불러도 좋을 수준.

단검술이 뛰어난 것도, 그렇다고 암살자들에게만 전승된다는 특수한 기술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와 선천적으로 뛰어난 전투 감각에 의존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지만.

‘슬슬 입구를 열고 있겠군.’

유아라의 반쪽짜리 실력에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 분풀이를 계속 받아 줄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흥분한 탓에 일순간 유아라의 동작이 커진 것이다.

어깨 위로 찔러 들어오는 단검을 피하며, 강우는 그녀의 품으로 오른쪽 어깨를 쑥 밀어 넣었다.

이번에도 거리를 벌릴 거라 생각한 유아라는 예상치 못한 돌진에 빈틈을 보였고, 기회를 잡은 강우의 어깨가 그녀의 턱으로 향했다.

저런 공격에 턱을 맞으면 끝이었다.

당황한 유아라는 다급하게 단검을 회수하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강우의 속임수.

턱을 치려던 것처럼 보이던 강우는 갑자기 등을 돌리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팔을 붙잡은 강우가 그녀를 바닥에 업어 친 것이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퍽!

전신을 강타하는 충격에 유아라가 몸을 웅크리는 사이, 강우는 손을 살짝 비틀며 단검을 빼앗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동작이었다.

“…….”

무기마저 빼앗기자 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팔로 두 눈을 가린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몸이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지친 탓일지도.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날… 방해하는 거죠?”

하지만 강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참을 고민하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굴 죽이든 아무래도 좋다. 다만…….”

‘네가 죽어도 온전한 너로 죽었으면 좋겠다.’

<피바라기>를 다시 쥔 날.

그날 가게 유리창에서 본 자신 때문일까.

아니면 괴물로 변해 버린 최명식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감상적으로 돼 버린 걸까?

강우는 이번에도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했다.

대신 딴소리를 했다.

“권기훈한테도 형이 있더군. 권기한이라고.”

“…뭐?”

갑작스러운 발언에 유아라가 눈을 가린 팔을 치우며 강우를 올려다봤다.

그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거다. 인터넷을 봤거든.”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지만,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지. 권기한도 두 동생과 관련이 있을지.”

그러자 유아라의 눈빛이 변했다.

목적을 잃고 흔들리던 그녀의 눈이 다시 새로운 목표로 생기를 되찾은 것이다.

‘정말 모르겠군.’

강우는 자신이 왜 유아라에게 그런 검증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 준 건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권씨 형제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권기한에게 동생의 시신을 가져다주고 사례를 받거나, 랭킹 6위 길드의 도움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유아라를 죽이고 그 시신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겠지.

어차피 그녀의 의뢰는 던전의 입구를 막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우는 그러지 않았다.

황 노인이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몰라도, 어쨌든 강우가 선택한 건 유아라 쪽이었다.

그는 그녀가 살아남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건 이 새로운 세상에서 강우가 내린 최초의 선택이기도 했다.

복수와 전혀 관련되지 않은, 온전한 그만의 선택.

크르르르.

그때, 오상훈에 이어 권기훈마저 삼킨 미노타우로스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잠시 잊고 있었군.’

놈의 발아래로는 역겨운 살점들이 오물처럼 쌓여 있는데, 아무래도 셋으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강우가 유아라에게 말했다.

“같이 싸울 게 아니라면… 물러나 있어.”

결정을 마쳤으니 이제 유아라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건 그녀의 몫이었다.

강우는 <피바라기>에 마력을 주입하며 미노타우로스와 마주 섰다.

‘언데드라…….’

강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피바라기>를 겨눴다.

콰직!

그 순간, 냅다 휘둘러진 할버드가 바닥을 부쉈다.

몸을 날려 재빨리 피한 강우가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달렸지만, 놈의 속도도 굉장했다.

어느새 날아든 팔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콰과과과!

묵직한 충격과 함께 팔에 얻어맞은 강우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엄청나군.’

하지만 놈이 강하다 한들 <사이트 스톤>에서 마주한 데스 나이트만큼은 아니었다.

강우는 <피바라기>를 고쳐 쥐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직 놈은 완벽한 언데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처리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강우는 가지고 있던 상당량의 마력을 <피바라기>에 쏟아부었다.

화르륵!

그러자 검은 불꽃이 강우의 손을 타고 황금빛 페스카즈로 번져 나갔다.

전생에는 볼 수 없던, 짙고 강렬한 검은 마력.

크아?!

언데드가 되어도 불길이 무섭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당황한 미노타우로스가 움찔하는 사이, 강우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리며 그 눈앞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은 불길에 기겁한 놈이 거세게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이미 강우는 그곳에 없었다.

어느새 놈의 뒤를 잡은 강우가 양손으로 쥔 <피바라기>를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푹!

“크아아아아―!”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강우는 깊게 박아 넣은 <피바라기>를 놈의 척추까지 끌어내렸다.

그, 그, 그, 그, 극!

척추 하나하나가 부서질 때마다 까무러치던 놈은 이내 단검이 빠져나가자 움직임을 멈췄다.

갈라진 척추에서 검은 불꽃이 타오르고, 검에 묻은 피가 그 속으로 스며드는 게 보였다.

<피바라기>의 첫 제물이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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