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피바라기 (3)
‘벌써?!’
<피바라기>는 최명식의 죽음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막 쓰레기 무덤을 벗어났는데… 벌써 놈이 당했다고?
미완성 숙주임을 고려해도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당황한 탓인지 몸이 떨렸다.
아니, 그건 당황에서 오는 떨림이 아니었다.
‘내가… 겁을 먹은 건가?’
그건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이대로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
‘아니야!’
하지만 <피바라기>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처음 자신이 태어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그는 308번째 <피바라기>였다.
이전에도 307번의 자신이 있었지만, 1대를 포함한 몇 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변변치 않은 삶을 살다 죽었다.
‘나는 반드시 신이 된다.’
<피바라기>는 이를 갈았다.
비록 과거의 자신은 실패했지만, 308째 자신은 뛰어난 숙주를 만나 신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선택받은 존재니까.
그런데… 마계의 왕도 아닌, 고작 인간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착각이었다.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어차피 놈은 나를 잡지 못해. 일단은 어디 촌구석에 숨었다가 각성자들을 하나씩 삼키다 보면… 어?!’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정체불명의 적은 최명식을 간단히 해치운 것으로도 모자라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져 오는 마력에 <피바라기>는 경악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총 서른네 마리의 좀비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퍼뜨렸다.
그런데 그중 고른 게 하필이면 자신이라고?
단순히 계산해도 3퍼센트조차 되지 않을 만큼 희박한 확률이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결국 <피바라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욕지거리뿐.
그는 놈에게 엄청난 행운을 준 하늘을 저주했다.
[더 빨리 달려, 이 새끼야!]
초조해진 <피바라기>는 자신을 쥐고 달리는 좀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미 죽은 인간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어차피 되살린 시체들은 10분을 채 넘기지 못할 터.
그렇게 되면 자신에겐 남은 희망이 없었다.
‘최명식, 그 새끼가 낮에 피를 잃지만 않았어도…….’
그러나 후회해도 늦은 일.
이젠 인파가 몰린 곳에 숨어 놈이 그냥 지나쳐 가 주길 바라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피바라기>는 그런 꿈을 꿨다.
“꺄악!”
“저 미친놈 뭐야?!”
‘젠장!’
하지만 그 꿈마저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산산이 깨져 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최명식은 죽은 인간들의 옷을 죄다 벗겨 놨기 때문이다.
역시나 벌거벗은 남자를 발견한 행인들은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죽어서도 도움 안 되는 새끼!’
결국 그는 황급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목을 향해 달아났다.
그런데 막 골목에 접어들었을 무렵.
퍽!
갑자기 눈앞에서 한 사내가 나타나 부딪쳤다.
남은 힘이라곤 신체를 유지하는 게 전부였던 좀비는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떤 놈이야!]
분노한 <피바라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골목에서 나온 남자는 취객인 듯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너 이 새끼… 운 좋은 줄 알아!]
당장 죽여 버리고 싶지만, 1초도 지체할 새가 없다.
이러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강우가 가까워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좀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약 3~4분.
<피바라기>는 황급히 좀비를 일으켜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취객이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말하는 검이라니… 신기하네.”
취객의 이름은 청익이었다.
수장의 명령으로 강우를 감시하던 그는 우연히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다.
‘도와주고 나중에 생색 좀 내 보려고 했더니… 그마저도 안 되겠군.’
낮에 강우가 최명식을 살려 주고 난 뒤부터 청익은 줄곧 놈의 뒤를 쫓았다.
아무리 수장이 강우를 감시하라고 했다지만, 살인마를 그냥 놔둘 순 없었기 때문이다.
청익은 명예를 아는 인간이고, 언젠간 가정을 이루길 꿈꾸는 남자였다.
자기 아이가 태어날 세상에 연쇄살인마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살인마 놈을 없애고 다시 강우를 감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강우는 놈을 일부러 놔준 거였다.
저 말하는 기묘한 검을 찾기 위해.
“무슨 꿍꿍이인지… 확 가로채 버려?”
말하는 단검에 흥미가 일었지만, 저기에 손을 댔다간 강우가 자신의 감시를 눈치챌 터였다.
그건 수장의 뜻에 반하는 일.
잠시 시선을 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나저나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정확히 알고 쫓는 거지?”
서둘러 <은신>을 펼치는 사이, <피바라기>가 지나간 골목으로 강우가 달려갔다.
청익은 궁금했다.
자신이야 처음부터 쫓았다고 쳐도, 대체 강우는 수십의 시체 중 놈을 어떻게 찾아낸 걸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네. 할배한테 회식이나 한 번 하자고 해야지. 이크, 늦겠다!’
그는 서둘러 강우의 뒤를 쫓았다.
* * *
강우가 <피바라기>를 쫓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놈을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피바라기>의 기운을 그보다 정확하게 짚어 낼 존재는 없다.
다른 좀비들이 계속 ‘나 잡아 봐라’란 식으로 마력을 흘려 댔지만, 강우는 일관되게 <피바라기>만을 쫓았다.
마력.
사람마다 각기 다른 지문을 가지듯 마력에도 주인 본연의 분위기가 있다.
무자비한 학살을 벌인 살인귀의 마력은 그만큼 흉포한 분위기를 풍기고, 평생을 참선하며 살아온 수행자의 마력은 그만큼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즉, 각성자에게 있어 마력이란 일종의 식별 코드인 것이다.
강우도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4차 각성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저나 저 인간도 꽤나 끈질기군.’
강우는 아까부터 따라오는 청익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감시하려는 건지…….
슬슬 그가 성가셔지기 시작했다.
‘피바라기를 얻게 되면 조치를 취해야겠어.’
강우는 다시 <피바라기>에 집중했다.
가진 기운이 다했는지, 놈이 달아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이윽고 건물 옥상을 몇 개 뛰어넘자, 저 아래로 헐레벌떡 달아나는 좀비가 보였다.
강우는 거리를 좁히며 들고 있던 단검을 날렸다.
철푸덕!
단검이 왼쪽 발목을 자르자 균형을 잃은 좀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좀비는 양팔과 남은 다리를 이용해 계속 달아났고, 강우가 그 앞을 가로막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이익!]
비로소 강우를 마주한 <피바라기>가 악을 썼다.
[너, 대체 뭐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하지만 강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피바라기>에게 다가갔다.
그가 원하는 건 이런 식의 대화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기운이 다한 좀비의 손에서 페스카즈를 빼냈다.
오랜만에 느끼는 <피바라기>의 감촉.
분명 예전에 쓰던 것과 다른 상태이지만, 마치 계속 갖고 있던 것처럼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나와 거래를 하자!]
“거래?”
[그래! 너도 분명 솔깃한 제안일 거야! 난 신을 꿈꾸고 있으니까!]
‘신이라…….’
자신을 과거로 데려온 존재라면 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강우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 세상에 신은 없어.’
그랬다면 과거의 자신을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혜진이도, 아이도, 길드원들도 그렇지 죽지 않았겠지.
이곳으로 되돌아온 건 엄연히 어떠한 ‘계약’ 때문이란 걸 강우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바라기>는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넌 지금도 아주 강해! 그 버러지 같은 놈과는 차원이 다르게 말이야! 하지만 나와 함께한다면, 넌 한 차원 더 강해질 수 있다! 한때 나는 한 행성을 지배한 적도 있어! 우리는 그보다 더한 존재가 될 거다! 확실해!]
그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을 듣고 있자니, 지금 놈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저 허무맹랑한 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일단 귀찮은 인간부터 떨어뜨려 놔야겠군.’
강우는 검 손잡이 중앙에 박혀 있는 루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그곳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
팟!
마력을 느낀 <피바라기>가 움찔하는 사이, 골목에 서 있던 강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뒤늦게 골목으로 들어온 청익이 볼 수 있는 건 오직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뿐.
그는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 거기 누구야!”
“오빠, 저기 사람이…….”
하필이면 그때 골목으로 두 남녀가 들어왔다.
그들은 우두커니 서 있는 청익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기겁하며 밖으로 달아났다.
“사, 살인이다!”
“강서구 연쇄살인마다!”
두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자마자 이쪽으로 몰려드는 인기척이 수십이나 느껴졌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결국 청익은 강우를 포기한 채 서둘러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 * *
붉게 물든 공간.
윤곽을 알 수 없는 그 광활한 공간에 <피바라기>와 강우가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길…….”
<피바라기>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질했지만, 강우는 묵묵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오랜만이군. 6년… 만인가?’
보기만 해도 불길함을 자아내는 이곳은, 처음 <피바라기>를 손에 쥐던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온통 시뻘건 빛밖에 없는 곳.
마치 필름 사진을 인화하는 암실과도 같았다.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잖아! 네놈이 대체 어떻게 이 공간에 들어온 거냐고!”
그때, 붉은 괴물의 모습을 한 <피바라기>가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앳된 얼굴 위로 오톨도톨 돋은 돌기와 두 갈래로 갈라진 혀.
이 흉측한 얼굴의 소년이 놈의 진짜 모습이었다.
언뜻 차분해 보이는 눈빛 뒤에는 묘한 광기가 숨어 있었다.
마침내 강우가 입을 열었다.
“이미 와 본 곳이기 때문이다.”
“뭔 헛소리야! 진짜 네 정체를 말해! 여긴 우리 형제가 아니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컥!”
하지만 강우는 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어느새 그 목을 움켜쥔 강우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계속 살아 있다면 또 숱한 사람들을 죽이겠지.”
“커, 컥! 이, 이것 좀…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해!”
손아귀에 더 힘을 주자, 놈이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강우가 말했다.
“너와 계약 따윈 하지 않는다. 나는 널 없애 버릴 생각이니까.”
“뭐?”
처음 <선혈 동굴>에서 놈을 얻을 때도, 아침에 라디오 뉴스를 들었을 때도.
애초부터 강우는 놈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놈의 주인은 결코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최명식이나 예전 암살자처럼 괴물이 되겠지.
<피바라기>는 살육과 피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
결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
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 날 죽이면 피바라기도 없어! 만약 검을 노리고 온 거라면, 무조건! 날 무조건 살려야 해! 검이 나라는 걸 잊지 말라고!”
<피바라기>는 확신했다.
분명 놈도 이건 몰랐을 거다.
자신이 죽으면 검도 함께 소멸한다는 걸.
그렇게 되면 몇 달 뒤 309번째 자신이 어디선가 눈을 뜨겠지.
그게 이 행성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행성이 될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역시!’
<피바라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대로 강우가 손에서 힘을 뺀 채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자신의 힘을 맛본 인간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이야 목 뻣뻣이 굴지만, 네놈도 별수 없는 인간이지. 곧 내게 복종하게 될 거다.’
이만한 숙주라면 앞으로 펼쳐질 선홍빛 미래가 훤했다.
의기양양해진 <피바라기>가 계속해서 떠들었다.
“만약 이대로 죽는다 한들 어차피 나는 다시 태어나. 그렇게 되면 넌 평생토록 내게 쫓기는 거야. 너도 그걸 원치는 않잖아?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필요한 건 네가 아니다. 피바라기지.”
“뭐? 네가 이해를 잘 못 했나 본데, 내가 죽으면…….”
“사라져라.”
“아, 안 돼! 끄아아악!”
<피바라기>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자, 마치 세균에라도 감염된 듯 그 피부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놈이 몸부림을 치며 강우를 저주했다.
“이 씹어 먹을 새끼! 반드시 다시 태어나 네놈을 죽여 버릴 테다! 네 가족, 자식새끼, 널 아는 모든 인간들 전부 꼬챙이에 꽂아 산 채로 불태울 거다! 살려 달라 애원해도 눈깔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릴 거야! 내가,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할 거다! 크학!”
하지만 저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강우의 마력에 의해 무너지는 핏빛 공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피바라기>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
그의 권능이 담긴 보석을 부숴야만 가능한 장면이었다.
― 내가 필요한 건 네가 아니다. 피바라기지.
그제야 그는 강우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 처음부터 이 세계를 무너뜨리려고…….”
“그래. 네가 마지막 피바라기다.”
고유 세계의 소멸.
그것은 곧 <피바라기>의 완전한 영면을 뜻했다.
이제 자신은 308번째를 끝으로 더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놈은 이 공간의 비밀을 어떻게 알아낸 걸까?
하지만 그 고민은 곧 죽음에 밀려나 버렸다.
“말도 안 돼…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소멸하는 순간까지도 <피바라기>는 원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놈의 몸이 핏물이 되어 바닥을 적시고, 남은 건 붉은 루비가 사라진 황금빛 페스카즈뿐이었다.
“…….”
강우는 묵묵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제 그가 <피바라기>의 새 주인이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