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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1화 (2/186)

[1화] 검은 옷을 입은 헌터 (1)

2024년 11월 11일.

세상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훗날 <균열>이라 불리게 될 미지의 구멍이 등장한 것이다.

허공에 피어난 <균열>은 마치 블랙홀과 같아서, 어두운 형태만 존재할 뿐, 그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게 뭐지?”

“꼭 CG 같은데?”

“가상현실인가?”

처음 <균열>이 발생했을 때만 해도 큰 혼란은 없었다.

갑자기 생겨난 싱크홀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겁도 없이 <균열>에 들어간 사람들이 하나둘 실종되자, 정부는 즉각 주변을 통제하고 수색대를 투입했다.

『정체불명의 홀(Hole)에 투입된 특수부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김 중사는 현재 중태로……』

결과는 처참했다.

수색대가 나흘째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유일한 귀환자인 김 중사만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균열>을 빠져나왔다.

김 중사는 정신을 잃었지만, 그가 차고 있던 캠코더만은 멀쩡했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영상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도무지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붉은 피부와 제멋대로 뻗은 뻐드렁니.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붉은 괴인들이 부대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놈들은 몽둥이로, 창으로 인정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고, 부대원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무참히 살육당했다.

『끄아악!』

『사, 살려 줘!』

서른에 달하던 수색대가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6분 남짓.

그마저도 놈들이 유희를 즐겼기 때문에 늘어난 시간이었다.

정부는 그 영상을 숨겼지만, 이미 전 세계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괴물의 영상은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고, 혀를 내두를 만치 끔찍한 참상에 세상은 경악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구멍과 그 안에 득실대는 괴물들.

매스컴은 연일 괴물에 대해 떠들었으며, 인터넷과 술집에선 그 정체에 대한 사람들의 설전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 각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방치된 <균열>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놈들은 인간의 안일함을 벌하기라도 하듯 도시를 부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때까지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대던 한국 정부는 뒤늦게야 군대를 파견해 괴물에 맞섰지만, 놈들은 강하고 수도 많았다.

게다가 초창기에는 <균열>이 더 빠르게 생겨났으므로 세계는 끝없는 전투로 점점 폐허로 변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인류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제가… 제가 아니게 된 것 같습니다.”

중태에 빠져 있던 김 중사가 깨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에 없던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오늘날 각성자라 불리는 초인의 등장.

사람들은 그를 최초의 각성자라 불렀고, 김 중사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괴물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의 능력은 한 개 여단을 능가할 수준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각성자는 우후죽순 생겨났다.

“균열은 다양합니다.”

인간들은 <균열>에 대해 하나둘 알아 가기 시작했다.

일관된 외관과는 달리, <균열>의 내부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동굴인 경우도, 탑의 내부인 경우도, 심지어는 뜬금없이 설원이나 사막인 경우도 있었다.

<균열>은 이세계와 지구를 잇는 일종의 통로와 같았다.

두 번째 <균열>을 처리한 김 중사가 말했다.

“균열 속 보스를 죽이면, 균열은 자동 소멸합니다.”

비록 김 중사는 여섯 번째 레이드 도중 사망했지만, 그의 경험담은 인류에게 귀중한 자산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세계는 각성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모든 게 불과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 * *

빵빵!

강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도심 거리에 서 있었다.

양옆으로 줄지어 선 빌딩과 이제 막 빨간불로 변한 신호등.

조금 전까지 자신을 베던 헌터들도, 조롱하듯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도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그것이 조금 전인지, 아니면 수년, 수십 년 전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강우는 감쪽같이 정신을 잃었다.

“빨리 안 꺼져?! 길 처 막고 뭐 하는 거야?!”

그때, 요란한 경적과 함께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강우가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노란색 구형 포르쉐가 보였다.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 포르쉐 운전자가 험악하게 소리쳤다.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그제야 강우는 자신이 횡단보도 한가운데 서 있음을 깨달았다.

“다음엔 확 밀어 버린다!”

묵묵히 인도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남자는 소리를 질렀지만, 강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우두커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조악한 싸구려 정장과 밤새 닦은 듯 빛나는 검정 구두.

손에는 갈색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

강우는 천천히 봉투를 열어 그 안을 확인했다.

그러자 낯익은 지원서가 나왔다.

『신라 길드 지원서 ― 한강우』

‘신라.’

익숙한 이름이었다.

자신이 무려 8년간 몸담은 길드.

강우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눈앞의 빌딩을 올려다봤다.

그 역시도 익숙한 건물이다.

이름이 태산 빌딩이던가.

훗날 세계 1위 길드로 명성을 날리는 신라 길드도 첫 시작은 이 빌딩의 5층 한구석이었다.

그때, 진동이 일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을 알리는 경고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날짜는 2031년 4월 20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오늘은 강우가 신라 길드에 입단하는 날이자, 석탈해를 처음 만나는 날이니까.

‘과거로 돌아왔다.’

핸드폰과 함께 연둣빛 광물도 끌려 나왔지만, 당장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우는 서둘러 달려가 빌딩 유리 벽 앞에 섰다.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과 말끔한 얼굴.

몇 달간 쫓기던 피폐한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른세 살의 한강우는 사라지고, 스물다섯 살의 한강우가 서 있었다.

‘정말로…….’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지금 해야 할 일만은 분명했다.

강우는 들고 있던 지원서를 북북 찢어 가로수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기억을 더듬으며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스물다섯 살의 그가 살던 곳을 향해.

* * *

‘헉, 헉…….’

정류장에서부터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에 앞머리와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의 몰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정말로…….’

강우는 멍하니 낯익은 골목을 둘러보았다.

연신내의 한 주택가.

양옆으로 잔뜩 들어선 빌라들 가운데, 20대의 자신이 살던 집이 보였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빌라로 다가갔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낡은 계단.

이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그가 살던 자취방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장혜진.’

사랑하는 그녀가 있었다.

스무 살 철부지 한강우 때부터 저승사자 한강우가 될 때까지.

그 과정을 모두 보아 온 사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사람.

강우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발소리조차 조심하며 올라갔다.

똑똑.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있지만, 강우는 굳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려올지도 모르는, 그 그리운 목소리를 기대하며.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쿵쾅거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강우는 결국 도어록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끼이이익―

낡은 문이 쓸쓸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강우는 조심스럽게 문 너머를 살폈다.

이부자리가 아무렇게나 펼쳐진 침대와 잡동사니로 가득한 책상, 그리고 방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커다란 6인용 밥통.

분명 20대의 한강우를 지켜 준 보금자리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그녀만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도 비어 있었다.

‘아, 핸드폰!’

조급함에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뒤늦게 핸드폰이 떠올랐다.

강우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 목록을 살폈다.

아직 기대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없다.’

아무리 살펴도 그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 * *

과거로 돌아온 지 삼 일째.

처음 하루는 멍하니, 다음 이틀은 인터넷 기사를 살피며 보냈다.

굶주림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진 않았다.

‘혜진이는… 없다.’

이틀간의 조사로 강우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알던 장혜진은 없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과거 알고 지내던 몇몇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신라 길드의 창설 기사를 살펴봤지만, 창단 멤버도 태반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죽은 사람을 돌이키는 데는 한계가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떠오르는 가정은 그것뿐이다.

사흘간의 무력감은 거기서 오는 허탈함 때문이었다.

― 그렇게 되면 넌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 끝내 웃지 못할 것이다.

― 불행해질 것이다.

혹, 그때의 말들은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일까.

하지만 강우는 무너지지 않았다.

혜진이가 없고, 매미가 없고, 동료들이 없지만, 적어도 이곳에서의 자신은 살인자도, 배신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석탈해가 있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강우는 죽기 직전 새긴 다짐을 되새겼다.

‘석탈해, 석철, 호공.’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자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놈들에게 복수하기 전까진 절대 무너질 수 없다.

결심을 마친 강우의 시선이 빨간 6인용 밥솥에 닿았다.

언젠가 혜진이와 마트에서 받아 온 경품.

쥐고 있던 번호가 불리던 그 순간부터, 택시비가 없어 낑낑대며 밥통을 안고 오던 때까지.

그때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들에게 멋진 배경을 선물해 준 그날의 황혼마저도.

― 안 힘들어? 내가 저기까지만 들어 줄까?

― 됐네요. 네 남자 친구 이제 각성자거든? 일반인의 몸이 아니다, 이 말이야. 하물며 이런 밥통쯤이야.

― 아유, 너무 영광이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 3일 차 헌터 씨. 저랑 만나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잘할 테니, 부디 어디 가지 말고 제 옆에 꼭 붙어 있어 주세요. 알겠죠, 한강우 씨?

― 크크크, 너 하는 거 봐서!

― 뭐어~? 이게 맞춰 주니까 한도 끝도 없이 기고만장하네, 아주?

― 하하하! 알았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한눈 안 팔고 네 옆에만 꼭 붙어 있는다! 됐지?

― 무슨 일이 있어도?

―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 말만이라도 기분은 좋네. 빨리 가자. 나 배고파.

― 정말이라니까!

‘…….’

밥솥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강우의 가슴 한가운데로 찌르르르, 풀벌레 울음 같은 작은 떨림이 스쳤다.

어째서 이건 남아 있는 걸까?

강우는 그리움 물씬한 눈길로 전기밥솥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기다려 줘, 조금만.”

그날 밤, 강우는 밥솥으로 밥을 짓고, 냉장고에서 오랜 반찬들을 꺼내 먹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먹는 첫 끼니였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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