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헌터
프롤로그
피가 흐른다.
짙은 피비린내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다.
흘러내린 피가 금세 웅덩이를 이루고, 장난감처럼 떨어진 팔다리들이 경련하며 생의 마지막 미련을 태운다.
사방이 온통 시체뿐이다.
수백에 이르는 주검 사이에 남은 생자(生者)는 오직 하나뿐.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한강우가 원망스럽다는 듯 묻자, 홀로 수백 명을 몰살시킨 남자가 웃었다.
한때는 강우가 좋아하던 미소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다.
세계의 선물이라 불리던 그가 여전한 미소로 답했다.
“재밌잖아.”
‘재미…….’
고작 그런 이유란 말인가.
수년을 함께한 동료들을 무참히 죽인 이유가 고작 재미라는 말로 해명될 수 있는 걸까.
강우는 <피바라기>를 불끈 쥐었다.
수천수만 마물의 피로 물든 페스카즈.
그를 오늘날 ‘저승사자’로 만들어 준 단검이었다.
“석탈해!”
<피바라기>를 역수로 쥔 강우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갔다.
놈은 명실상부한 세계 1위인 신라 길드를 일격에 반파시킨 놈.
그런 놈을 강우가 이길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지만,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저놈의 입가를 찢어 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으니까.
“어딜.”
하지만 강우의 일격은 석탈해의 양옆에 서 있던 두 악마에 의해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좌천랑 석철, 우천랑 호공.
신라 길드에 속해 있진 않지만, 그간 그들을 물심양면 도운 석탈해의 동료들이었다.
호형호제하며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가깝던 자들인데…….
결국 두 놈도 석탈해와 한패에 불과했다.
강우의 <피바라기>를 철퇴로 튕겨 낸 거구의 석철이 조소하며 말했다.
“보기 좋지 않구려. 강 형의 피바라기가 이토록 가벼웠나?”
“너, 이 새끼!”
분노한 강우가 다시 <피바라기>를 들었지만, 아무리 빠르게 휘둘러도 칼날은 놈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두루마기를 걸친 호공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낄낄대는 사이, 보다 못한 석탈해가 말했다.
“그만.”
타앗!
놈이 손가락을 튕기자, 강우는 거짓말처럼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려 해도 몸에 쇳덩이라도 들러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강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간 놈들은 힘을 숨겨 온 게 분명했다.
‘대체 왜? 어째서?!’
강우가 분통을 터뜨리는 사이, 석탈해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도포를 펄럭이며 웃었다.
“더 발악해라. 더 좌절하고, 더 칼을 갈아. 넌 유일하게 내게 재미를 준 인간이니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소리이지만,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놈들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연기가 되어 사라지던 석철만이 한마디를 건넸을 뿐이다.
“강 형, 건강하시오.”
“석탈해―!”
공허한 고함만이 잿빛 공동에 메아리쳤다.
최후의 전장이라 불리던 <바벨탑>.
석탈해는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인류를 배신했다.
‘놈의 배신을 알려야 한다.’
반드시 놈들을 죽이고, 동료들의 복수를 해야 했다.
자신을 살려 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건 강우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인류를 구원해 줄 최후의 도전이 단 한 사람, 아니, 한 악마의 손에 의해 좌절됐습니다.』
『저승사자 한강우의 배반으로 신라 길드에 균열이 생기고, 결국 마물들에 의해…….』
『정부는 한강우의 헌터 자격을 박탈하고, 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해 수배령을…….』
탑을 벗어났을 때, 강우는 이미 살인자가 돼 있었으니까.
그것도 인류를 배신한 벌레만도 못한 살인자가.
『한강우는 악마다! 잡아서 사지를 끊어라!』
『경기도 하남 부근에서 놈을 봤습니다!』
그날로 강우는 도망자가 되었다.
국내 수십 개의 길드가 그를 쫓고, 심지어 전 세계 헌터들이 그를 잡기 위해 자진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그를 악마라 부르고,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 욕하며 침을 뱉었다.
하지만 강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앞이 막히면 부쉈고, 막으면 베었다.
그게 설사 평범한 일반인일지라도.
<피바라기>에는 단 한시도 피가 마르지 않았다.
이젠 살인자라 불려도, 배반자라 불려도 좋았다.
놈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반드시 네놈을 죽여 주마.’
그러나 한 달이 흐르고, 두 달이 흐르고… 넉 달이 흘러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벌써 천여 명의 헌터가 <피바라기>의 제물이 됐지만, 도무지 석탈해에게만은 닿을 수 없었다.
『4월 22일. 한강우의 부인이라 알려진 장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간 그녀는 한강우의 무죄를 주장했는데요, 그에 따른 비난을 계속 받아 왔습니다. 주민들에 의하면, 주변 상인들도 그녀에게 물건을 팔지 않고, 배달 기사들도 그녀의 집에 배달하기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강우가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은 건 그녀가 죽고도 2주가 지나서였다.
‘아아…….’
장혜진.
사랑하는 나의 아내.
수개월간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채 강우는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십 년 넘게 함께한 그녀를 잊고 산 것이다.
『뒤늦게 그녀가 사망 당시 임신 8개월 차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는데요. 경찰은 이번 사건을 살인으로 봐야 하는지…….』
그녀의 배 속에 있던 작은 생명마저도.
이제는 희미해진 그 이름을 강우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매미.’
그래, 아이의 이름은 매미였다.
어느 여름밤에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
어서 세상 밖으로 나와 세차게 울길 바라며 지은 태명이었으나, 아이는 끝내 매미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강우는 마치 자신이 땅속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세상의 모든 의미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날 밤, 강우는 처음으로 좌절했다.
희망도, 어떠한 기대도 남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희대의 살인마이고, <바벨탑>의 유일한 생존자인 석탈해는 여전히 ‘세계의 선물’이라 불리며 연일 매스컴에 얼굴을 비쳤다.
놈이 스크린 너머로 말했다.
『한강우, 아직 신라 길드는 죽지 않았다. 내가 살아 있으니까. 반드시 네놈을 죽여 길드원들의 한을 풀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 잘 살아 있어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결국 강우는 무너졌다.
그는 너무 지쳤고, 굶주렸으며,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세상에 권선징악 따위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 또한 하나의 권선징악일지도.
그간 뒤집어쓴 수많은 피가 보이지 않는 거머리가 되어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끊어진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찾았다! 악마 놈이 여기에 있다!”
“죽여!”
“카메라! 카메라!”
누군가가 가슴을 찌르고, 종아리를 베었다.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 머리를 때렸다.
‘…혜진아.’
그렇게… 강우는 전 세계 수십억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죽어 갔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이름 모를 헌터들에 의해 온몸이 처참히 찢겨 나갈 때, 수십 개의 목소리가 강우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살고 싶으냐?]
[복수하고 싶으냐?]
[피를 원하느냐?]
…….
천상의 목소리 같기도,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저 멀리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군중 속에서 몰래 자신을 지켜보는 붉은 눈의 사내.
분명 놈이었다.
멍하니 놈을 보던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고 싶어.’
석탈해.
놈을 죽이고 싶다.
눈알과 혀를 뽑고, 그 심장을 도려내 몇 번이고 씹어 삼키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을 텐데.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렇게 되면 넌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끝내 웃지 못할 것이다.]
[불행해질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강우는 대답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으니, 망설임 따윈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강우는 정신을 잃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