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350화>
* * *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하늘이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설령 몸이 무겁다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이라면 그런 무게 따위야 가볍게 이겨 낼 수 있지만 어째서인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축축하다.
손으로 만져 보고 들어 보자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오는 게 보였다.
침을 삼키자 마치 편도가 부은 것처럼 목이 욱신거렸다.
“쿨럭.”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눈을 주변으로 돌리자 자신이 차가운 땅 위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서 마인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마인들에게 죽고 지구로 돌아갔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누워 있는 거지?
지구에서의 기억.
설마 그 모든 게 한낱 꿈이었다고?
피를 얕게 뿜었다.
마비되어 있다고 느꼈던 고통들이 몸을 찌른다.
그사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마인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고요함 속에서 바람 소리만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성의 입에서 웃음이 흘렀다.
지구로 돌아가 마침내 세계를 정상화시켜, 이제 아주 여유로운 평화만이 남은 그 순간,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고?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민성은 다시 움직이려고 애썼다.
악마가 원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성은 악마가 원하는 대로 되어 줄 생각이 없었다.
잘못 짚었다.
만약 지구에서 살았던 모든 시간들이 꿈이었다면, 그 꿈으로 인해 적어도 자신은 죽어 있던 마음이 치유되었다.
처음 여기 벼랑 속으로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을 놓았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만약 그 모든 순간들이 달콤한 꿈에 불과했다면, 절망이 아니라 자신은 그 꿈을 가슴에 품고…….
민성의 눈이 번쩍였다.
존재하는 모든 마인들을 죽여 줄 것이다.
민성은 어금니를 바드득 갈면서 산산조각이 난 것만 같은 몸을 일으켰다.
벌벌 떨리는 몸으로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고통은 생생했다.
전신에서 출혈이 흐르고 있다.
피가 너무 많이 빠져서 의식은 또렷하지가 않았고 호흡은 거칠었으며, 다리에 힘이 없어 흔들리는 걸음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민성은 울퉁불퉁한 벽을 짚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걸었다.
지독한 고통을 참으며 걸어간 끝에 민성은 기적을 볼 수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마계에 샘물이 있었던 것이다.
민성은 그것을 보자마자 철퍽 무릎을 꿇고 머리를 담근 다음 물을 꿀꺽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푸우우!”
젖은 머리를 털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계에 샘물이 있다는 것에 여전히 놀라 있던 민성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직면한 현실에 대해서 먼저 생각했다.
몸 여기저기가 찢겨져 있고 구멍이 나 있었다.
마인들의 무기가 온몸을 헤집은 탓이다.
이 상처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몸 상태로는 마인들과 싸울 수 없었다.
이대로는 검을 들기조차 버거울 터였다.
어떻게 치료할지 궁리하던 민성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군.
마계에서 치료라는 걸 해 본 적은 없다.
늘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자신은 늘 죽지 않았고, 느리지만 치유되었으며 또다시 마인과 싸워야 했다.
민성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남아 있는 소량의 마기를 운용했다.
마기가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몸이 치료되기 시작했다.
샘물을 먹은 것이 아주 효과가 컸다.
샘물은 마치 포션처럼 몸을 회복시켜 주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출혈이 멈추고, 피는 굳었으며 찢어진 상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민성은 그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고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 했다.
그 결과 약 80퍼센트 이상의 회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머지의 회복은 그 회복 속도가 너무 더딘 탓에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몸을 움직이고 마기를 쓰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듯했다.
민성은 가부좌를 풀고, 한 번 더 샘물에 머리를 박았다.
첨벙.
꿀꺽, 꿀꺽!
젖은 머리를 들고 곧바로 일어 섰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 민성은 절벽의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였으나 이미 몸을 회복한 민성에게 이러한 절벽의 높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뒤로 물러났다가 그대로 땅을 차고 뛰었다.
단숨에 절벽 위로 솟아오른 민성이 절벽 위의 지상에 착지하면서, 주변을 훑었다.
말라 비틀어진 나무들이 보였고, 죽은 땅들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민성은 자신이 죽인 마인의 시체가 손에 쥐고 있는 검 한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마인 시체의 팔을 콱 밟은 후, 손을 뻗자 시체가 들고 있던 검이 민성의 손으로 자석처럼 철썩 날아와 붙었다.
민성은 한기가 풀풀 날리는 눈으로 마인들을 쫓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 절벽에서 마인들에게 죽어 준 것은 권태로움 때문이었다.
끝나지 않는 마계의 생활에 지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고, 그 꿈 덕분에 다시 마인을 죽일 수 있는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민성은 이곳 마계에서 단 한 마리의 마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만약 몽마가 찾아와 그러한 달콤한 꿈을 꾸게 한 것이라면, 만나서 말해 주고 싶었다.
실수한 거라고.
그리고 그 몽마마저 죽여 버릴 것이다.
그 꿈 덕분에 물러서는 법을 완전히 잊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자신에 의해 마인들이 멸족하는 것이며 이 마계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민성은 검을 꽉 쥐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더운 바람을 타고 흐르는 썩은 시체 냄새.
그래.
이게 진짜 마계다.
마계의 잊고 있었던 아주 익숙한 기억이 다시 피부로 전해져 온다.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싸그리 죽여 주마.
민성이 땅을 차고 뛰는 순간, 마인들조차 육안으로 쫓기 힘들 만큼의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민성은 마계의 땅을 가로지르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지구에서 얻은 오러와 권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지?
민성은 자신의 몸에 여전히 아주 강대한 힘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기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 마인을 죽이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속도가 빨라진 만큼 마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계의 몬스터를 뜯어 먹고 있던 마인들이 민성을 보고서 경악하며 도망가기 시작했으나, 그들이 민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도망가던 마인들의 무리가 일격에 잘려 나가며 피를 뿌렸다.
마인을 죽이는 것은 마치 슬라임을 죽이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지금의 힘이라면, 마계에 존재하는 전 마인 부대가 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민성은 혹시나 싶어 죽어 버린 마인 하나에게 부활 권능을 사용해 보았다.
예상대로였다.
마인은 그대로 부활하여,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성은 그것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검을 내지르자 어리둥절해하던 마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만약 힘과 권능이 그대로라면, 굳이 마인들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었다.
민성은 제자리에서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땅에 박아 넣으며 오러를 주입했다.
그러자 민성이 박아 넣은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균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 균열은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민성은 마계의 별 자체를 단번에 터트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자 마계의 멸망을 두려워한 마인 군대들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지진처럼 땅이 갈라지고 부서져 가고 있는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마인들과 마신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는 게 이제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성은 땅에 박았던 검을 뽑으며 검을 휘둘렀다.
마계에서 검은 학살자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한 수준에 이른 민성이 마인들을 검으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괴성을 지르며 민성에게 달려드는 마인들은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보였다.
달려드는 족족 활활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지듯 마인들과 마신들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민성의 털끝 하나를 스치지 못하며 죽어 나갔다.
그러한 민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인과 마신의 시체가 산을 이루듯 쌓여 나갔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마인들이었지만, 권능의 힘을 가진 민성의 무위는 그 끝이 없는 마인들을 결국 다시 도망치게 만들 정도였다.
민성이 도망치는 마인들을 뒤쫓아 검을 휘둘렀다.
도망치던 마인들이 힘없이 날개가 찢기고 몸이 반토막나거나 터지면서 모두 죽었다.
바닥에 쌓이고 쌓인 마인들의 시체를 밟고 걸으며 민성은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마인들의 시체가 땅을 찾기 힘들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인들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민성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마인들의 시체를 치워 낸 다음 그 땅에 검을 내려 박으려 했다.
그러나 검은 마계의 땅에서 1센티미터가량 박힌 후 멈춰, 더 이상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민성은 피로 물든 얼굴을 들어 마계의 하늘을 쏘아보았다.
이번에도 마계를 지키려 하는 것은 대주신의 짓이 틀림없다.
“균형? 이 쓰레기 같은 세계가 무슨 균형을 만든단 말이냐!”
민성이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목소리로 마계의 하늘, 아니, 대주신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대주신은 마계를 없애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민성의 검으로부터 마계를 지키고 있었다.
민성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피식 웃었다.
민성은 지친 듯이 축 처진 채로, 머리를 들어 다시 마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계를 지키고자 하면서, 어째서 나의 권능과 힘은 거두어 가지 않는 거지?”
대답 없는 공허한 마계의 하늘을 보며 민성은 말라비틀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뭐야?”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민성은 마인들의 시체를 밟으며 터덜터덜 걸었다.
멍한 얼굴로, 초점 없이 비틀거리며 얼마나 걸었을까.
말라지고 깨진 평평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민성은 정처 없이 계속해서 마계의 땅을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채 의식 없이 걸음을 옮기던 중 민성의 귀에 어떠한 한 소리가 들려왔다.
민성은 그 소리에, 다시 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걸음을 멈추며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구덩이가 있었다.
그 구덩이를 내려다보자 마치 아기를 닮은 새끼 마인 9마리가 마치 엉겨 붙은 채로, 꿈틀 거리고 있었다.
민성은 그 새끼 마인들을 보며 눈에 눈물이 맺혀 들었다.
민성이 울분이 섞여 든 얼굴로 새끼 마인들을 향해 마기를 담은 검을 내려찍는 그 순간, 섬광과도 같은 새하얀 빛이 민성의 눈앞을 가득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