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309화>
주신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은 마치 괴사하듯이 망가지고 있었다.
검은 마기는 마치 암 덩어리처럼 달라붙어 있었고, 힘과 권능을 벨드에게 넘겨주면서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는 주신들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대열이 무너지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주춤거리고 있는 주신들을 보면서 헬카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지금 장난하는 건가?”
헬카드는 주신들이 벨드에게 권능과 힘을 넘겨줬던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당하는 주신들을 보고 있자니 이 모든 게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난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 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헬카드는 짙은 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어처구니가 없군.”
헬카드가 살기를 담아 검을 다시 들어 올리자 금발의 신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봉인에서 날 깨운….”
헬카드가 말을 잇던 중.
금발의 신이 금빛의 안광을 뿜었다.
헬카드의 발아래 금빛 천계 문양이 그려졌다.
마법진과는 전혀 그 성질이 다른, 신의 권능이다.
또한 그 권능은 단순히 금발의 신이 만들어 낸 권능의 힘이 아니었다.
헬카드에게는 전대 대주신이 결계를 걸어 놓았다.
전대 대주신은 그의 마기가 결계라는 둑을 뚫고 나올 수 없도록 단단히 막아 두었고, 그 결계는 금발의 신이 가진 권능의 힘에 의해 더 단단한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헬카드는 급격히 마기가 소실되고 몸이 꽝꽝 얼어붙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헬카드의 표정이 찌그러진 캔처럼 뒤틀리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헬카드의 눈에서 검은 빛이 쏟아져 나오며, 그의 전신에서 검은 마기의 오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헬카드가 가진 존재감이자 특유의 색깔일 뿐, 발출되는 힘은 아니었다.
헬카드는 금제(禁制)에 의해 마치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분노만을 표출했다.
금발의 신은 그런 헬카드를 보며 눈살을 구겼다.
“믿음이 부족한 건 마족 계열의 종족 특성이라 해 두더라도, 대화를 위해 서로간의 신뢰를 만들고자 함에 있어 감정이 앞서면 되겠습니까?”
헬카드가 이를 으드득 소리 나게 갈면서 금발의 신을 노려보았다.
금발의 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금발의 신이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거절한다면?”
헬카드가 이죽거리며 되물었다.
“다시 관 속으로 들어가셔야죠.”
금발의 신이 담담히 말했다.
헬카드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문양과 글자를 내려다보며 쿡쿡 웃었다.
“네놈이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하게 설쳤는지 알 만하군. 하지만 말이야…….”
축 늘어져 있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헬카드가 얼굴을 들어 금발의 신을 똑바로 보았다.
“나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네놈들이 지금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내가 직접 알려 주도록 하마.”
헬카드가 괴기스럽게 웃었다.
굴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금발의 신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다시 봉인하기 위해 손을 써야만 했다.
금발의 신이 신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리자 금제로써 포박되어 있다시피 한 헬카드의 몸에 엄청난 압박이 전해졌다.
금발의 신이 헬카드를 봉인하기 위해 천계의 봉인서를 꺼냈을 때.
헬카드가 기다란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신체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금발의 신은 놀란 눈으로 헬카드를 보았다.
헬카드는 마치 뱀처럼 탈피를 하듯 자신의 피부를 벗겨내고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금발의 신이 당황한 눈초리로 헬카드가 사라진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뭔가가 반짝이는 듯했고, 이내 그 찰나의 시간을 지나 헬카드가 검을 들고 금발의 신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금발의 신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내려오는 헬카드를 향해 빛의 장막을 펼쳤지만, 헬카드는 간단하게 그 장막을 깨부쉈다.
헬카드가 웃는 것처럼 입을 쩍 벌렸고, 그대로 어깨를 씹어 버리기 직전.
파아아아앗!
금발의 신을 비롯한 주신들이 마치 빛의 파편처럼 흩어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헬카드는 기다란 혀를 낼름거리며 주신들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주변을 훑어보며 킬킬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헬카드는 자신이 누워 있었던 관과 자신을 봉인시켰던 비석의 파편과 쇠사슬을 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아주 오랫동안 묵은 헬카드의 감정이 웃음소리로써 마계의 땅에 울려 퍼졌다.
* * *
“헌터님, 식사하시죠.”
이호성이 민성에게 음식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무겁던 민성은 식사 시간이라는 말에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던 무게와 그늘을 일단 뒤로 제쳐 두었다.
주방 식탁으로 가자 아주 매운 냄새가 코를 훅 찔러 왔다.
자리에 앉기 전부터 입안에 침이 고여 있을 정도였다.
민성은 자리에 앉아, 이호성이 준비한 메인 메뉴를 눈에 담았다.
주꾸미 볶음이다.
국물을 깔고 그 위로 야채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꾸미 그리고 그 위에 뿌려져 있는 깨는 그 비주얼이 가히 환상적이다.
민성은 젓가락을 들고 아주 오랜만의 식사를 시작했다.
하얀 쌀밥을 먼저 먹고 양파와 파 그리고 메인인 주꾸미를 같이 집어 입안으로 쏙 넣었다.
달달하면서도 매운 양념이 입맛을 확 살려 주고 주꾸미의 통통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너무 맛있다.
아삭아삭한 양파는 단맛과 더불어 느끼함을 싹 잡아 주고 향긋한 향을 만들어 냈다.
민성은 곧바로 깻잎 한 장을 들어 그 위에 밥과 주꾸미, 그리고 쌈무를 같이 싸서 입에 가져가 크게 물었다.
우물우물!
쌈무가 시원하게 씹히고 매운 쭈꾸미의 맛이 몸을 후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깻잎의 고소한 맛과 더불어 매운맛의 뜨거운 열기가 입 밖으로 김을 뿜게 만들고 몸을 뜨겁게 만든다.
매운 맛은 스트레스를 날려 주는 효과가 있었다.
무거운 머릿속과 뻐근한 몸을 풀어 준다.
민성은 매운맛과 주꾸미의 식감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식사에 집중했다.
순식간에 쌀밥은 자취를 감추어 갔고, 딱 먹기 좋은 만큼 준비된 주꾸미 역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호성과 장웅이 만든 주꾸미 요리는 어떠한 맛집을 가도 이만큼 맛있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했다.
* * *
금발의 신과 주신들은 천계로 되돌아왔다.
금발의 신은 분노로 인해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으며, 주신들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이 줄을 잇고 있었다.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한 주신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말은 다른 주신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금발의 신은 전처럼 미소를 짓거나 여유로운 표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주신들 또한 미칠 노릇이었다.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헬카드는 금제에 걸려 있으니 그 결계만 단단히 쥐고 흔든다면 헬카드를 잘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주신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결국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오판이었다.
헬카드는 간단히 금제를 벗었다.
헬카드라는 존재가 붕인을 풀어내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헬카드는 분명 인간계에 있는 인간을 죽이고 마계의 군주 자리를 다시 탈환하게 될 겁니다.”
한 주신의 말에 금발의 신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 주신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헬카드가 다시 마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지금이라도 대주신에게 현 사태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마계와의 전쟁, 아니, 헬카드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다른 주신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금발의 신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금발의 신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신들이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금발의 신을 보았다.
“그럴 수는 없다니요? 그럼 이대로 헬카드가 다시 마계의 군주로써 자리를 잡는 걸 지켜보자는 얘기입니까?”
한 주신이 금발의 신에게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금발의 신은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치우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헬카드의 봉인을 해제하는 건 대주신의 허락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주신들이 모여 있던 장소가 냉각되었다.
“대체 그게 무슨…….”
금발의 신이 말했지만, 주신들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대주신께서 허락을 했다고 해도, 일이 잘못 풀렸으면, 그건 대주신의 허락이 있었던 게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제야 주신들의 금발의 신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공한다면, 대주신의 명령이 될 수 있지만, 실패하면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있다.
대주신은 책임으로부터 벗어난다.
결국 금발의 신은 규율 밖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금발의 신이 짙게 한숨 쉬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일이 실패했다는 것이죠.”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주신들이 절망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금발의 신을 보며 나약하게 어깨를 떨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여기 모여 있는 주신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천계 관리자인 당신이 대표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가장 대의를 위해서라도…….”
한 주신이 눈치를 보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고.
금발의 신은 피식 웃었다.
“마계로 들어가 봉인을 푸는 데 여러분들도 함께했다는 사실이, 단순히 저 혼자 뒤집어쓴다고 끝날 문제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들 하시는 겁니까?”
주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달달 떨었다.
“조금 있으면 우리의 실패가 결국 대주신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대주신의 귀에도, 그리고 천계에도 헬카드가 깨어났다는 소문이 퍼지겠죠. 여기 계신 주신 여러분들 모두 책임에서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주신들은 참담한 상황에 눈을 질끈 감거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오로지 끔찍한 재앙밖에 없었다.
금발의 신이 그런 주신들을 보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일이 실패했으니 우린 천계 전체의 배신자가 되는 것은 물론 곧 벌어질 마계 전쟁에서 소모용으로 쓰이는 것으로, 결국 소멸하게 될 겁니다. 그 방법이 아니더라도 최악의 경우는 얼마든지 있죠. 최악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이미 결정 된 사안.”
금발의 신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주신들이 동시에 금발의 신을 돌아보았고.
“우리가 마계로 넘어가죠. 헬카드는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금발의 신이 주신들에게 타락 천사가 될 것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