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307화>
헬카드는 전대 마계의 주인으로서 천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악마였다.
전대 대주신이 소멸 전 절대 헬카드의 봉인을 해제시켜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런 헬카드를 깨우자니?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로밖에 치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금발의 신은 주변 주신들의 반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헬카드는 과거의 헬카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봉인 된 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이 흐른 만큼 마기도 옅어졌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란 말입니다.”
“하지만 놈은 다름 아닌 헬카드입니다. 빠른 속도로 마기를 회복하기라도 한다면…….”
“봉인에서 해제되면 거의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나약한 상태. 그러니 놈에게 일부 제약을 걸어 놓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봉인된 악마에게는 규율에 대한 제한이 없는 바,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발의 신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신들은 침묵했다.
그것은 곧 금발의 신이 말했던 내용을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 중이라는 뜻이었고,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주신들이 작은 소리로 서로 가까이에 있는 주신들과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금발의 신은 더욱더 진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 * *
비가 그쳤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먹구름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내일이면 아마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 듯했다.
민성은 마인들의 시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눈으로 훑었다.
이곳은 지구였지만, 마인이 죽어 있는 땅 위의 모습은 마계와 다를 바 없었다.
[마인의 죽음으로 마계의 기반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마계의 재건을 이룩하십시오.]
[마계의 기반이 약해질 경우 마왕은 소멸됩니다.]
마계의 주인이 된 이후로, 계속해서 경고 메시지가 머릿속을 쟁쟁 울렸다.
민성은 낯설게 들리는 그 메시지 중 마계를 잃게 될 경우, 마왕이 소멸된다는 것을 듣고 피식 웃었다.
돌이켜 보면 참 긴 시간이었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늙지 않았다.
지구로 돌아와,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늙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마계와 함께 소멸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하게 여겼던 그 마계를 완전히 제거하고 떠날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죽음이리라.
삼시 세 끼를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건 다소 미련이 남는 일이지만, 그동안 맛있는 음식을 참 많이도 먹었다.
민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가 서서히 닫혀 들었다.
이호성이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에 긴 숨을 내쉬었고, 민성은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레폰에게 이제 그만 마법벽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가지가 얘기를 전달해 주었고, 마법벽이 사라졌다.
민성은 이호성에게 힐러를 불러 바가지와 레폰에게 힐 치료를 하고, 이호성에게도 당분간 쉴 것을 명령했다.
마인들과 한차례 큰 싸움을 치렀던 주변에는 마인들이 죽은 이후로 검은 마기의 압박감과 살기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민성은 중앙 헌터 기관의 총군주인 김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에 대한 접근 및 조사를 차단할 것을 요청했다.
마인들의 사체는 바가지가 곧 회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금발의 신은 주신들을 이끌고 마계에 진입했다.
본래, 벨드가 천계에서 마계로의 진입을 차단해 놓았었지만,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그 차단은 해제되어 있어 편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새로운 마계의 주인이 이 마계에 별달리 마음이 없나 보군요.”
금발의 신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고, 그 말은 금발의 신을 뒤따라온 주신들에게 꽤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까지 워낙 강민성 하나 잡자고 실패한 피해들이 컸던 탓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제 마계의 주인까지 되어 버린 강민성이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무엇보다 권능과 힘을 대부분 벨드에게 넘겨 준 이후여서 강민성과 마주치게 된다면, 싸움까지 벌어지게 된다면 그건 주신들에게 있어 꽤 두려운 일이었다.
강민성이 주신들과 싸우자고 마음을 먹는다면 상황 상 불리한 건 천계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주신들은 혹여나 강민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심정이었지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직까지 강민성은 마계를 버리고 인간계에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언제 마계로 들어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상당히 불안한 부분이었다.
“이 근처일 텐데. 아, 저쪽이군요.”
금발의 신이 북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엔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앞에 쇠사슬에 묶여 있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비석에는 마계어로 ‘헬카드’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 이름 아래로 절대 봉인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신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비석을 주시했다.
그들은 직접 마계로 와서, 헬카드의 비석 앞에 섰음에도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표정들이었다.
오직 금발의 신만이 헬카드가 봉인된 비석을 미소 지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럼 무려 2만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던 이 봉인을 한번 풀어 볼까요?”
금발의 신이 비석에게 걸어가며 그렇게 말하자 주신들은 저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잔뜩 드리웠다.
금발의 신은 주머니 안에서 대주신의 축복이 깃든 장갑을 꺼내 들었다.
이 장갑이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였다.
장갑을 낀 금발의 신이 쇠사슬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정말 대주신의 허락이 있었던 게 확실한 겁니까?”
한 주신이 물었다.
그러자 금발의 신은 옅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물론이죠.”
금발의 신이 살기가 어린 눈으로 주신들을 쏘아보았다.
“이미 다 얘기가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표정들을 보니 탐탁지 않아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군요?”
쇠사슬을 향해 뻗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피하고자 하는 겁니까?”
주신들은 그의 눈빛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그럼 그만두죠. 저야 어차피 보고를 올리는 것이 임무. 지금까지 여기 계신 주신들께서 저지른 죄업에 대한 대가는…….”
“보, 봉인을 풀어 주십시오.”
“봉인을 풀어 주십시오.”
주신들이 저자세를 갖추며 침음을 섞은 채로 말했다.
금발의 신은 한심하다는 듯 주신들을 보며 짧게 한숨 쉬고선 대주신의 축복이 깃든 장갑으로 쇠사슬을 꽉 잡았다.
그러자.
콰지지지지지직!
엄청난 뇌전의 검은 벼락이 사방으로 번쩍거렸다.
주신들은 움찔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 쳤다.
헬카드에 대한 기록들은 여기 모여 있는 주신들을 벌벌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악마는 주신들을 이끌고 싸운 전대 대주신조차 소멸의 위기를 겪게 할 정도로 엄청난 전투 능력을 갖춘 마왕이었다.
어둠 그 자체라고까지 불리었던 마왕 헬카드의 봉인이 지금 풀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주신들은 금발의 신이 봉인을 풀어내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콰르르르르릉!
마계의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불덩어리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석의 주변으로 땅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갔고.
부르르르르르!
비석 뒤에 위치해 있던 바위가 진동하더니 이내.
콰아아아아아아앙!
바위가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나면서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금발의 신이 장갑으로 잡은 쇠사슬이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파르르르릇! 떨렸다.
금발의 신이 눈에서 마기에 의해 검은빛이 흘러나왔으나, 그는 이를 꽉 물고 천계의 권능을 손끝에 집약시키면서 쇠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콰드드드득!
비석에 금이 가면서 암흑석의 파편이 아래로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그것을 보고 금발의 신은 핏대를 세운 채로 웃음 지었다.
곧 헬카드의 봉인이 해제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였다.
금발의 신이 더 짙게 웃음 지었을 때-
쩌저저저적!
비석에 아주 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은 찰나였고.
쩌어억!
비석이 큰 조각으로 깨지며 쇠사슬이 금발 신의 오른팔에 촤르륵 휘어 감겼다.
비석이 깨지고 난 후, 바닥에 마치 먹물과도 같은 검은 마법진이 쫙 소리 없이 펼쳐졌다.
금발의 신은 고양감을 느끼는 눈빛으로 그 마법진의 중심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마법진의 중심으로 걸어갈 때, 그의 팔에 휘감긴 쇠사슬이 처럭처럭 하고 무거운 소리를 냈다.
악마의 문양을 하고 있는, 검은 마법진의 중심에 선 금발 신은 주신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준비가 됐냐는 눈빛을 보냈다.
주신들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금발의 신이 자신의 팔에 감겨 있던 쇠사슬을 집어 던졌다.
쇠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고, 금발의 신이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허공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공간이 찢어지면서, 곡괭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금발의 신은 떨어지는 곡괭이를 잡아 그대로 눈을 크게 뜨며, 검은 마법진의 중심을 내려찍었다.
퍼어어어억!
단 한 번의 곡괭이질에 악마의 형상을 닮은 검은 마법진의 문양이 뒤틀리는 듯 변하였다.
금발의 신은 멈추지 않고 곡괭이질을 계속했고, 검은 마법진이 완전히 망가지면서 이내 마법진이 새겨졌던 그 땅도 지진처럼 갈라지며 땅이 파여 나갔다.
12번째 곡괭이질을 했을 때, 사방으로 검은 땅바닥이 터져 나가며 나무로 된 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의 신은 그 관을 내려다보며 키득 웃고서 주신들에게 관 뚜껑을 열 것을 턱짓으로 명령했다.
주신들이 잠시 머뭇거렸다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서는 주신들이 관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조심스레 관 뚜껑을 열어, 바깥쪽으로 던졌다.
관 속에는 눈을 제외하고 전신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시체와도 같은 것이 누워 있었다.
그가 바로 2만 년 전에 봉인되었던 전대 마계의 주인, 헬카드였다.
주신들은 정말 전대 마계의 주인이었던 헬카드의 봉인을 풀게 되었다는 사실에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헬카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체에서 흐르는 자체의 마기가 사방의 숨통을 옥죄는 듯 강렬했다.
그러나 금발의 신은 그런 헬카드를 하찮게 내려다보며,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를 노려보며 그것을 쫙 찢었다.
새하얀 빛이 헬카드에게 스며들었고, 그 순간-
헬카드가 스르륵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