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88화>
그 어떠한 갑옷보다도 단단해 보이며 성스러워 보이는 붉은 비늘이 전신에 뒤덮여 있는 몸체.
날개는 세상을 덮을 듯 거대하게 펄럭이고 몸체와 연결된 긴 꼬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용의 형상을 띠고 있는 그 조화로운 형태의 완전체는 눈부시게 전율스러운 존재감을 표출했다.
고대의 전설 속에서나 존재할 것만 같았던 실물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일컬어지는 마법계 동물의 지존.
드래곤이었다.
“맙소사.”
이호성이 얼어붙은 채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지만, 민성은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드래곤이라는 본체를 드러낸 레폰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좀 할 만하겠네.”
민성이 궁니르S의 창대를 꽉 쥐며 말했다.
드래곤의 본체로 변한 레폰은 세로로 된 긴 동공으로 민성을 보며 날개를 퍼덕였다.
강풍이 불었고, 공중에 떠 있던 거대한 드래곤은 천천히 하강하여 지면에 앉았다.
“전력을 사용하여 12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면 이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레폰의 말에, 이호성은 숨을 삼키며 입을 꽉 다물었다.
절대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는 압도적인 포스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런 압박감을 받는 건 이호성뿐.
민성은 거대한 본체의 레폰을 올려다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내가 그렇게 두지는 않지.”
민성이 말했다.
레폰은 민성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기묘한 눈빛이었고, 그 눈빛 안에 스며든 감정을 보고 민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레폰이 천천히 머리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쿠-웅!
육중한 몸이 지면에 닿는다.
레드 드래곤 레폰이 민성에게 엎드리다시피 한 것이다.
그것은 굴복의 표시임이 틀림없었다.
강대한 마법으로 전면전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굴복을 표시했다는 것은 그만큼 민성을 인정했다는 뜻.
민성의 힘 앞에 스스로의 마법 능력이 무의미함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고, 그 자체로 굉장한 의미였다.
민성은 싸우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존재감만으로 드래곤을 삼킨 셈이었다.
또한 민성은 알고 있었다.
레폰이 단순히 공포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굴복을 표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콰르르릉!
민성이 천둥소리를 토해 내는 궁니르S를 바닥에 꽂았다.
그 순간-
시스템 문구가 나타났다.
[레드 드래곤 레폰이 천 년간의 주종 계약을 신청하였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승인 / 거절]
민성은 곧바로 승인을 터치했다.
그러자 마치 반딧불과 같은 푸른빛들이 떠다니며 레폰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고, 민성은 거대한 오러가 레폰을 중심으로 집약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번-쩍!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폭발했다.
이윽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전혀 예기치 못한 그림이 민성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호성이 뚜벅뚜벅 걸어와 민성의 옆에 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호성이 민성이 보고 있는 같은 방향을 보며 물었다.
민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이호성은 마치 귀신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곳을 보았다.
민성과 이호성이 보는 곳에는 아주 작은 새끼 드래곤으로 보이는 것이 눈을 감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놓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작아졌지?”
이호성이 눈을 깜빡이며 중얼 거렸다.
그때, 민성의 눈앞에 다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레드 드래곤 레폰이 주종 관계를 통해 시스템이 초기화되며, 스탯을 유지한 채, 새로운 랭크에 돌입…….]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간략히 줄이면, 레드 드래곤 레폰은 민성과의 특수 계약을 통해 새끼 드래곤으로 새로운 랭크 업 출발을 한다는 것이었고, 가진 스탯을 유지한 채 레벨 업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 설명을 듣게 되자 어째서 필요 이상으로 쉽게 주종 관계를 허락한 것인지에 대해 민성은 납득할 수 있었다.
드래곤은 인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명을 가진 생물체.
그들에게 있어 천 년이라는 계약 시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고, 강한 힘을 가진 민성과의 계약만으로도 레폰은 성장할 수 있는 폭이 무궁무진하였다.
사실상 레폰으로서도 굳이 손해 볼 일은 없는 것이다.
“헌터님?”
이호성의 부름에 민성은 방금 전에 알게 된 사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이호성은 납득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네요. 스탯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초기화된 랭크 업이라니……. 그나저나 아까 전만 해도 본체일 때 엄청 무서웠는데 이렇게 작아지니까 상당히 귀여운데요?”
이호성이 핏 웃으며 말했다.
“김지유에게 전화해서 상황 종결됐다고 얘기해.”
“아! 알겠습니다.”
이호성이 급히 휴대폰을 꺼내 김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통화를 하는 사이, 민성은 잠들어 있는 드래곤 레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레폰은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바닥에 꽂아 놓았던 궁니르S를 뽑아서 창대로 레폰을 툭툭 건드려 보았지만, 이 빨간 새끼 드래곤은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어느새 이호성이 다가와 민성에게 보고했다.
“헌터님, 총군주에게 상황 마무리됐다고 전달했습니다.”
민성은 무너진 대련장을 돌아보았다.
대련장 건물 전체가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주변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보상금 얘기는?”
민성의 물음에 이호성은 작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도 해 봤는데, 괜찮답니다. 헌터님한테 어떻게 청구를 하겠냐며 말이죠.”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자. 쟤 들어.”
민성이 턱짓으로 레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데려가야 할 거 아니야.”
이호성은 잠들어 있는 레폰을 보면서 식은땀 한 줄기를 흘렸다.
“제가요?”
“그럼 내가 들고 가리?”
“……괜찮겠죠? 계약자도 아닌데 함부로 손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살려 주면 되잖아.”
이호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살려 주시면 되긴 하죠. 근데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권능 아직 그대로 가지고 계실…….”
민성의 눈에 짜증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이호성은 더 이상의 군말 없이 레폰을 번쩍 들었다.
“오우! 엄청 무거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훨씬 가볍네요? 하하.”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이호성은 썩은 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드래곤이잖아요. 살다 살다 드래곤을 다 안아 보네요. 하하.”
이호성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다.
비록 외양은 새끼 드래곤이었지만, 능력은 12서클의 대마법을 가진 드래곤이었으니 이호성은 본능적으로 드래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민성은 알 바가 아니었기에 신경을 끄고 걸음을 옮겼다.
이호성은 드래곤을 품에 안은 채로 민성을 따라 뒤뚱 거리며 뒤따랐다.
* * *
“우와-! 진짜 대박! 완전 귀여워!”
“흠…….”
장시아는 커다란 머리에 작은 날개, 그리고 오통통한 몸통을 가진 레드 드래곤 레폰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넋을 잃었고, 장웅은 심각한 표정으로 레폰을 응시했다.
“셰프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이호성의 물음에 장웅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너무 진귀한 풍경이지 않은가? 드래곤이라니.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군, 허허.”
장웅이 헛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장시아가 이호성에게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만져 봐도 되는 거야?”
장시아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이호성을 보며 물었다.
“위험할 것 같으니까 그냥 지켜보는 걸로.”
이호성의 단호한 거절에 장시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레폰을 보는 순간 다시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성과 장시가 뒤쪽을 돌아보았고, 장웅이 레폰을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꽤 기념비적인 날이 아닌가?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으니.”
장웅이 껄껄 웃었다.
* * *
민성은 식탁 앞에 펼쳐진 빵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갖가지 종류의 빵들이 펼쳐져 있었다.
레폰과 전투를 하면서, 단 한시도 잊지 않았다.
이 빵을 먹고 싶다는 일념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전투가 끝나고 집으로 오기까지 계속되었다.
밥이 아니라, 간식이었기 때문에 식욕을 어느 정도 억제하고 참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극도로 배가 고픈 상황이었다면 그 예민함에 어쩌면 레폰을 죽였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조금 전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꽤 흘러 배고픔을 느끼게 된 이 시점에서는 식탁 위에 펼쳐져 있는 빵을 보자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민성의 모든 정신은 빵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것부터 먹어 볼까?
투명한 비닐을 뜯어서 안에 들어 있는 빵을 꺼냈다.
처음에 꺼내 든 것은 초코 소라빵이다.
소라를 닮은 귀여운 빵이며, 초코 소라빵이라는 이름을 가진 만큼 빵 안에는 초코 크림이 잔뜩 들어 있다.
민성은 보드라운 초코 소라빵을 들고 입을 크게 벌려 한 입을 먹었다.
푹신하게 씹히면서 동시에, 초코가 입안으로 팍! 터져 나왔다.
민성은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나다.
입안에서 초코가 터지는 감각은 그야말로 압도적.
그동안 단 것은 거의 먹지 않았던 민성이었다.
식사에만 치중되어 있었고, 간식 쪽은 아이스크림 말고는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탄수화물의 끝판왕인 빵, 그것도 초코가 들어간 초코 소라빵이 주는 충격은 상당했다.
보드라운 느낌과 더불어 단맛의 폭발은 뇌를 찌르르 울릴 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초코 폭탄의 소라빵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운 다음 민성은 다급한 손길로 다음 타깃인 피자빵을 집었다.
피자빵을 보는데 어째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일까?
엄청나게 맛있어 보였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앙증맞은 피자빵은 식욕을 대폭 증진시키기에 충분한 비주얼을 갖고 있었다.
민성이 비닐을 뜯었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피자빵이 민성의 손에 들렸다.
소시지와 야채가 어우러진 빨간 피자 소스가 섞여 있는, 그 먹음직스러운 피자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려는 순간.
“크왕.”
“……?”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피자빵을 먹으려던 걸 멈추고 소리가 나는 왼쪽을 돌아보았다.
언재 깨어났는지 주방 입구 쪽에 레드 드래곤 레폰이 앉은 채로 민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리를 흔들고 있는 레폰의 입에서는 붉은 불꽃이 파르륵 튀고 있었다.
“깨어났어요! 완전 신기하죠?!”
장시아가 주방으로 나타나며, 레폰이 귀여운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렸고, 이호성과 장웅도 나타나서 신기하다는 듯 레폰을 내려다보았다.
민성이 무시하고 다시 피자빵을 베어 물려는 때.
퍼드득! 하고 날개 소리가 났다.
레폰이 날갯짓으로 허공을 날아 민성의 빵이 늘어져 있는 식탁 위로 탁 올라섰다.
레폰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빵을 훑어보았다.
순간 민성의 가슴에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