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85화>
레폰의 물음에 이호성은 다소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베아트리체에서 오신 겁니까?”
그 말에 레폰은 이호성을 향해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이호성과 바가지는 서로를 쳐다본 후에, 다시 레폰을 보고서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됐다.
여긴 베아트리체가 아닌 지구였다.
이곳에 베아트리체의 플레이어가 왔으며 그가 민성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조금도 없는, 아주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이호성은 정신 바짝 차리기 위해 집중력을 올리며 레폰을 향해 어색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안내해 드릴까요?”
레폰은 이호성을 보며 진한 웃음을 얼굴에 머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호성은 레폰으로부터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투기를 발산하거나 살기를 내비친 것도 아닌데, 존재감 자체로만 목을 눌러 오는 중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민성을 제외하고는 겪어 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존재감이었다.
뚜벅, 뚜벅.
레폰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호성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레폰을 지켜보았다.
레폰이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호성의 코앞에 섰다.
그리고 빙긋 미소 지으며 턱짓했다.
앞장서라는 의미였다.
이호성은 등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하며 몸을 돌렸다.
앞서 걸으면서 이호성은 생각했다.
민성에게 그를 데려가는 것이, 이번 일을 가장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자극하지 않고, 이대로 안내한다.
안내만 하면, 강민성이 어떻게든 해결을 할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뭣 때문에 이토록이나 몸이 굳어진단 말인가?
특별히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닌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굉장한 압박감이 있다.
고위 랭커 플레이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무대가 베아트리체가 아닌 지구이기 때문에 느끼는 심리적인 위축일까?
이유야 어떻든 분명 범상치 않은 플레이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호성은 앞에서 걸어가면서 레폰을 흘겨보았다.
그는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뒷짐을 지고서 여유 있게 햇살을 즐기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 * *
아이리스 나무로 인한 피해를 우려하여 대피했던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거주지로 돌아왔고, 장사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걸 알고 있던 민성은 뭔가를 사 먹어 볼 요량으로 집 밖으로 나섰다.
장웅이 있기 때문에 식사는 그냥 집에서 먹어도 되지만 지구로 돌아오고 난 후로, 문뜩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었다.
바로 탄수화물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음식.
빵이다.
민성은 빵을 먹고 싶어서, 위치를 검색한 후에 빵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대형 P 브랜드 빵집이었고, 위치는 별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느긋하게 걸어갔다.
검은 마스크를 쓴 덕에 민성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덕분에 민성은 편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며 거리를 활보했다.
골목을 걷고 횡단보도 앞에 서자 건너편에 빵집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파란 간판을 보자 벌써부터 식욕이 솟구쳐 올랐다.
단순히 한 끼 식사를 하고 싶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는 새로운 식욕이다.
민성은 기대감을 갖고서 얼른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 끝에 신호가 팟! 하고 바뀌었다.
민성은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넌 뒤, 곧장 빵집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파란 모자를 쓴 어린 여자 알바생이 인사를 해 왔다.
민성은 입구 앞에 멈춰 서서 멍한 눈으로 빵집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입구 앞에서 굳어 버린 이유는 빵집 안에 진열되어 있는 빵들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거기서 거기인 크림빵이나 팥빵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빵들의 종류와 디자인 가히 예술적이다.
화려한 샌드위치는 기본이고, 햄버거와 피자빵, 소시지빵과 같은 강력한 비주얼의 빵부터.
애초에 민성이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크림빵과 팥빵 역시 그 모양이 평범하지 않았다.
겉 표면에는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며, 그 안이 얼마나 촉촉한지는 먹어 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손님?”
넋이 나가 있는 민성에게 종업원이 다가와 불렀다.
민성이 쳐다보자, 종업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쟁반과 집게를 전해 주었다.
민성은 그것을 받아 들고 침을 꿀꺽 삼킨 후, 본격적인 빵 쇼핑을 시작했다.
우선 먹고 싶은 건 다 담았다.
어차피 남으면 나중에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괜찮아 보이는 것을 다 담았다.
피자빵, 소시지빵, 미니 햄버거, 소라빵, 크림빵 등등 맛있어 보이는 건 전부 담았고, 쟁반이 가득 차서 무덤처럼 쌓였을 때가 되어서야 민성은 그것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종업원이 놀란 눈으로 계산을 시작하려 할 때 민성의 시선은 이미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냉장되어 있는 디저트.
바로 케이크다.
민성은 크게 뜬 눈으로 케이크를 노려보며 걸음을 옮겨 가까이서 그것을 응시했다.
케이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케이크는 민성에게 하나의 예술품이나 다름없었다.
딸기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 과일 케이크, 치즈 케이크 등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강력한 디자인의 마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민성은 거기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당장 여기에 있는 모든 케이크를 가져갈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가 그 생각은 이내 깨끗하게 사라졌다.
과유불급이다.
민성은 이성을 되찾고 다시 카운터로 가서 먹을 만큼의 빵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종업원이 그런 민성을 이상하다는 듯 보았지만 민성은 개의치 않았다.
즐거움은 한순간에 낭비하면 안 된다.
맛있게 먹고, 다음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빵집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탐욕은 행복을 망치기 쉬운 법.
민성은 욕망을 이겨 내며, 딱 먹을 만큼의 양만을 구입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종업원의 활기찬 인사를 들으며 민성은 빵집 밖으로 나왔다.
손에 들린 빵 봉지와 케이크 상자가 엄청난 행복감을 전해다 주었다.
민성은 손에 든 빵 봉지와 케이크 상자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빨간불로 꽤 길게 이어졌지만 민성은 초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밥을 먹기 위한 과정 또한 한 끼의 일부.
민성은 그 과정을 온전하게 즐기고 싶었다.
팟!
파란불이 바뀌었고, 민성은 급하지 않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아주 소중하게 내디뎠다.
* * *
“……어, 집에 안 계시네?”
이호성이 집을 둘러보고는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구라는 곳은 굉장히 멋지구나. 난 지금 발달된 문명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를 실감하고 있는 중인 거지.”
레폰이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목을 돌려 민성의 집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어디 잠깐 나가신 모양입니다. 제가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천천히.”
레폰은 민성의 집에서, 마치 집주인처럼 굴며 연락 해보라는 듯 여유 있게 손짓했다.
이호성은 마당 쪽으로 가서 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를 건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
달칵!
“여보세요? 헌터님?”
-왜 전화했어?
“어디세요?”
-밖.
“밖인 건 알아요. 제가 지금 헌터님 집이니까요.”
-그러니까 왜?
“밖 어디요?”
-근처야. 빵 사 들고 가는 중이다.
“……빵이요?”
-그래.
이호성은 레폰을 돌아보았다.
레폰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호성은 깜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려 레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마당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그럼 근처시겠네요?”
-무슨 일이냐고.
민성이 살짝 짜증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베아트리체에서 플레이어가 내려왔습니다.”
-…….
“일단 헌터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헌터님을 찾았고, 저희 쪽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가고 있으니까 잡아 두고 기다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이호성은 전화를 끊은 뒤, 레폰이 앉아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헌터님, 아니, 당신이 찾고 있는 분은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레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여전히 집을 구경하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베아트리체에서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이호성이 긴장으로 꽉 몰린 얼굴로 레폰을 빤히 보며 물었다.
레폰은 이호성을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레폰,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호성이 느끼기에, 그의 눈 안에서는 마치 불꽃이 터지는 듯했다.
“이유가 뭐겠어? 죽이러 온 거지.”
공기가 싸늘해진다.
피부마저 차가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
몸이 식는다.
이호성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표정이 부분부분 뒤틀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때문에 황급히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낮은 시선으로 이호성을 응시하던 레폰은 빙긋 미소 지었다.
“날 여기로 보낸 걸 보면, 강민성이라는 플레이어가 굉장히 강한 것 같은데. 보기에 어때? 난 오늘 그에게 죽을 것 같나?”
레폰이 물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요.”
이호성이 솔직하게 답했다.
레폰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렇군.”
그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을 때.
삑, 삑, 삑, 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이호성이 벌떡 일어났고, 뒤이어 덜컥 소리가 나면서 현관이 열렸다.
바가지와 쏠이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민성은 그런 바가지와 쏠을 등 뒤에 달고 터덜터덜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레폰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민성을 보았고, 민성은 감정이 없는 듯한 시선으로 그런 레폰의 눈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섞여 드는 아주 잠깐의 침묵.
이어 민성은 이호성을 향해 손에 들고 있는 빵 봉지와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이거 주방에 좀 갖다 놔.”
이호성이 빠른 걸음으로 민성의 손에 들려 있던 빵 봉지와 케이크 상자를 가져갔다.
손이 가벼워진 민성이 레폰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베아트리체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뭐 하러 온 거야?”
민성이 낮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레폰을 향해 물었다.
레폰은 고갯짓으로 주방에 빵 봉지와 케이크 상자를 두고 거실로 돌아온 이호성을 가리켰다.
“이미 답은 했는데.”
민성이 이호성을 보았다.
이호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님 죽이러 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