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77화>
“그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민성의 말을 하모닉이 끊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백기를 든 것이고, 항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어째서?”
민성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뉴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했고, 그 결과 우리 12성좌는 이길 수 없는 전력임을 인정하고 싸우는 것을 포기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민성은 하모닉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다 치고. 그럼 그 지름길이라는 건 뭐야?”
민성이 일단 들어나 보자라는 느낌으로 물었다.
“본래 살던 세계와 베아트리체를 연결하고 있는 나무 아이리스. 그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수 있는 무기가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제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유혹적이다.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수만 있다면,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지구가 멸망해 가는 과정을 밟지 않아도 된다.
하모닉이 말했던 것처럼, 랭킹전을 건너뛸 수 있는 지름길인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정말 그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수 있는 무기가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사실 기껏 저쪽 12성좌 쪽에서 하는 말이라고 해 봐야 그저 그런 변명이나 핑계거리, 혹은 함정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민성이다.
한데 예상 외로 그들이 꺼낸 제안은 힘이 있었다.
이제는 그에 대한 진실을 확인해야 할 때다.
“내가 너희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뭘 믿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이미 저희는 금기를 깨트렸습니다. 아이리스 나무와 관련된 것은 금기의 대상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고.”
“그건 직접 확인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리스크는 따를 겁니다.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수 있는 무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면, 내대륙의 플레이어들 중 대다수는 굳이 자신의 별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죠.”
“그럼에도 12성좌인 너희들을 포함해 다른 랭커 플레이어들이 그 무기를 구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대다수가 베아트리체가 마음에 들기 때문일 겁니다.”
민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하모닉을 보았고, 하모닉은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베아트리체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왜냐면…… 강해질 수 있거든요. 고향의 별로 돌아가는 것보다 베아트리체에 남는 것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사에게 있어 힘은 거부할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죠.”
하모닉 그 역시 베아트리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수 있는 무기는?”
민성이 물었다.
“쉽게 말하자면 망치와 대못입니다.”
“대못을 아이리스 나무에 박으면 잘라 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 무기가 있는 위치는?”
“천상계의 초입입니다.”
“천상계라면…….”
“신의 영역. 하급신이 지키고 있는 영역입니다.”
“신과 싸워 그것을 얻으라는 거군.”
“……”
“천상계의 초입이라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저희 12성좌가 천상계의 초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포탈 재료가 되는 아이템을 각각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천상계 초입으로 가는 길을 열 수가 있다는 거군. 그럼 거기서 로그아웃이 된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로그아웃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만약 그 시스템이 천상계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완전히 갇혀 버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저희 12성좌가 길을 알려 드리기로 했으니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를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하지만 무기를 구하기 위해 하급신과 싸우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하모닉이 그것만큼은 도와줄 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급신의 수준은?”
“지금까지 하급신에게 그 무기를 가지려고 도전한 플레이어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금기였고, 내대륙의 플레이어들은 그 금기를 깨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의 영역이니까.”
“그럼 내게 이런 제안을 한 건,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서였나?”
“만약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저희가 가진 명성의 일부를 양도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저희 12성좌의 영지는 지나가 주기를 바랍니다.”
백기가 맞다.
그들은 애초에 시작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번 일을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함정이라고 볼 필요가 없는 문제.
그런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하게 드는 이유는 신에 대한 반항심이었다.
도박에 미친 주신들이 자신을 말로 삼아 주사위를 굴려 대는 꼴은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신이 만든 판 안에서 놀아나는 짓 따위 마음에 들 리도 없으며, 그런 공간에 갇혀서 시간만 잡아먹으며 지구를 병들게 하는 건, 내대륙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들이었다.
결정은 내려져야만 한다.
하급신에게 갈지, 차근차근 12성좌부터 시작해 랭킹 1위권을 타이틀로 지구로 돌아갈지.
그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고민이 길어질 것 같은 문제였으나, 마음이 정하는 길에 귀를 기울이자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민성은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하급신에게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무기를 찾으러 간다. 내일까지 12성좌를 집결시켜라.”
민성이 말했다.
하모닉은 가벼운 예의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모닉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조용한 공간.
이호성이 민성을 흘겨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꼼지락거리지 말고.”
민성이 말했다.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괜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요. 제가 원래 의심이 좀 많잖아요. 영 꺼림칙해서. 그리고 아무리 하급이라고 해도 신인데……. 감당이 될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네 생각은?”
민성이 확실하게 말하라는 뜻으로 물었다.
이호성이 어색하게 씩 미소 지었다.
“저야 헌터님이 내린 결정을 따릴 뿐이죠.”
민성은 그런 이호성을 노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예.”
짧은 대화를 끝으로, 민성과 이호성은 하모닉과 대화를 나눴던 장소를 벗어났다.
* * *
“크히히히……!”
하모닉은 복도를 거면서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몰랐다.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여 줄 줄이야.
설마설마했는데,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하급신으로부터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무기를 구하는 건 분명 실재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신을 잡아 그 무기를 가져온단 말인가?
하모닉이 민성에게 밝히지 않은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급신에게 도전한 모든 플레이어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도전한 플레이어가 없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12성좌의 입장에서는 민성을 하급신에게 밀어 넣기만 하면 손 안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놈과 싸우는 것보다는 하급신에게 그를 먹이로 던져 주는 것이 최선이었는데, 그 떡밥을 이렇게 쉽게 덥석 물어 줄 줄이야.
“푸흐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만약 거절할 경우에 대한 대비책으로 수많은 방법을 준비했는데, 다 헛수고였다.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줄이야.
하모닉은 민성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서둘러 12성좌에게 작전은 성공했으며 내일 오전까지 늦지 않게 호른 도시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 전송을 마친 후, 하모닉은 크게 숨을 골랐다.
손쉽게 해결했군.
하모닉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다가 성안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표정을 고쳤다.
성안의 인부들이 멈춰 서서 하모닉을 향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모닉은 근엄한 표정을 짓다가도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만 했다.
* * *
이호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성이 그런 선택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고민하는 시간이라도 가질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서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줄이야.
12성좌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하급신이라니.
이제는 하다 하다 신을 죽이러 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이호성은 현실을 외면하고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민성의 결정은 내렸고, 그는 하급신을 죽이러 가는 것에 동참해야만 했다.
이호성이 보기에 12성좌가 생각하는 방향은 너무 단순해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싸우는 건 민성이 자신들이 아니다.
하급신과 싸워 설령 민성이 이긴다고 해도, 베아트리체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12성좌는 아무런 리스크가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었다.
물론 12성좌가 알아서 기어 주는 것만큼은 좋은 일이긴 했지만, 하급신과 싸워 아이리스 나무를 잘라 낼 무기를 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의 이야기였다.
이 길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민성을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수없이 고민이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왔지만, 어차피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무기를 구하는 것과 랭킹전.
그 방법 중에 민성은 신과 대항해, 이 베아트리체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쪽을 선택했다.
무모한 도전이 될 것인지, 하모닉이 말했던 대로 지름길로 가는 베아트리체의 고속 탈출길이 될지는 결과를 봐야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보는 이호성의 심정은 혼란스럽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똥개. 주인님 커피 안 갖다줘?”
발밑에서 바가지가 말했다.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이호성은 아차! 하며 담배를 황급히 끈 후에 서둘러 손을 씻고 커피 제조를 서둘렀다.
* * *
민성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꼴깍꼴깍 원샷으로 삼킨 다음 잔을 내려놓았다.
하급신과의 싸움.
말이 하급이지 상대는 신이다.
민성으로서도, 전투에 있어 제대로 된 긴장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헌터님.”
커피를 가져다주고 등 뒤에 서 있던 이호성이 민성을 불렀다.
민성이 흘깃 돌아보자 이호성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2성좌들이 제안한 만큼 이번 일은 너무 리스크가 큽니다. 상대는 무려 신이고, 12성좌들이 이러한 제한을 한 것에는 분명…….”
“이미 결정을 내렸다.”
민성의 말에 이호성은 입을 닫고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저녁 준비해. 내일은 꽤 피곤한 하루가 될 테니까.”
민성의 말이 오늘따라 이호성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이호성은 큰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준비하겠습니다.”
민성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성은 밀려드는 두려움을 삼키며 식사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