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72화>
* * *
이호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하늘도, 바닥도, 주변도 온통 하얀색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하고 한참을 헤매며 걸었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출구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공간의 형태 역시 바뀌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기억이 났다.
크로크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자각을 한 이후로, 죽은 상태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할 만한 증후들이 보였다.
일단 공기가 없었다.
호흡이 안 되는데도 멀쩡하다는 것은 참 기묘한 일이었다.
또한 팔을 긁어 보았는데 전혀 감각이 없다.
정말, 죽은 것이다.
일종의 영혼 상태.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이호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호성은 시무룩한 얼굴로 하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죽을 줄이야.
크로크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떠올랐다.
버서커 상태에서도 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호성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젠장.
이호성은 맥 빠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이렇게 끝난 건가?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미 죽은 마당에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체념한 이호성은 하얀 공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여긴 어디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금 이 공간이 어쩌면 지하철 같은 거고 실은 지옥으로 가고 있다든가와 같은 황당한 생각부터, 영원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게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
강민성처럼 끔찍한 마계로 가게 되는 게 아닌지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이제 헌터님 밥은 누가 차려주나?
이호성은 씁쓸한 얼굴로 새하얀 공간을 멍하니 응시했다.
* * *
크로크는 무기를 꺼내 든 민성을 보면서 웃음기와 장난기를 지웠다.
결코 가볍게 상대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얼핏 들은 것도 같아. 뉴 플레이어가 도장 깨기 식으로 랭킹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그게 너였군.”
크로크는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플레이어는 수도 없이 많았다. 너에게 난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거다. 네놈의 전진은 딱 여기까지란 얘기지.”
크로크의 건틀릿을 휘감고 있는 쇠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냈고, 그와 함께 그의 건틀릿에 빛이 모여 들었다.
민성은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크로크의 건틀릿을 빤히 보았다.
“오만하구나!”
크로크가 일갈을 터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쿠르르르르!
산사태가 나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나면서 크로크의 오러가 땅을 가르며 민성에게로 날아갔다.
민성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궁니르S에 마기를 실어 휘둘렀다.
크로크의 오러와 궁니르S가 충돌했다.
거대한 충돌의 파장이 사방으로 번져 반경 1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자연 재해를 넘어서는 파장.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성과 크로크는 상처 하나 없이 서로 멀쩡했다.
“제법인걸.”
크로크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너라면, 새로운 힘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겠어.”
크로크의 건틀릿에 강대한 힘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민성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건틀릿에 마력이 제대로 모여들기도 전에, 궁니르S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크로크는 얼굴을 굳히며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궁니르S는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쳤다.
핏방울이 튀었지만, 큰 타격이라고는 볼 수 없는 수준.
크로크가 민성의 몸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마력을 머금은 건틀릿이 굶주린 듯 쇄도했다.
민성은 왼쪽 팔꿈치로 몸 쪽으로 들어오는 건틀릿을 찍었다.
타아아아앙!
강렬한 소리가 나면서 들어오던 건틀릿이 아래로 빠르게 떨어졌다.
크로크의 눈에 약간의 당혹감과 놀람이 번졌다.
민성이 궁니르S를 대각으로 휘둘렀고, 크로크 역시 대각으로 내려 그어지는 궁니르S를 왼손에 낀 커다란 건틀릿으로 막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민성의 창과 크로크의 건틀릿이 그렇게 맞붙을 때마다 하늘이 깨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핏 보면 박빙으로 보이는 전투였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크로크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가고 있는 반면에, 민성의 얼굴은 처음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여유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돌은 계속되고 있고, 힘의 차이에서 그 우위는 민성이 가져갔다.
때문에 창과 건틀릿이 맞붙을 때마다 체력이 빠지는 건 크로크였으며, 그가 건틀릿에 마력을 모아 스킬을 쓰기 이전에 민성이 그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탓에 점점 형세는 크로크가 수비하고 민성이 공격하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크로크는 점점 열이 뻗쳤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는 건 오랜 전투 경험상 전투가 자신에게 점점 더 불리한 쪽으로 크게 기울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중첩된 체력과 마력의 소모량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어쩔 수 없이, 크로크는 이 시점에 자신의 비기(祕器)를 써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크로크는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고 있는 민성의 창날을 피하고 막아 내면서 마력을 폭발시킬 공간을 확보한 이후에,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크로크의 양손에 낀 건틀릿에서 반경 1킬로미터에 달하는 범위를 잿더미로 만들 만한 힘이 쏟아져 나왔다.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공격 중이었기 때문에 대처하는 것도 늦어질 수밖에 없는 완벽한 타이밍.
이로써 크로크는 분명 승기를 잡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스킬을 가진 건 크로크뿐만이 아니었다.
민성에게도 충분히 반응할 만한 기술이 있다.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기술.
카운터 배리어.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크로크는 자신이 쓴 비기를 그대로 돌려 맞게 되었다.
번-쩍!
크로크의 전신이 새하얗게 번지면서 데미지가 완벽하게 들어갔다.
피할 수도, 방비할 여력도 없었기에 데미지는 온전하게 먹혀들었다.
민성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강력한 데미지를 크로크에게 입힐 수 있었다.
역공을 맞으면서 뒤로 밀려난 크로크가 입 밖으로 시커먼 연기를 뿜었다.
크로크의 갑옷은 80퍼센트 이상이 깨졌고, 너덜너덜해졌다.
머리는 산발이 됐고, 곳곳에 상처가 나면서 피를 흘리며 서 있는 크로크는 분노가 꼭지점에 달해 있었다.
크로크는 살기를 잔뜩 담아 민성을 노려보았다.
민성은 크로크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민성이 웃으며 물었다.
크로크가 이를 악물며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마력을 모으고 있는 중인 것이다.
민성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타앗!
민성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마력을 모으던 중이었기 때문에, 크로크는 민성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는 있었으나, 반응까지는 하지 못했다.
“힘을 쓰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잖아.”
민성이 그렇게 말하며 궁니르S를 휘둘렀다.
콰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면서 크로크의 오른팔 하나가 잘려 나가면서 하늘로 솟구쳤다.
크로크가 피를 뿌리며 동귀어진에 가까운 기술로 전력이 담긴 힘을 민성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내질렀다.
민성은 바깥쪽으로 살짝 피하며 안쪽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궁니르S를 그의 몸통에 찔러 넣었다.
콰르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섬광이 번쩍였다.
“……끄어어억.”
크로크는 걸쭉한 피를 흘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건틀릿에 모여 들던 힘이 사라지면서, 크로크는 한 번 더 주먹만 한 피를 울컥 토해 냈다.
푸슉!
민성이 찔렀던 궁니르S를 회수하자, 크로크의 구멍 뚫린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크로크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꿇은 채로 민성을 보았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싸워 왔는지,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보면서 큰 박탈감에 사로 잡혔다.
자신의 영지를 찾은 이 이방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어쩌면 지금 당장 12성좌와 부딪친다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
“12성좌의 명단이 들어 있는 리스트를 찾고 있다. 가지고 있나?”
민성이 물었다.
대답이 없이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크로스를 보면서 민성은 미간을 구겼다.
“어차피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어.”
민성이 체념하고 창대를 꽉 쥐었을 때.
크로크가 템창을 열었다.
민성은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건 아닌지 살폈지만, 별달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크로크는 템창에서 뭔가를 꺼내 민성의 발치에 툭 던졌다.
민성은 허공섭물의 능력으로 물체를 끌어당겨 그것을 잡았다.
두루마리였다.
“네가 찾는 물건이다. 그게 있으면 12성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성은 두루마리와 크로크를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쉽게 물건을 넘겨준 게 의아해서였다.
크로크는 그런 민성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네게 전해질 물건이었다. 그리고 12성좌는 늘 내게 눈엣가시와 같은 놈들이었지. 아무리 12성좌라고 해도.”
크로크는 창백한 안색으로 민성을 징그럽다는 듯 보았다.
“네놈을 만나면 어떤 꼴일지 눈에 선하구나.”
민성은 두루마리를 템창에 넣은 뒤, 마지막 정리를 위해 크로크를 직시했다.
“유언은?”
민성이 물었다.
“12성좌에게 구천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라.”
그렇게 말하며 크로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난데없는 괴물을 만날 줄이야.”
크로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덧없는 삶이군.”
그는 허탈감에, 생기가 사라진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그는 이미 패배함으로써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음보다 패배가 그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자 공포였을 것이다.
패배한 이상, 죽음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지?”
그는 이루지 못한 염원이 담긴 물음을 던졌다.
크로크에게 남은 유일한 미련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거냔 말이다. 원래부터, 원래부터 그렇게 강했던 건가? 베아트리체에는 언제 온 거지? 강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민성은 미간을 구겼다.
“그딴 거 난 몰라. 그냥 살아남았을 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불공평하군.”
크로크는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넋이 나갔다.
“그만 가라.”
민성이 궁니르S를 크로크의 목에 내려찍었다.
콰르르르르르릉!
뇌전의 천둥이 휘몰아치는 것과 동시에 궁니르S가 크로크의 목을 관통하며 그의 생명을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