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54화>
장로가 말을 마친 이후.
민성은 장로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템창을 열어 궁니르S를 던져 넣었다.
“지켜보지. 단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민성은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쓰러져 있는 장로를 한 차례 내려다본 뒤, 걸음을 옮겼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모든 다크엘프들의 시선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민성에게 향해 있었다.
* * *
“이번에도 면목 없습니다.”
이호성은 정말 죽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으로 다크엘프들의 특이한 침상 위에 누운 채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민성을 보지 못하고, 그늘진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이호성.”
“네, 헌터님.”
이호성이 여전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왜 그러고 있는 거냐?”
민성이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이호성이 살짝 당황한 눈빛으로 민성을 보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죽상이냐고.”
“그야…….”
“잘한 게 있고, 못한 게 있다.”
“…….”
이호성은 민성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잘한 건 네가 다크엘프 쪽에서 어쩌면 고대의 문서를 다른 쪽으로 빼돌리거나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과 행동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호성은 긴장한 채로 이어질 민성의 말을 기다렸다.
“그 반대는, 내게 보고를 하지 않고 네가 결정짓고 자의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이유는?”
“헌터님이 식사 중이셨고, 솔직히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보고는 해. 여긴 지구가 아닌 베아트리체다. 네 신변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야.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마라.”
이호성은 인정한다는 듯 아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훌륭했다. 고대의 문서를 악용하려 든 장로를 찾아낸 것도, 그리고 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번 것도.”
이호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별로 칭찬하실 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학교도 아닌데, 자꾸만 헌터님에게 기대 능력 발휘가 아닌 경험을 배우고만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허니 더 이상 기운 빠져 있지 않고, 성장하겠습니다.”
이호성이 긴 숨을 뱉으며 말했다.
“난 100년이 걸렸다.”
“……?”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얘기다. 오버하지 말고, 회복에 집중해라.”
민성은 그 말을 끝으로, 이호성이 쉬고 있는 방 밖으로 나갔다.
이호성은 민성이 나간 방향을 보며 핏- 하고 웃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이지.”
말은 차갑게 해도, 이쯤 되니 말 속에 가시가 아니라 나름의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다.
“100년이라…….”
이호성은 멍하니 허공에 먼 곳을 보며 잠시 넋이 나간 채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 히죽 웃었다.
“대체 누가 그런 곳에서 100년이나 버틴단 말입니까?”
이호성은 민성이 나간 방향을 보며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위로가 안 된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우지 못한 이호성이었다.
“다음번엔 반드시……!”
이호성은 완벽한 서포터를 꿈꾸며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 * *
다크엘프 장로들이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이호성의 상태를 먼저 체크했으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물었고 고대의 문서를 보관했던 지하 비밀 통로의 흔적을 조사했다.
모든 조사를 마쳤지만, CCTV라는 첨단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기 때문에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군주 엘란의 스승이자 다크엘프 장로인 ‘튜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런 탓에 장로들은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다크엘프를 멸족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이방인과 장로 ‘튜드’의 말이 서로 다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명확하지가 않으니 큰일이었다.
‘튜드’는 자신의 결백하며, 모함을 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지를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장로들은 일단 튜드를 방에 두고 나와 다시 회의를 시작했으나, 의견은 좀처럼 하나로 좁혀지지 않고 지루한 탁상공론만이 이어졌다.
이방인이 정한 해가 지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 탓에 장로들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그렇게 붕 뜬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의 논점에 불이 붙었다.
어차피 증거를 확인할 수 없으니 한쪽에서는 결백을 주장하는 ‘튜드’를 내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른 한쪽은 다크엘프의 역사를 위해 지금은 한 발 물러서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결백할지도 모를 튜드 장로를 다크엘프의 법에 세우자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적당한 범위 내에서…….”
“죄를 짓지 않았는데 무슨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이방인이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그 작자는 최소한 튜드 장로의 목숨을 요구해 올 텐데요.”
“그럼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다크엘프의 군사를 일으켜 그 이방인과 맞붙자는 말씀이오?”
“그러니까 그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심도 높은 회의를…….”
“회의는 무슨 회의? 이방인이 말한 해가 지는 시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대로 탁상공론만 이어가다가 이도 저도 결정을 짓지 못하면…….”
“그럼 장로님이 나서세요.”
“예?”
“어차피 한 명이 희생해서 전체의 다크엘프를 보호하자는 취지라면 장로님이 내가 한 일이요, 하고 나서면 될 일 아닙니까?”
“아니,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거 보십시오. 본인도 하지 않은 일로 억울하게 희생하기 싫으면서, 왜 튜드 장로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겁니까? 대체 뭐가 달라요?”
회의가 점점 격해지던 가운데, 휘장을 걷고 나타난 이가 있었다.
다크엘프의 지도자 엘란이었다.
그녀는 후유증이 아주 조금 남았는지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에, 엘란 님!”
장로들이 당황하여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미소 지은 얼굴로 장로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세요. 이번 일에 대해선 제가 책임을 질 거니까요.”
엘란의 말에 장로들은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가, 이내 엘란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눈치챘다.
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황급히 엘란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절대 안 됩니다!”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엘란 님이 나서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엘란이 손을 들자 시끄럽던 회의실이 서서히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침묵이 완전히 내려앉았을 때, 엘란은 장로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책임을 필요로 하는 문제. 제가 약속을 확실하게 이행하지 못했으니 이에 대한 책임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책임은 곧 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엘란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굳건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장로들은 엘란이 한번 결정한 일을 좀처럼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군주를 잃은 다크엘프가 어떻게 그 삶을 이어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결정을 거두셔야 합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엘란 님을 형벌에 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장로들이 읍소하였으나 엘란의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군주는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책임자로서 다크엘프를 위한 뜻을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 * *
“……뭐라고? 엘란님이?”
튜드 장로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에게 회의 중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해 준 장로들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튜드에게 있어 엘란은 다크엘프의 지배자이자,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온 마음을 다해 애정으로 모셨던 분이었다.
그런 군주를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수습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엘란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튜드였다.
절대 지켜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튜드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장로들을 쏘아보았다.
“엘란 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튜드는 곧 엘란이 이방인을 찾을 거라는 장로들의 말에, 그들을 밀치며 서둘러 이방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 * *
“지금쯤 한바탕 난리가 나 있겠네요.”
이호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창밖을 보며 커피우유를 마시고 있던 민성은 바깥으로 다크엘프들이 우르르 모여드는 걸 보고 하늘을 체크했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민성은 남은 우유를 모두 마신 뒤, 빈 우유팩을 창틀에 내려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호성은 민성이 보던 창밖을 한 번 내다본 뒤, 민성이 보았듯 다크엘프가 모여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곧 결판이 날 것이라는 사실에, 이호성은 곧장 민성을 따라나섰다.
거처 밖으로 나온 민성은 수많은 다크엘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그 중심에 엘란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민성을 똑바로 보며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엘란이었으나, 민성은 전혀 반응이 없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튜드 장로, 그러니까 이방인께서 의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제가 확실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지고자 합니다.”
민성이 보기에 엘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눈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엘란이 말을 이었다.
“다크엘프의 규율로 군주를 형벌에 세울 수는 없는 바. 이방인, 당신의 검에 제 피로…….”
엘란이 말을 이어 가던 중.
“엘란 니이이임! 엘-란 님!”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민성과 엘란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이 모든 일의 장본인 튜드 장로가 오고 있었다.
땅을 차고 펄쩍 뛰어오른 장로가 엘란과 민성의 앞으로 우뚝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장로는 엘란에게 예를 표하며 진실을 밝혔다.
“제가 고대의 문서를 가지고 드워프의 요새에게 그 물건을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튜드 장로의 말에 다크엘프는 물론 지켜보는 모든 장로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튜드 장로의 말이 엘란을 위해서인지 진실을 이야기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대의 문서를 이방인에게 그저 힘없이 강탈당하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다크엘프의 명예를 더럽히기만 할 뿐. 이 모든 추악한 일의 원흉은 바로 이 늙은이입니다. 그러니 다크엘프의 규율대로, 군주의 명을 어긴 저를 처단하소서!”
튜드 장로가 머리 숙인 채, 소리치듯 자신의 진실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