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53화>
쿠우우우웅-!
민성이 장로의 얼굴을 움켜잡은 채로 벽으로 밀었다.
마법 장치로 인해 튼튼하다고 큰소리쳤던 그 벽에 금이 가면서 장로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컥!”
눈에서도 핏물이 흘렀다.
장로는 마치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르륵 쓰러졌고, 그런 그를 민성이 무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장로가 꿈틀거리며 민성을 올려다본다.
이호성의 말이 맞았다.
마법 장치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은 그 미세한 충격을 감지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장소를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찾는 건 불가능하다.
애당초, 이 이방인은…… 베아트리체 안에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월체.
모든 게 끝장났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아찔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크엘프의 멸족이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이방인을 보면서 든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두려웠다.
이호성이 말한 ‘도박’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본래 후회란 그런 것이다.
도박의 승패에서 패했을 때만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그런 것.
가장 먼저 다크엘프의 지배자인 엘란이 떠올랐고, 수많은 다크엘프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피를 뿌리고, 시체가 되어 겹겹이 쌓이는 그림이 상상되었다.
고대의 문서를 보다 높은 효용 가치로 쓰기 위해 그들을 담보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머릿속에 태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모든 게 끝장났다는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방인을 마주함으로써 받아들이게 된 현실이었다.
덥석!
민성이 복잡한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장로의 멱살을 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크, 크윽!”
민성은 장로를 빤히 보다가 손을 놓았다.
“콜록! 콜록!”
장로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목을 붙잡고 기침을 하다가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들어 민성을 보았다.
정신없이 흔들거리던 동공이 자리를 잡았다.
“살려 주십시오. 저를 죽이더라도…… 이 모든 잘못은 제가 저지른 것. 저만 죽이면 될 일일 것입니다.”
지금의 이 말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장로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이 터져 버린 상황에 자존심 같은 건 챙길 여력이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이방인이 자신의 머리를 벽에 찍은 것에 대한 타격은 크지 않다.
문제는 그는 거대한 거인이었고, 자신은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모든 건 정리가 된다.
그를 이호성처럼 여기서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크엘프의 지배자인 엘란마저 가지고 놀 듯 상대했던 이방인이 아닌가?
작은 물고기에 불과한 자신이 고래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고대의 문서를 빼돌리려 했던 건가?”
민성이 표정의 변화가 없이 덤덤하게 사실을 물었다.
장로는 머리를 굴렸다.
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다크엘프의 운명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대한 대답이 필요했다.
하지만.
“딱 봐도 그런 것 같은데 뭘 그렇게 눈알을 돌려 대.”
민성이 로브의 옷깃을 잡아 옷을 쫘악 뜯어냈다.
그러자 쭈글쭈글한 노인의 맨몸이 드러났고, 이내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고대의 문서였다.
민성은 그 물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장로는 그런 민성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냉각되는 현 사태에 장로는 스스로를 탓했다.
이호성을 만났을 때, 이미 포기를 했었어야 했다.
욕심이 모든 걸 망친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부탁드립니다, 이방인이여. 이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만…….”
“아까부터 뭐라 주절주절하는 거야? 입 좀 다물어. 듣기 싫으니까.”
민성은 바가지를 꺼내 이호성에게 던졌다.
“바가지는 이호성 데려가서 치료하고, 쏠은 고대의 문서 챙겨라.”
“네! 주인님!”
바가지가 경례를 하며 말했고, 밖에 있던 쏠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려와 고대의 문서만을 챙긴 뒤, 다시 지하 밖으로 나갔다.
* * *
민성은 지하 공간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장로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그를 질질 끌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끄, 끄윽……!”
장로는 민성의 손에 끌려 올라가며 얼굴을 구긴 채 버둥거렸다.
자신의 머리칼을 잡고 끌고 가는 민성에게는 감히 거역할 수 없을 힘이 있었다.
그런 탓에 민성은 저항하지 못하는 장로를 마치 짐을 끌고 가듯 편안하게 질질 끌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곧바로 내리쬐는 햇빛에 장로가 눈을 와락 찌푸렸다.
그런 와중에도 민성은 그를 끌고 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캐리어를 끌듯이 장로의 머리카락을 잡고 질질 끌고 이동했다.
몇몇 엘프들이 그 광경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가 보고를 올리기 위해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민성은 잠깐 멈추어 서서 그런 그들을 보았다가 다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장로를 끌고 갔다.
하나둘,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크엘프들이 나타났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일정 거리를 두며 지켜보며 뒤따라왔다.
그들은 수군거렸고, 불안해했다.
그사이 민성은 장로를 끌고 엘란이 거처로 쓰고 있는 본관 거처 앞에 도착했다.
장로는 현 사태의 암담함에 멍한 표정으로 민성의 손에 머리가 붙들려 있었으며, 시간이 흐르자 점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 많은 다크엘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민성은 주변에 다크엘프들이 꽤 많이 모여든 것을 확인하고 손에 들고 있던 장로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장로는 분명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나, 사태의 심각성에 의해 다리가 후들거려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민성은 발아래에 장로를 두고서 엘란과 다른 장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분명 이야기는 전해졌을 것이고, 이에 대한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분명 직접 나와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 틀림없었다.
민성은 발로 장로의 목을 밟았다.
힘을 주자, 장로는 침을 흘리며 새처럼 푸다닥거렸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렇게 정신 놓고 있어서 쓰나.”
장로가 핏발 선 눈으로 민성을 위로 노려보았다.
민성은 장로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민성은 시선을 들어, 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휘장을 걷으며 다크엘프의 장로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표정은 당연히 밝지 않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장로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이자가 고대의 문서를 빼돌리려 했다. 이건 약속과 다른데? 어떻게 생각하나.”
민성이 장로들을 보며 물었다.
그 말에 장로들은 뻐꾸기가 된 듯,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당혹감이 물든 눈으로 민성의 발에 밟혀 있는 장로를 내려다보았다.
“그,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장로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었다.
민성이 발을 치우자 장로가 기침을 하며 일어나 손가락으로 민성을 가리켰다.
“이자의 모함입니다! 애당초 우리 다크엘프를 멸족시키려 한 이방인이란 말입니다!”
장로가 피 섞인 기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민성은 그런 장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명예를 떨어트리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다크엘프를 이용해 마지막 담보 배팅을 하는 걸 보면.
민성은 이제 이자의 말에 엘란의 거처에서 나온 장로들이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았다.
저자들이 하는 말에 따라, 결과는 정해질 것이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 겁니까?”
장로 한 명이 물었다.
민성은 그 장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난 이미 고대의 문서를 손에 넣었다. 설명할 생각도, 설득할 생각 따위도 없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약속을 어긴 네놈들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결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민성이 템창에서 궁니르S를 꺼냈다.
콰르르르르릉!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성은 뇌전이 번쩍거리는 금빛의 궁니르S 창대를 쥐고서 그대로 자신의 부근에 있는 장로의 허벅지에 창을 박아 넣었다.
콰아아아아앙!
살을 꿰뚫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들린 건, 궁니르S가 바닥을 뚫고 들어가 박히는 소리뿐이었다.
“……아아아아악!”
장로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골반을 붙잡고 버둥거렸다.
민성은 엘란의 거처에서 나온 장로들을 훑어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상황을 굳이 길게 끌고 싶지 않다는 지루하다는 감정이 든 탓이다.
또한 이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설득을 해야 할 건 자신이 아니라 다크엘프 쪽이라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장로들이 작은 목소리로 서로 회의를 하듯 얘기를 나누었다.
그 시간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고, 그들은 그런 만큼 민성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 모로 봐도, 상황은 다크엘프 쪽이 최악이었다.
* * *
다크엘프로서는 이방인에게 따지고 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만약 다크엘프와 이방인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다면 설령 그를 죽인다고 해도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후폭풍으로 약해진 기반 상태에서 드워프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있는 여력 또한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만큼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다크엘프 쪽에서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고대의 문서까지 넘어간 마당에, 진실의 여부보다 중요한 건 이방인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저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은 좁혀졌다.
장로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로직을 맡은 이들로서 해당 사건에 대한 엄중함을 따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어깨를 낮춘 저자세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복종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고 난 후, 정말 약속을 어긴 것으로 밝혀진다면 엘란 님의 명을 어긴 장로를 다크엘프의 율법대로 죄를 물을 것이며, 저희 쪽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올리겠습니다.”
장로 한 명이 대표로 그렇게 말했다.
“만약 그 반대라면?”
민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장로들을 향해 물었다.
장로들은 얼굴이 굳어진 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민성은 끝까지 그들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장로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로 중 대표 한 명이 민성을 똑바로 응시하며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일로 약속을 어겼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두려움으로 인해 거짓된 일로 머리를 숙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표 장로가 확실하게 못을 박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