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49화>
* * *
엘란이 문을 열자 넓은 홀이 드러났다.
민성은 연무장으로 추정되는 그 넓은 홀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부를 눈으로 간단하게 훑었다.
천장은 놀라우리만큼 높았고, 홀의 평수 역시 굉장했는데, 추정상 약 200평 정도 되는 듯했다.
다크엘프의 지배자 엘란이 연무장의 중심으로 걸어갔고, 민성도 여유 있는 걸음으로 중앙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크엘프 장로들과 상위 직책의 다크엘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호성과 바가지 그리고 쏠도 대결을 지켜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민성은 엘란과 대치하여 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였다.
무기를 먼저 꺼내 든 것은 엘란.
그녀의 무기는 역시, 크로우였다.
다크엘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갈퀴 모양의 무기.
그녀는 그것을 손에 차고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민성을 응시했다.
민성도 템창을 열어 조용히 궁니르S를 꺼냈다.
엘란과 민성이 전투를 앞둔 순간, 연무장 안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으며, 무거운 고요함이 장내를 무겁게 눌렀다.
민성은 들고 있는 창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느슨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한 민성의 행동에 엘란의 눈빛은 굳어졌다.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언제나 그렇게 자신감이 과한가요?”
엘란이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물었다.
민성은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긴장이라는 걸 해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지경이라.”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라 이쪽이 외려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조금 더 분명히 하는 게 어떨까요?”
엘란이 민성을 직시하며 물었다.
“무엇을?”
“이 대결에서 당신이 이기면 고대의 문서를 드리죠. 하지만 제가 이긴다면…….”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죠? 전 이래 보여도 다크엘프의 군주입니다.”
“잡설이 너무 긴데. 시작 안 하나?”
민성이 무료하다는 듯, 정말 곧 하품이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나 엘란은 그런 민성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건 어린아이들이나 당하는 초보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니까.
엘란은 반드시 저 여유로움을 사라지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승부가 나면, 깨끗이 인정할 거라고 믿겠습니다.”
엘란이 말했고.
“그쪽이야말로.”
민성이 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엘란은 선공을 시작했다.
일순 엘란의 발밑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척이 느껴졌던 건 좌측.
민성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왼쪽 대각선 민성의 머리 위쯤에서 엘란이 떨어지며 크로우를 내리긋기 직전이었다.
민성은 가볍게 몸을 틀며 창을 들었고, 크로우와 창이 부딪치며 불꽃을 터트리면서 서로 튕겨져 나갔다.
엘란은 뒤쪽으로 공중제비를 두 바퀴 돌며 바닥에 낮게 착지한 후, 곧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그녀의 크로우에서 세 줄기의 푸른 오러의 줄기가 민성에게로 날아갔다.
민성의 입장에서는 강도가 약한 오러.
미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검기를 피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다음 동선을 눈으로 쫓았다.
엘란은 그에게 두 번의 공격을 한 것만으로도 벌써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격차를 느꼈기 때문이다.
엘란이 보기에 민성은 아직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공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무기를 쓰지 않았으니, 그 사실은 분명했다.
어째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자신을 가늠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고, 그 사실로 인하여 기분이 상하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긴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 실력을 보여 주지 않은 건 이쪽도 그렇다.
엘란은 버프 스킬을 사용했다.
그녀의 전신에 푸른빛과 검은빛이 서로 섞여 들며 번쩍번쩍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체력과 민첩성을 올리는 스킬, 크로우의 데미지를 올리는 스킬, 이동 속도에 대한 스킬 등등 버프가 가능한 모든 스킬을 사용했다.
마법 효과를 온몸으로 뿜어내면서 이제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될 것이라는 암시가 그에게 향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창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있었다.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다는 듯이.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엘란은 그를 향해 크로우를 휘둘렀다.
쇄애애애애애애액!
전에 보였던 검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고 강한 오러의 힘이 민성에게 향했다.
그러나 민성은 그저 어깨를 한 번 비트는 것으로 그 것을 피해 냈고, 엘란이 크로우를 통해 발출한 세 줄기의 검기는 벽에 부딪치며 사라졌다.
민성은 그런 벽을 뒤돌아보았다.
그사이 엘란은 민성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수직으로 그어지는 크로우.
민성의 시선보다 궁니르S가 먼저 움직였다.
카아아아아아앙-!
강렬한 금속성 소리가 나면서 엘란은 자세가 흐트러지며 바닥에 착지했다.
가드가 풀린 완벽한 기회의 상황.
민성은 미간을 구기며 발로 엘란의 복부를 밀어 찼다.
퍼어억!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엘란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철퍽 쓰러졌다.
“콜록!”
엘란은 피 섞인 기침을 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엘란 님!”
사방에서 장로와 다크엘프들이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며 소리쳤다.
엘란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끄럽던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세요.”
엘란은 그렇게 말하고서 민성을 향해 걸어갔다.
“이쯤 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게 좋을 텐데.”
민성이 말했다.
“천만에! 아직 당신은 내 능력의 10분의 1도 확인하지 못했어요.”
엘란이 민성을 향해 달렸다.
크로우를 휘두르자 스킬이 펼쳐졌다.
바닥에서 마치 나무 넝쿨과도 같은 검기 수십 개가 튀어나와 민성에게 쇄도했다.
민성은 미간을 구기며 궁니르S를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크엘프들은 그 커다란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창을 휘두르는 것을 통해 엘란의 검기 수십 다발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걸 보고 두 번 놀라고 말았다.
엘란은 민성을 보며 이를 악물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목을 긋기 위해 크로우를 휘둘렀으나, 민성은 간단히 피해 냈다.
눈부신 속도로 연이어지는 연쇄 공격에도 그는 마치 모든 공격 루트를 꿰뚫고 있기라도 한 듯이 편안한 표정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의 창을 쥐지 않은 왼쪽 주먹이 옆구리 갈비뼈를 치고 들어왔을 때, 엘란은 뼈가 부러졌음을 직감했다.
우드득!
“컥!”
피를 뿜으면서도, 엘란은 비틀거리며, 쓰러지지 않고 다시 크로우를 휘둘렀다.
크로우에서 위력적인 검기 다발과 동시에 크로우가 살을 베어 내기 위해 쏟아지듯 휘둘러졌음에도, 그러한 자신의 공격은 민성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민성이 창날이 아닌 뭉툭한 부분으로 엘란의 어깨를 내려찍었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엘란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는 민성을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크로우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그건 그저 마지막 발악에 지나지 않는 공격에 불과했다.
의식조차 잡히지 않는 본능적인 형태였고, 그것은 마치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했다.
하지만 체력적 한계란 존재하는 것이었고, 힘이 많이 빠진 상황에서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으니, 크로우를 휘두르는 엘란은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초점마저 없는 눈으로 허우적거리듯 팔을 휘젓고 있는 그녀를, 민성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없어진 엘란이 비틀거리며 축 늘어진 채로 민성에게 터덜터덜 걸어갔을 때.
민성은 창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엘란은 더 이상 크로우를 착용한 팔을 들지 못하고 바닥에 철퍽 무릎을 꿇었다.
민성은 엘란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장로들과 다크엘프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다급하고 불안하고, 걱정이 가득한 얼굴들로.
민성은 템창을 열어 궁니르S를 던져 놓고, 무릎을 꿇고 있는 엘란을 지나쳤다.
장로들과 다크엘프들이 민성을 지나며 엘란을 둘러싸며 그녀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고 난 후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호성이 꾸벅 인사를 한 후에, 들고 있던 이온 음료를 건넸다.
민성은 이온 음료를 꿀꺽꿀꺽 마신 뒤, 음료를 이호성에게 넘겨준 후 뒤를 돌아보았다.
다크엘프들은 자신들의 군주인 엘란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약속은 지켜지는 것이겠죠?”
이호성이 다크엘프들이 모여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민성은 그렇게 말한 후, 연무장을 벗어났다.
* * *
엘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엘란은 시선을 돌려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장로를 보았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가르쳐 온 스승이었다.
엘란은 그를 빤히 보다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눈물을 삼켰다.
“면목이 없어요.”
엘란이 흐려진 눈으로 먼 곳을 보며말했다.
장로는 그런 엘란에게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더할 나위 없는 용기와 결단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엘란 님을 탓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로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너무 강했던 것이지요.”
엘란은 웃었다.
“네. 너무 강했어요. 분하고 억울하고, 부러울 정도로.”
“어차피 고대의 문서는 본래의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맡아 두고 있었던 물건이죠. 우리 다크엘프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본래 우리의 것은 아니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하하, 별말씀을. 그보다 치료를 한다고 하긴 했지만 후유증은 남아 있을 수 있으니 당분간은 회복에 힘을 쓰십시오.”
엘란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저는 고대의 문서를 그자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로의 손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이내 허공에 마법의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엘란이 서명을 하면, 고대의 문서가 있는 곳의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이 위임되는 것이었다.
서명을 하기 위해 엘란이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장로가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장로가 띠운 마법창에 검지로 서명을 했다.
그러자 마법창은 환하게 밝아졌다가 이내 장로에게 그 빛이 흡수되듯 하며 사라졌다.
“부탁드립니다, 장로님. 그자에게도, 그리고 우리의 다크엘프들에게도…….”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에 힘을 쓰십시오.”
장로가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갔다.
엘란은 고대의 문서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이불을 양손으로 콱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