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48화>
무려 요새가 뚫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절대적 철옹성이 바로 다크엘프의 요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들이었다.
그런 요새가 점점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으니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 어서. 엘란 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상관이 소리쳤고, 그의 휘하 중 한 명은 부리나케 장로 회의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요새의 외벽이 곧 뚫릴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를 올린 순간, 장로 회의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잠깐의 정적 후에 엘란을 포함해 장로들이 일제히 회의장 테이블 앞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귀로 듣고도 결코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외벽이 뚫릴 것 같다니!”
“저, 저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만 사실입니다.”
그 말에 장로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다크엘프의 요새 외벽이 물리적 충격에 의해 뚫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현 상황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외벽이 뚫릴 마당에 대책은 무슨 대책! 그럴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본래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게 가장 좋을 것입니다!”
다급해진 장로들이 서로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엘란이 상기된 얼굴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장로들은 이성을 찾고 공손한 자세로 엘란을 향해 정중한 자세를 잡았다.
“지금 당장 침입자와 교섭 자리를 마련하세요.”
엘란의 명령이 떨어졌고, 잠시 어수선했던 회의장의 장로들은 빠르게 회의장 밖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엘란은 허공을 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민성의 눈이 하얗게 번쩍이고, 금빛의 궁니르S 역시 뇌전의 새하얀 빛을 머금는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한 듯 궁니르S는 마치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맹수처럼 달려들어, 무려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다크엘프 요새의 외벽을 콰르르! 뚫어 버리고 말았다.
불가능을 뚫어 낸 셈이었다.
“……맙소사.”
이호성은 마치 봐선 안 될 장면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버린 외벽을 보며 얼굴이 질려 버렸다.
민성은 궁니르S의 창대를 움켜쥐고 자신이 뚫어 버린 구멍을 통해 편하게 요새 안으로 살짝 머리를 낮추며 들어갔다.
이호성은 굵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 민성을 뒤따랐다.
바가지는 주머니 밖으로 뛰어 나와 칵칵 웃으며 신이 난다는 듯 팔짝팔짝 뛰었고, 쏠은 요새 안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며 뛰어다녔다.
……놀러 온 게 아니라고, 이것들아.
이호성은 그런 심정이었지만 그 반면 민성은 별달리 그런 바가지와 쏠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수십에 달하는 다크엘프의 시선을 덤덤한 얼굴로 받아 낼 뿐이었다.
* * *
꽤 많은 수의 다크엘프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로브를 쓴 장로들이 멀리서 나타났다.
쭈글쭈글한 피부의 노인인 다크엘프들이었고, 그들은 모여 있는 수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대동한 채였다.
장로들이 민성의 일행을 일정 거리에 두고 멈춰 섰다.
“누가 엘란인가?”
민성이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 물음에 한 장로가 답했다.
“엘란 님이 위험한 곳에 함부로 스스로를 노출시킬 수야 없지. 그보다.”
장로는 민성이 뚫어 낸 외벽의 구멍을 보았다.
“그저 힘으로 뚫어 냈단 말인가. 우리 요새의 외벽을…….”
“번거롭긴 했지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라.”
민성의 자신감에 장로들은 물론 다크엘프들 모두 온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동안 이런 침입자는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다.
“고대의 문서를 찾는다고 들었다.”
장로가 말했고, 민성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이 필요할 듯싶은데, 일단 그 무기는 좀 치워 주는 게 어떻겠나?”
민성은 그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확인한 뒤, 자신의 궁니르S를 한 차례 내려다보았다가 템창을 열어 자신의 무기를 던져 넣었다.
순순히 자신들의 의견을 따라주자 장로들은 그를 예의를 갖춰 모실 것을 명령했다.
* * *
민성은 일행과 함께 다크엘프 일반 병사 하나의 안내를 받아 협상을 하게 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넓었고, 목재 테이블도 컸으며 얘기를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을 공간이었다.
다만 협상을 논점으로 봤을 때뿐이고, 만약 협상이 틀어지고 상황이 나쁘게 기운다면 언제든지 건물 안에 대상을 고립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처럼 보였다.
만약 그런 선택을 한다면 다크엘프는 전멸하게 될 것이다.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벽에 구멍 내고 들어온 입장에 차까지 대접받으려니 어쩐지 어색한 이호성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입장이, 다크엘프에겐 다크엘프의 입장이 있다는 걸 이해하면 모든 상황은 간단히 정리된다.
민성은 어린 다크엘프 하나가 내어 준 차를 마시며 협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굉장히 독특한데요?”
이호성이 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신기한 향입니다.”
이호성은 맛있다고, 향이 좋다고 했지만 민성에게 그들이 내어준 차는 그다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다만 머리와 입안이 개운해지는 것 같은 느낌은 좋았다.
“헌터님은 별로 입에 안 맞으시는 모양입니다.”
한 모금 먹고 손을 거의 대지 않는 민성을 보며 이호성이 말했다.
“마계에 있는 흙냄새가 나서.”
민성은 짤막하게 그 이유를 설명했고, 이호성은 왜 민성이 이 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이호성이 혼자 차를 홀짝이고 있는 가운데, 장로들이 협상 테이블이 있는 방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민성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편안한 자세로 그들이 착석하는 걸 지켜보았다.
분위기는 엄중하면서도 무거웠지만 꾸물거리는 걸 싫어하는 민성으로서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협상을 하자고 했으면 제안할 만한 것이 있는 거겠지. 얘기해 봐.”
민성이 검지로 테이블을 탁탁 두 번 두드리며 장로들의 얼굴을 훑었다.
압박되는 공기에 가뜩이나 무거웠던 장로들의 표정이 한층 더 그 두께가 두꺼워졌다.
민성의 존재감은 그들로서는 한없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와 판을 벌릴 수 없는 전력은 아니었다.
민성은 혼자나 다름없었고, 현재 이곳은 다크엘프의 요새 안쪽 본거지의 중심이었으니까.
하지만 무려 요새의 외벽을 뚫어 버린 남자인 데다 피를 보지 않고 최상의 결과를 이루고자 하는 다크엘프들로서는 민성의 태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민성 쪽에서 먼저 무기를 꺼내 들고 휘두르기 시작한다면, 자신들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선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게 고대의 문서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장로 한 명이 물었다.
민성이 짧은 고갯짓을 했고,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플레이어 퀘스트 때문입니까?”
“그래.”
“……그렇군요. 고대의 문서는 저희 다크엘프의 중요한 재산이자 고귀한 물건입니다.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고대의 문서를 당신께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 제안은?”
“인근 위치에 있는 카이엔 산맥에 드워프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적대 관계. 호시탐탐 우리의 위기를 바라고 있는 종족이죠.”
“드워프를 죽여 달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대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저희 다크엘프가 원하는 것은 서로간의 교역 합의입니다. 워낙 감정의 골이 깊은 탓에 서로 간의 이익을 취하지 못하고 있죠. 우린 어느 정도 선을 지키지만 드워프들은 고집이 어지간하죠. 그런 탓에 저희가 교역 합의에 대한 제안은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교역 합의를 뚫어 달라는 거고?”
“그렇습니다.”
“싫어.”
민성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장로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대의 문서를 강탈하겠다는 뜻입니까?”
“원망은 저기 하늘 위에서 도박놀음이나 하고 있는 주신들을 탓해야지. 베아트리체에서는 시간 자체가 내겐 전쟁이다. 그 시간 동안 나의 별은 썩어 가고 있으니까. 그 잘난 다크엘프의 전통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별이 썩어 가는 건 내가 볼 수가 없지. 그래서도 안 되고.”
장로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애초에 협상을 할 생각도 없었던 거군요…….”
장로가 낮은 시선으로 민성을 쏘아보며 말했다.
민성은 웃었다.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드워프니 뭐니 하는 건 다 핑계일 뿐이고, 결국은 드워프와 날 이용해 서로 싸움을 부추기는 허접한 이간질이잖아. 이미 다 보인다고.”
장로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민성이 템창에서 궁니르를 꺼냈다.
“두 번 말 안 한다. 고대의 문서를 가져와.”
민성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당장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엘란 님!”
“에, 엘란 님……!”
협상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낸 건,
숲의 지배자이자 다크엘프의 지배자 엘란이었다.
“와…….”
이호성이 엘란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아름다운 외모에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호성은 입을 닫은 뒤, 머쓱하게 코를 닦았다.
민성은 엘란을 응시했고, 엘란 역시 숲과 요새의 침범자인 민성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어설픈 협상 따위는 그만두고, 결론을 내죠. 저 엘란과 당신 둘만의 협의로.”
“어떤 협의를 말하는 건가?”
민성이 테이블 너머에 서 있는 엘란을 보며 물었다.
“대련. 혹은 생사를 건 전투?”
엘란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란 님!”
사방에서 장로들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의 말에 반박하고자 나섰으나, 엘란은 자신의 결정을 굽힐 의지가 없는 듯 오직 민성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제가 이 침입자와 매듭을 지어야만 합니다. 그게 바로 다크엘프의 긍지예요.”
“하나…….”
“너무 위험합니다.”
“무모한 결정이십니다!”
“지배자로서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장로들이 온 마음을 담아 말했으나.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이상 이견을 달지 말아 주세요.”
젊은 지배자 엘란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장로들이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민성은 짧게 한숨 쉬었다.
……어쩐지 철딱서니 없는 어린 여자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 이 다크엘프의 숲에 쳐들어온 대단한 악역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해도 민성으로써도 어쩔 수 없었다.
적당히 봐줬다간 저 쪽에서 고깝게 여기는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민성은 궁니르S를 들고서 일어섰다.
“장소는 어디서?”
민성이 엘란을 보며 물었다.
“따라오시죠.”
엘란이 먼저 방을 나섰다.
민성이 뒤따랐고, 장로들은 불안감이 가속화되는 심정으로 엘란을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