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239화>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이런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일 줄이야…….”
쇼펜이 살심이 스며든 시선으로 라우니를 노려보며 웃었다.
라우니는 자신이 고민 끝에 결정한 이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한숨을 뱉었다.
쇼펜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건 하나야. 순순히 반역의 죄를 받을 것인지, 속에 들어 있는 그 뜻을 펼치고 싶은 것인지.”
라우니의 시선에 힘이 없어지고, 들고 있던 검은 아래로 처졌다.
그것을 보고 쇼펜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이러한 네 행동은 반역이다. 본래라면 즉결 처형이 당연한 사안이지만…… 이 쇼펜 영지는 그대와 내가 함께 만든 위업이 아니던가? 아량을 베풀 것이다. 지하 감옥에서 12주간 근신토록 하라.”
“…….”
라우니는 슬픔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무기를 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기억도 떠올랐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장면 역시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너무 뻔한 일이니까.
“아무런 죄가 없는 베아트리체인들의 목숨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공격하는 걸, 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힘들겠지, 그대는.”
“숙고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라우니가 시선을 들어 쇼펜을 보며 물었다.
쇼펜은 그런 라우니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그대의 반역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라우니 경 그대가 날 배신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애초에 피에르 사막으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기서 계약서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
“마음을 굳건히 해라. 여긴 베아트리체고, 우린 베아트리체인이 아니다. 우린 결국 이 세계를 떠나야 할 이방인이다.”
쇼펜이 말했다.
라우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가 말한 대로다.
우리는 베아트리체인이 아니며, 결국 이 세계를 떠날 존재.
그래.
처음에는 분명 그랬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의 마음이 그럴까?
아니.
단언컨대 그는 변했으며, 더 큰 변화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이제 미련을 버릴 때가 왔다.
그리고 그 미련이 그를 변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항을 표함으로써 그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일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의지를 쇼펜도 직감했다.
조금은 가벼움이 유지되던 그 공간은 순식간에 빈틈없는 살기로 가득 찼다.
마치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바늘이 사방에 깔린 것만 같은 끔찍한 감각을 전달하는 공간으로 탈바꿈 되었다.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쇼펜은 눈살을 찌푸리며 라우니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그 때, 조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 * *
침대에 누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던 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바가지가 들어왔다.
레시피를 공부하던 이호성이 그런 바가지를 흘깃 보았고, 바가지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민성에게 뛰어 올라갔다.
“주인님!”
바가지가 민성의 머리 옆에 섰다.
“왜 그래?”
민성이 바가지를 흘겨보며 물었다.
바가지는 검은 안광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주인님! 제가 굉장한 정보를 알아 왔어요.”
바가지는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서는 어깨에 힘을 주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내보였다.
“무슨 정보?”
민성이 물었고, 그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바가지는 수다스럽게 자신이 알아 온 이야기를 쏟아 냈다.
간단히 말하자면 쇼펜의 성에는 라우니라는 기사가 있고, 그가 현재 백성들의 피로 전쟁을 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것을 라우니라는 기사가 막아서고 있다는 얘기였다.
바가지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곧바로 띠링! 하고 알림 소리가 났다.
시스템 메시지였다.
[ 라우니를 도와 무고한 베아트리체인들을 피의 제물로 바치려는 쇼펜을 제거하세요. ]
[ 퀘스트 성공시 높은 명성과 업적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
이호성이 레시피 페이퍼를 템창에 던져 놓고 바로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더 쉬고 싶었는데…….’
민성은 귀찮음이 만연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바가지가 침대에서 방방 뛰며 기뻐했다.
민성이 걸음을 옮기자, 바가지가 풀쩍 뛰어 자신의 주인인 민성의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쏠도 흥미롭다는 듯 민성을 졸졸 따라갔다.
길 안내는 바가지가 맡았다.
이호성은 입에 담배를 피우며 초조하게 민성을 뒤따랐다.
* * *
곧 전투가 시작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쇼펜은 일그러진 얼굴을 펴지 못했다.
“라우니 경,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감정이 비틀려 있다는 것이 쇼펜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순수한 짜증이었고, 그 짜증은 서서히 지난 인연에 대한 연결 고리를 잘라 내기 위한 날카로운 가위로 변했다.
“마지막 기회다. 무기를 버려라, 라우니 경.”
낮은 톤으로 말한 쇼펜의 목소리는 본인 특유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었고 이 대답 하나로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경고하고 있었다.
라우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이후였다.
그걸 몰랐던 건 쇼펜뿐이다.
라우니가 정말로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쇼펜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저 깜짝쇼였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라우니와 자신은 단순히 상하 관계가 아닌,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결정권자가 되면, 통제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지고 통제를 받는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넘어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 점에서 본다면 라우니의 지금과 같은 행태는 명백한 반역이었다.
“라우니, 너와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쇼펜이 감정이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표정도 감정도 얼굴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라우니는 쇼펜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욕망’이라는 괴물에 삼켜졌다는 것을.
그리고 과거의 쇼펜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제거해.”
쇼펜이 명령을 내리는 즉시, 무기를 겨누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일시에 라우니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사방에서 오러가 휘몰아치며 들어오는 공격에도 라우니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곧 플레이어들의 무기가 살을 꿰뚫고 찢을 텐데도, 라우니는 우두커니 있을 뿐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자신감을 갖고 라우니를 찌르고 베었을 때, 피가 흩날림과 동시에 그 피는 이내 푸슈슉 하며 연기로 화했다.
본체가 아닌 무형체였다.
플레이어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필 때, 천장 쪽에서 떨어져 내린 라우니가 자신의 커다란 검으로 한 플레이어를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두 동강을 내 버렸다.
두 쪽이 나며 피 분수와 함께 갈라지는 플레이어.
그리고 라우니는 귀신 같은 눈으로 플레이어들을 향해 거대한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우우우웅!
마력이 깃든 검에서 요동치는 오러가 굵직하게 발출되었다.
그 강한 오러의 발출에 플레이어 5명의 몸이 찢어지고 갈라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신음과 비명이 귓속으로 파고드는 가운데, 남은 플레이어들이 라우니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라우니의 검은 크다.
절대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을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게 그들의 검을 막고 베며 무거운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힘에 민첩이 더했으니, 그 파괴력은 상당했다.
퍼어어어억!
베는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라우니가 검을 휘두르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만큼 힘과 마력이 넘친다는 얘기였다.
수적으로 우세한, 상위급 플레이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라우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폭렬의 기사라 불리었던 사내다.
한 번 전장에 나타나면 반경 백 미터 정도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다는.
그 말은 즉 지금은 전력이 아니라 힘을 어느 정도 컨트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력을 개방하면 성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만.”
쇼펜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 사이사이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쇼펜과 라우니를 번갈아 보다가 무기를 거두고 물러섰다.
쇼펜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시체를 퍽! 하고 걷어찼다.
쇼펜은 라우니를 사납게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진짜로 날 막을 생각이었다면 이 허수아비들을 치우고 마법진부터 깨려고 달려들었어야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아직도 마음에 결정을 못 내렸나? 미련이 남았어?”
라우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주님이 있으니, 그리 무모한 선택은 할 수가 없는 거죠. 분명 막아서실 테니.”
쇼펜은 라우니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 되었구나. 너랑 검을 섞어 본 지가.”
쇼펜은 부하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시체 치우고, 물러들 가라.”
플레이어들이 즉각 시체를 챙겨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쇼펜이 템창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의 등 뒤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이 마법진은 작지만 엄청난 양의 생체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영지 안의 모든 베아트리체인을 삼킬 수 있을 만큼이며, 그 힘은 당연히 인근 적국을 단번에 초토화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마법진을 설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마력을 투자한 건 영주님이겠죠. 즉, 영주님은 기력을 소실한 상태고, 그 상태로 나를 막기란 힘들 겁니다.”
“친절하기도 하시지.”
쇼펜이 비웃으며 손에 쥔 검을 흔들었다.
그의 검은 라우니의 검과 비교하면 너무하리만큼 큰 차이가 났으나, 그 검에 스며들어 있는 요기(妖氣) 어린 피 냄새는 라우니의 큰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을 풍겼다.
“네 말대로야. 난 이 마법진에 큰 힘을 쏟아 부었지. 하지만 한 가지, 라우니 경이 모르는 게 있다면…… 자네가 나를 너무 그동안 과소평가했다는 점이겠지.”
“……!”
라우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빈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자신감이 분명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그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빈틈을 만들고, 그 빈틈을 파고들어 저 흉악한 마법진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후회는 없었다.
“안타깝군. 결정이 조금 빨랐다면 자네가 나를 막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고민했던 시간이 결국은 이리 잔혹한 결과를 만들지 않았던가?”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전 영주님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을 겁니다.”
“라우니 경이 그렇게 말하니 슬프군. 남자들끼리 꼴사나운 감정 얘기는 이쯤 하고, 그만 끝을 내지.”
쇼펜의 검에서 요기 가득한 마나가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