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198화>
* * *
눈을 뜨자 밝은 형광등이 가장 먼저 보였다.
불을 켜고 잔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민성은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쳤다.
창밖을 보자 잠깐 낮잠을 자고자 시작한 것이 한밤중이 되어 버렸다.
사내를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찬 민성이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걸음을 옮긴 후, 정수기에서 탄산수 한 잔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호성이 급박한 표정으로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민성은 탄산수를 마셨던 잔을 내려놓으며 거실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호성이 민성을 발견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헌터님…….”
“무슨 일이야?”
민성이 웬 호들갑이냐는 식으로 보며 물었다.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이호성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서?”
“헌터님의 집에서 자라는 나무. 사람들이 세계수라 일컫는 그 나무 말입니다. 그게 일종의 던전 게이트였어요. 시스템 문구가 나타났습니다.”
이호성이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반면 민성은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소파로 가서 앉으며 외려,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꿈속에서 나타난 사내가 한 말의 의중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호성이 그런 민상을 이상하다는 듯 보는 건 당연했다.
“헌터님……?”
민성은 그런 이호성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템창에서 ‘+0 듀랑달’을 포함한 몇 가지 아이템을 체크했다.
“강화 주문서 갖고 있어?”
민성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던 이호성이, 아차 하며 그 역시도 템창을 체크했다.
“3개 정도밖에 없네요.”
“쏠 불러와. 지금까지 모은 것 전부, 아이템부터 강화해야겠어.”
“주문서는 쏠이 가지고 있는 게 아마 많지 않을 겁니다. 해서 주문서까지 사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갔다 와.”
“네. 그리고 헌터님, 전화 혹시 꺼 두셨어요?”
“아니 왜?”
“출발하기 전에 전화했었는데 안 받으셔서요.”
“아, 자고 있었어.”
“네. 그럼 제가 주문서 구하는 대로 바로 전화드릴 테니까, 전화 혹시 꺼져 있으면 켜 주십시오.”
민성이 가 보라는 짧은 손짓에 이호성은 꾸벅 인사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 * *
고블린은 탐욕스럽다.
그것은 지극히 충동적이며, 본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황금 고블린 쏠은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조금 달랐다.
기본적으로 사치품이거나 값비싼 아이템에 취하기는 해도, 본능보다는 감성이 많이 발전했기에 조금이 아니라 전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현재 ‘쏠’은 화려한 방 안에서, 암컷 고블린들이 자신을 향해 구애라고 볼 수 있는 눈빛과 몸짓을 사방에서 쏟아 냄에도 불구하고, 별달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엔 암컷 고블린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수컷으로서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 쏠은 암컷 고블린들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암컷 고블린들은 보면 볼수록 실망스러웠고, 또한 저급했다.
그저 침이나 질질 흘리며 본능에만 휘청거릴 뿐, 대화를 할 수도, 제대로 된 교감을 나눌 수도 없었다.
이제는 암컷 고블린들이 자신을 만지는 것이 되레 신경질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허탈함에 빠져 있던 쏠은,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면서 이호성이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고블린과 달리 인간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생명체였다.
“쏠, 네 주인님이 널 찾으신다.”
주인!
그 두 글자에 쏠은 눈이 번쩍 뜨이는 걸 느꼈다.
쏠은 요즘 들어 가슴에 허전함이 심각하리만큼 강해지는 걸 느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계약자와 거리가 떨어지게 되면서 발생한 문제라는 걸 자각하게 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서 주인을 만나고 싶었다.
쏠은 암컷 고블린들의 손길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서둘러 암컷 고블린들로 가득한 장소를 벗어났다.
떠나가는 쏠을 보며, 암컷 고블린들이 사방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울음소리를 쏟아 냈다.
* * *
“헌터님, 저희 왔습니다.”
이호성이 쏠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통유리 너머의 도시 야경을 보고 있던 민성이 이호성과 쏠을 돌아보았고,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던 바가지가 타닥타닥 뛰어가 쏠에게 달라붙었다.
오랜만이라 반가운지 쏠도 빵긋 웃으며 바가지를 들고 춤을 추듯 뱅글뱅글 돌았다.
“그만.”
민성의 말에 쏠이 바가지를 들고 엄청난 속도로 뱅글뱅글 돌던 것을 멈췄다.
“쏠, 넌 최고의 아이템들을 꺼내고, 이호성, 넌 주문서를.”
이호성이 템창에서 수북한 주문서를 꺼내 민성의 앞 테이블 쪽에 올려놓았다.
족히 수백 장, 아니, 천 장은 가뿐하게 넘길 만한 양이었다.
“구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하하.”
이호성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수고했어. 시작하자.”
쏠은 이미 황금 주머니 안에서 아이템을 빠르게 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가지가 신기해하며 구경했다.
황금 주머니 안에서 아이템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왔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저장 능력을 갖고 있는 황금 주머니라 그런지 끝없이 나오고 있었다.
저대로 가만히 두다간 이 집 안이 온통 아이템으로 가득 찰 수 있었기 때문에 민성은 강화 주문서를 아이템에 바로바로 쓰기로 했다.
“첫 번째부터 마인의 듀랑달입니까?”
이호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성의 손에 쥐어진 무기, ‘+0 마인의 듀랑달’을 보며 말했다.
“순서에 성공 확률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니잖아?”
민성의 덤덤한 말에 이호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 그렇죠. 다만 보통 사람들은 좋은 무기일수록 긴장이 되는 만큼 그 순서를 후순위로 미루는 편이죠.”
“이거 별로 좋은 거 아닌데?”
“……네?”
이호성이 눈을 토끼처럼 뜨면서 되물었다.
민성은 대답하지 않고, +0 마인의 듀랑달에 무기 주문서를 사용했다.
이미 일전에 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것도 없이 민성은 거침없이 무기 마법 주문서를 사용했다.
+0마인의 듀랑달은 +4의 단계에서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민성은 손을 탁탁 털면서 이호성에게 눈총을 보냈다.
“안 지르고 뭐 해?”
민성이 이호성을 보며 물었다.
“예?”
“아이템 강화해야지. 이 많은 걸 그럼 나 혼자 하라고?”
“저도 한다고요?”
“하기 싫어?”
“그게 아니라요, 헌터님. 이게 무슨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아이템들인데. 제가 정말 손대도 괜찮은 겁니까……?”
“왜 이렇게 혀가 길어. 뽑아 줘?”
“그럴 리가요. 정말 영광이라서 그렇습니다. 바로 시작 할게요.”
이호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이템을 챙겼다.
“바가지, 너도 이리 와서 강화해.”
민성이 말했다.
“앗! 정말요? 감사합니다, 주인님!”
민성의 명령에 바가지가 재미난 놀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신난다는 듯 타닥타닥 뛰어와 아이템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는 사라졌다.
반복 노동이라는 게 보통 대화를 삼키기 마련이었다.
월드 타워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민성의 일행이 아이템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한 공장의 생산 과정과도 같았다.
값을 매기기조차 힘든 엄청난 아이템들이, 그렇게 마치 공장처럼 마법 주문서에 의해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 * *
“휴…….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이호성이 쌓여 있는 아이템들을 보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쏠의 황금 주머니에서 나온 아이템의 양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거실에서 출입구 방향으로 오른편은 강화가 성공된 것.
왼쪽은 아직 강화를 해야 할 아이템으로 구간을 나뉘었는데, 화장실을 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아이템이 바닥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엄청 날려 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믿어지지가 않네, 정말.”
이호성이 아이템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와, 진짜 대박이다. 푸하! 무슨 드래곤 레어도 아니고, 강화 성공된 아템들도 그렇고 이건 뭐. 웃음밖에 안 나오네.”
이호성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오른편에 분류된, 강화가 성공된 아이템들은 무기는 최고 +7검 이상이었고, 방어구와 액세서리는 최소 +4이상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템들은 단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 없었던, 신규 아이템이자 최고의 아이템들이었다.
이렇게, 방구석에서 나뒹구는 취급을 절대 받아서는 안 되는 그런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민성의 일당으로서는 계속해서 이 일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보통 강화라는 게 엄청 심장 떨려 가면서 뜨느냐 안 뜨느냐 거의 생사에 기로에 가까운 긴장감으로 하는 건데. 이건 같은 아이템이 많아서 그런지 진짜 일하는 기분이네요.”
“시끄러워. 바가지처럼 입 닫고 해.”
“알겠습니다. 그 전에 주문서 좀 사야 할 것 같아요. 담배 한 대 피면서, 주문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그럼 10분간 휴식하는 걸로.”
“휴우, 진짜 다시 봐도 대단하네요. 강화 주문서를 천 장을 넘게 사 왔는데 말입니다.”
이호성이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아, 참. 중앙 기관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현장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도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민성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이동했고, 바가지도 힘들었는지 바닥에 발랑 누워 버렸다.
* * *
“몇 시간 만에 피는 담배냐. 크.”
이호성은 기다렸던 담배를 즐겁게 뻑뻑 피우며, 자신의 강화 주문서 공급처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 예. 박 사장님. 이호성입니다. 주문서가 더 필요해서요. 물량 있어요?”
- 아니, 천장을 넘게 샀는데. 더 필요하다고?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 대체 무슨 작업을 하길래 그렇게 많이 필요한 거야? 무슨 장사라도 해?
“제가 헌터님 보조하는 거 아시잖아요.”
- 이야. 스케일이 다르구먼.
“그렇죠. 뭐. 아무튼 물량 있으시죠?”
- 얼마나 필요해?
“어디보자.”
이호성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템들을 눈으로 체크한 후에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넉넉하게 한 300장? 그 정도만 더 보내 주시죠. 돈은 지금 바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 아이고. 거의 딱 맞네. 아주 거덜을 내는구만.
“돈 많이 벌고 좋으시잖아요.”
박 사장이 껄껄 웃었다.
- 그래그래. 조만간 술 한번 살게. 시간 내라고.
이호성은 혀를 찼다.
“술 먹을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살아 돌아올지가 걱정이네요.”
-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이호성은 아차 싶었다.
민성의 첫 번째 집,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에 게이트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1급 기밀에 해당하는 극비 사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