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197화>
이어진 민성의 ‘마계’라는 말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호성이 다가서며 물었다.
민성은 나무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마인, 그리고 마신이 일종의 거름 역할을 한 거겠지.”
“그게 무슨…….”
김지유 역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간단해. 마인과 마신이 소멸하면서 뿌린 그 파편의 흔적이 곧 거름이 되어 이 나무를 성장시킨 거다. 그 이후 이렇게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양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거고.”
이호성과 김지유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나무를 보았다.
‘결국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게, 이 말이었군.’
민성이 꿈에서 만난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참, 헌터님. 그 듀랑달 말인데요. 강화하다가 날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호성이 민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건 그냥 +0짜리. 여분이다.”
여분으로 ‘마인의 듀랑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호성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가 민성이 지금까지 잡은 마인과 마신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무, ‘+7’짜리가 아니라서 안 부러지나?”
이호성은 민성의 차가운 눈길에 어색하게 웃었다.
“노, 농담입니다, 헌터님. 하하. 저 그런데 그보다, 어쩌죠? 헌터님의 공격도 먹히지 않는 나무라니. 어쩐지 불안해지는데요.”
“어쩌긴 뭘 어째. 일단 지켜봐야지. 연구는 계속해.”
민성은 불편함이 남은 얼굴로 퇴장했다.
* * *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아왔다.
이곳 역시 이호성의 추천 맛집 중 하나였다.
자신의 집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때문에 조금은 예민해져 있었던 탓으로, 민성은 방해를 받지 않고자 미리 식당을 통째로 빌렸다.
[김 할머니 보쌈 본점]
과연 그 맛은 어떨까?
민성은 기대감을 안고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식당을 통째로 예약을 한 만큼, 식당 안은 종업원밖에 없었다.
민성은 등허리를 댈 수 있는, 푹신해 보이는 길쭉한 소파 형태의 테이블을 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종업원이 바로 다가와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게 준비해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해 왔다.
민성은 그러지 말고, 메뉴판을 보여 달라고 했다.
굳이 식당 전체를 빌렸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한 끼를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늘 먹던 것처럼, 평범하게.
민성은 그게 좋았다.
과유불급이라고, 과한 것은 불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메뉴판을 받아, 메뉴를 확인한 뒤.
더덕 명태 1인 보쌈을 주문하고, 공깃밥 하나와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그 정도면 딱 충분할 듯했다.
주문을 마치고 잠시 후, 민성을 위한 보쌈 메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차려진 건 당연히 기본찬이다.
테이블을 먼저 채우는 기본찬은 보쌈 전문점인 만큼 심플했다.
가지 무침, 양파 조림, 감자볶음, 김치, 콩나물국이다.
그리고 마늘과 고추, 쌈장과 새우젓.
이게 전부였다.
반찬이 다소 빈약하다고 할 수 있지만, 보쌈 전문점의 특징이었고, 결국 메인 음식은 보쌈이기에 민성은 차려진 기본찬들을 맛보며 보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반찬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업원이 촛불로 보쌈을 데울 수 있는 미니 화로를 가지고 와서 초에 불을 켰다.
그 위로 보쌈이 예쁘게 놓여 있는 판이 올라갔다.
그리고 뒤이어 진짜가 등장했다.
접시 위, 야채 주변을 마치 꽃처럼 장식한 새빨간 보쌈김치와 달달해 보이는 무말랭이 김치까지.
완전체가 스스로의 등장을 화려하게 어필했다.
강렬하면서도 다채로운 그 색깔만으로도 민성은 목울대가 꿀렁 하고 움직였다.
보쌈이 나오자마자, 바로 공깃밥과 김치찌개도 테이블 위로 등판했다.
어서 해치우는 걸 시작하자.
민성은 젓가락을 들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수육 고기를 집었다.
첫 번째는 김치와 수육 고기만 싸서 먹어 본다.
입안으로 한입 쏙.
빛깔만큼이나 밝고 상큼한 김치의 맛이 입속에 가득 퍼진다.
거기에 부드럽게 씹히는 수육 고기.
특히 껍질 쪽은 탱탱함을 전달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하지만 깊이마저 가지고 있는 수육 고기와 더불어, 새빨간 보쌈김치의 맛은 입안을 시작부터, 침샘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정말 맛있어.
민성은 자신의 집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에 대한 스트레스마저 잊은 채, 보쌈에 빠져들었다.
새하얀 쌀밥에 이어, 무말랭이의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진하게 녹아든 고춧가루의 맛은 수육과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며 어우러졌다.
보쌈이니만큼 이렇게만 먹어선 안 되겠지.
민성은 물수건으로 손을 슥슥 닦은 다음, 곧장 상추를 손에 들었다.
가장 먼저 김치를 깔고, 그 위로 수육을 얹은 다음 마늘과 고추, 그리고 새우젓 조금을 가미하고서 쌈장은 아주 조금만 넣어 동그랗게 싸서 말았다.
하얀 쌀밥을 한입 먹고, 그래도 예쁘게 말아진 쌈을 입안에 쏙 넣었다.
우물우물!
민성은 입안에 들어온 쌈을 힘 있게 씹었다.
가벼운 상추 안에서 마늘과 고추가 터지고, 쌈장과 새우젓이 함께하는 수육이 씹히는 맛은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더불어 즐거운 식감을 선사했다.
순식간에 보쌈 하나를 해치운 민성은 두 번째 쌈을 싸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이번엔 상추가 아니라 배추다.
아삭한 식감을 극대화시켜 주는 배추와 보쌈의 조합은 가히 깡패라고 해도 좋을 만큼 폭력적이다.
배추 위로 쌈장을 적당히 올리고, 그 위로 수육과 마늘 그리고 파란 청양 고추만 올려 살짝 말아 버림과 동시에 입안으로 넣어 씹었다.
어금니에 의해 배추가 으깨지듯 씹히면서 배추향이 콧속으로 삭 올라오고, 수육의 부드러운 풍미와 뒤이어 무말랭이를 먹었을 때의 달콤한 맛의 극치다.
그 상태에서 양파 조림을 삭 먹어서 아작아작 씹으니 그야말로 천상의 극치를 경험하는 듯했다.
보쌈이 뱃속으로 밀려온다.
민성은 가히 보쌈의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민성의 집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를 연구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학자로 구성된 연구진들은 나무의 계속되는 변화에 충격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민성의 말대로, 이것은 지구라는 별 전체를 위협할 만큼 두려운 식물이었다.
지구를 잡아먹는, 지구 전체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라니.
연구진들의 안색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연구를 하면 할수록 연구진들의 표정에는 지쳐 가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나무가 자라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데 반해, 연구의 진행 속도는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감과 두려움은 빠르게 가속되고 있었다.
* * *
민성은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집인 월드 타워로 돌아왔다.
나른하다.
통유리 너머로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낮잠은 민성이 식사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늘 깨어 있었던 마계와 달리, 편안하게, 해가 떠 있는 시기에 짧은 낮잠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민성이 가장 좋아하는 휴식이었다.
그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눕자마자, 민성은 부드러운 이불을 느끼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낮잠을 즐기고자 하는 민성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 *
새하얀 공간이다.
꿈속이지만, 꿈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
생생한 감각이 살아 숨 쉬는 곳.
민성은 또다시 ‘그놈’이 자신의 꿈에 허락 없이 들어왔음을 단번에 인지했다.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의식은 놀라우리만큼 선명했다.
저벅, 저벅.
익숙한 발소리에 민성은 짧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낮잠을 방해한 장본인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소년 같은 얼굴을 한 젊은 외양의 사내의 표정에는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는 달리, 상당한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민성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집에서 자라는 나무도 그렇고, 꿈속에 허락 없이 자꾸만 나타나는 저 인간도 그렇고, 하나같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순간 번뜩 하고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우리 집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그거 당신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민성이 물었다.
“아니. 나랑 관련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사내가 검지로 민성을 가리켰다.
“너랑 관련이 있지.”
“그 나무는 뭐고, 내가 왜 그 이상한 나무랑 관련이 있다는 거야. 설명해.”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정말로, 곧. 그런데……. 내가 전에 말했던 준비는 하고 있나?”
사내가 물었다.
“무슨 준비? 네가 말했던 그 새로운 세계를 대비한 준비?”
민성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난 한 번도 준비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 그런 건 결국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 일이니까.”
조금은 죽어 있는 듯하던 사내의 눈에서 약간의 흥미가 올라왔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사내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뜻이 강하게 서려 있는 눈으로 물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무엇보다 상황이라는 건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그 변수는 대부분 예측할 수 없어. 즉, 감각으로 즉각적인 반응이 훨씬 합리적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고.”
“당신이 곧 만나게 될 세계는, 지금까지 당신이 겪었던 세상과는 차원이 달라. 그래도,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어?”
“말귀를 못 알아들어 왜. 난 그딴 거 신경 쓰기 싫고, 지금 나한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너야. 꿈속에서 나타나는 너. 대체 뭐냐고, 너.”
민성이 미간을 구기며 공격적으로 말했다.
사내는 새하얀 땅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가 고개를 들어 속을 읽을 수 없는, 파란 눈으로 민성을 응시했다.
“후회하게 될 거다. 모처럼 기대했더니, 실망이군.”
“대답해. 너 누구냐고.”
사내는 이번 꿈에 나타난 이후로, 처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의 후광.”
“……뭐?”
“내 이름은 ‘미르 케스트’다. 기억하도록.”
민성이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 사내는 사라져 있었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고, 주변을 훑어봐도 어디서 그를 찾을 수도, 그의 기척을 느낄 수도 없었다.
새하얀 공간에 또다시 혼자 남게 된 민성은 바닥에 침을 툭 뱉었다.
“조언이든 뭐든 꼴 보기 싫으니까 내 인생에 나타나지 좀 말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민성이 그렇게 낮게 읊조렸을 때.
머릿속이 무거워지고 새하얀 공간이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겪었던 익숙한 일이기에 민성은 저항하지 않고 의식을 삼켜 오는 그 힘에 몸을 내맡겼다.
늘 느끼는 거지만, 통제를 당하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그런 감정을 끝으로, 민성은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