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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의 삼시세끼-166화 (166/352)

<귀환자의 삼시세끼 166화>

* * *

민성이 테이블에 짚었던 팔을 빼면서 허리를 세우고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내가 클리어한 마인의 탑은 테스트 서버였다. 그건 곧 조만간 본 게임이 시작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차피 탑은 내가 다 부숴 버리겠지만, 놈들이 튀어나오면 지켜야 할 방어선은 필요한 거니까. 방어선 구축을 시작해야 돼.”

민성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 말도 안 되게 높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던 마인의 탑이 겨우 테스트 서버에 불과하다니?

그건 곧 강민성이 없다면 이 세상은 끝장날 것이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있어, 내 조건은 한국에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물자를 너희들이 공급하는 거다. 필요한 모든 물량을, 공급할 것.”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물자 공급에 필요한 금액 자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그것은 곧 전쟁이 아닌 평화 협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충분히 수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거래 조건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였다.

이제부터는 하나라도 덜 뺏기고 싶은, 사사로운 욕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의 문제로 넘어갔으니까.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월드 헌터들은 모두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침묵했다.

그 침묵을 깬 건 이번에도 미국의 마스터 에단이었다.

“한국의 방어선 물자 공급이 최우선이라는 의미요?”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은 그뿐인 것이오?”

“각 헌터국의 국방비 10분의 1을 내 통장으로. 내가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방금 민성이 말한 것은 환단 부작용의 진정제와는 별 개의 문제였다.

민성 개인이 가진 국가의 무력은 전 세계를 압도한다.

때문에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은 세계 정치에서 발을 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국방비 예산이라는 것은 전쟁을 염두에 두고 투입되는 자금이다.

민성이 전쟁에 의지가 없음을 밝혔다는 것은 곧 세계 평화의 틀을 깨지 않겠다는 의미였으며, 세계 통치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는 얘기였다.

강민성이 무력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마치 십일조와 같은 금액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그러나 간단하게 해석할 만한 일은 아니다.

‘만약’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언제든 강민성은 고국을 버리고 새로운 길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이 말인 즉, 지금 강민성이라는 단 한 명의 인간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세워지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국방비 10분의 1은 미국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기에 월드 헌터들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협상은 없어. 가부 결정만 받는다.”

민성이 조건에 못을 박았다.

“우리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겠소?”

에단이 물었다.

“얼마나?”

“1시간.”

“가부 승인 결정은 메시지로 보내고, 만약 내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사안이 결정될 경우, 내일까지 계약서를 준비하도록. 다시 말하지만, 협상의 여지는 없다.”

민성은 넥타이를 한 손으로 천천히 풀어내면서 회의장을 나갔다.

민성이 나간 이후, 월드 헌터들만이 남은 회의장에는 소리 없는 적막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후, 가장 먼저 나온 소리는 한숨 소리였다.

* * *

민성은 디저트 라운지 하나를 통으로 빌렸다.

통유리로 된 창가에 앉아 김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라운지로 찾아오라고 말한 뒤, 통유리 너머의 금빛 조명이 비추는 잔디와 소나무를 보았다.

앞으로 마계가 본격적으로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아무리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도, 피해를 입을 것이다.

어쩌면 방어선 역시 쉽게 뚫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민성의 눈이 검게 깊어졌다.

이 찬란한 세상이, 그따위…… 더러운 놈들에 의해 무너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고 또 죽여서 소멸시킬 것이다.

잔디와 소나무를 보는 민성의 눈이 그 여느 때와 비교할 수 없게 차갑게 식었다.

* * *

김지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성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햇빛에 비친 그의 모습을 김지유는 잠시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민성이 돌아보자 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그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김지유는 조용히 민성을 보면서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회의실에 널 부르지 않은 이유가 궁금할 텐데.”

민성이 말했다.

김지유는 엷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민성이 창밖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마계에서, 놈들이 쏟아져 나올 거다.”

민성이 담담히 말했다.

김지유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어선을 구축할 거고, 세계 헌터국에서 한국을 위해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기로 했다.”

김지유는 말없이 민성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월드 헌터들이 내 제안을 승인한다면이겠지만, 승인할 거야, 아마. 선택지는 없으니까. 지금쯤이면 내 제안에 대한 후일의 대책을 논의 중이겠지.”

“…….”

“중앙 기관 병력은, 마인들의 침공에 앞서, 방어선 구축에 총력을 기울인다.”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버틸 수 있나요?”

김지유가 물었다.

“방어선은 깨질 거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

민성이 가감 없이 말했다.

김지유의 얼굴이 걱정으로 흐려졌다.

“놈들이 방어선을 뚫고 밀려들어 오겠지만.”

김지유가 침을 꿀꺽 삼키고 민성을 보았다.

민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 결국 방어선을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김지유가 민성을 빤히 보았다.

“고마워요.”

통유리 너머의 풍경을 보고 있던 민성이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마라. 어느 누구가 아니라 결국은 날 위해서니까.”

“알고 있어요.”

민성이 김지유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그리고…… 지킬 거예요. 민성 씨 말대로 방어선은 오래 버티지 못하겠지만. 이 세상이 더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전력으로.”

민성은 김지유를 빤히 보다가 시선을 내리며 짧게 한숨 쉬었다.

“뭐 별로 미덥진 않지만…….”

민성이 잠시 입을 닫았다가 다시 김지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믿어 볼 수밖에.”

그 말에 김지유가 따뜻한 눈으로 민성을 보았다.

민성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일어섰다.

“월드 헌터들의 결정이 떨어지면, 네게도 연락이 갈 거다. 승인 메시지를 확인하는 즉시, 움직여. 놈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김지유가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어쩌면, 방어선이 구축되기도 전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네요.”

민성도 김지유가 보고 있는 창밖을 보았다.

잠깐의 소리 없는 침묵 끝에.

“그건 최악의 상황이다.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시간을 끌 수 있을지에 대한 대책안을 마련해야 할 거야.”

김지유가 민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민성이 먼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방어선을 만들기도 전에 놈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라…….”

민성이 얼굴을 굳혔다.

“그건 나도 좀 무섭네.”

민성이 몸을 돌렸다.

김지유는 라운지를 나가는 민성의 등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남자이기에, 이 세상엔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존재했다.

김지유는 천천히 일어서 창밖의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반드시, 반드시 버티고 버텨서 지킬 거예요. 비록 민성 씨에 비하면 우리 모두 힘이 없지만.”

김지유가 의지가 담긴 눈으로 달빛을 응시했다.

“당신이 우리를 믿고, 강한 마음으로 싸울 수 있도록.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김지유는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에서 배어 나온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그렇게 의지를 맺는 말을 뱉었을 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김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 월드 헌터 헌터장 전원 Mr. 강민성의 제안 수락.

전 세계 헌터국에서 한국을 위한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물량 지원이 승인됨.

지금 즉시 방어선 구축을 시작할 것.

김지유는 휴대폰을 꽉 쥐고, 라운지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이호성은 코를 훌쩍이면서 눈치를 살폈다.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는 빌딩의 옥상.

민성은 난간 앞에서 야경을 보고 있었고, 이호성은 민성의 호출에 현재 옥상으로 올라온 상태였다.

말없이 야경만 보고 있으니 이호성은 머쓱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이호성.”

민성이 야경을 보며 그를 불렀다.

이호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두 발자국 정도 나아가 섰다.

“네, 헌터님.”

“내 성격에 문제가 있나?”

“……예?”

“왜 질문을 두 번 하게 해.”

민성이 섬뜩한 시선으로 이호성을 돌아보았다.

이호성은 헙! 하고 숨을 삼키며 등 뒤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저, 그게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하시니까…….”

“나도 어느 정도 자각은 하고 있다. 예컨대 널 대할 때라든지.”

이호성은 눈치를 보면서 이마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제가 아닌 일반 사람들을 대할 때, 헌터님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뭐 그런 질문이세요?”

“비슷하다.”

‘맞으면 맞는 거지, 비슷한 건 또 뭐야? x발.’

아, 그나저나 이거 솔직하게 얘기해야 하나?

이호성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솔직하게 말해라.”

“별로 기분 안 좋으실 텐데…….”

“조금 있으면 공식 언론 인터뷰가 있어. 시답잖은 문제로, 공사에 시간을 지체할 만한 일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아아…… 그렇군요.”

이호성도 전해 들었다.

민성의 계획에 대해서.

마인들이 언제 이 세계를 침범할지 모르니, 방어선 구축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는 게 민성의 입장이었다.

이런저런 문제로 시간을 지체하다간, 방어선을 만들기도 전에 마인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신기할 것도 없지.

사실상 식당 지키자고 그러는 건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말해라. 이호성.”

민성이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야경을 보며 재촉했다.

“진짜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는 거죠? 뭐 얘기 끝나고 절 옥상 밑으로 던진다든가. 죽도록 팬다든가…….”

“그런 건 없다. 약속하지.”

이호성은 눈알을 돌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다른 일도 아니고, 공식 석상을 앞두고, 자신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체크가 필요한 만큼, 사실을 전달하는 게 그를 모시는 입장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본분이었다.

이호성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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