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118화>
에단이 칼날 같은 눈으로 민성이 떠난 방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저놈에게 끌려다녔다간, 마인이 아니라 이 세계가 저놈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 아니겠소?”
에단의 말에 헌터장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침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돈을 밝히는 것 같으니, 그를 설득하는 것은 차후에 해도 늦지 않소.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우리가 성장하여 앞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인까지 잡은 마당에 더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에단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헌터장들은 더 이상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상이 심각한 자들은 탑 밖으로 먼저 내보내기로 결정되었다.
힐러의 신성력을 미국 헌터들에게 집중하는 게 탑을 클리어하는 데 유리했고, 미국 헌터가 아닌 이들은 애초에 탑에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을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타국 헌터들 일부가 부상자들을 데리고 탑 아래로 내려가자, 미국 헌터들이 전위에 서서 9층의 레이드를 이어 가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성이 빠지자, 미국 헌터들을 제외한 월드 헌터들은 급격한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 *
김지유는 각국에서 차출된 인원과 함께 부상자를 이끌고 탑을 내려갔다.
타국은 팀장인 반면, 김지유는 한국의 헌터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탑을 올라갈 만큼 기력이 온전하지 않았다.
그건 강민성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레이드 공격대에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탑을 내려가는 동안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 김지유는 넋이 나간 채로 걸었다.
총군주로서의 책임을 다해 본분만큼의 결과를 만들어 내리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이 가슴속에 돌을 얹은 듯 묵직하게 자리 잡아 있었다.
“총군주님, 괜찮으십니까?”
새로 부임된 조사단장의 물음에 김지유는 사색에서 깨어났다.
“아, 괜찮아요.”
김지유는 괜찮은 척했지만, 조사단장이 보기에 그녀의 상태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부하의 입장으로서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어려웠다.
김지유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꾸만 민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김지유는 숨을 고르고 앞을 똑바로 보았다.
듣자.
귀를 기울이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 증명해 내는 거야.
그의 말대로 설령 자리만 차지하는 헌터 기관의 군주라고 해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들여야 해.
힘들다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자리도 아니며, 자신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지쳤다거나, 힘들다는 이야기는 결국 책임을 내버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김지유는 다시금 상처가 생긴 곳에 각오를 바르며,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폈다.
어느덧 1층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타국의 헌터들과 함께 김지유는 탑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 * *
검은 로브의 사내는 탑에서 헌터들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벗어 두었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환단이 들어 있는 차량은 집결지 부근 뒤편에 숨겨 두었다.
잠시 후, 부상자를 수송하기 위한 팀이 하나둘 육지의 땅을 밟기 시작했다.
인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지만, 그들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절대 이 유혹을 이겨 낼 수 없다.
로브의 사내는 그렇게 확신하며 바위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 * *
육지에 올라온 이들은 치료를 위해 간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사이, 팀장급 헌터들은 막사 밖에서 담배를 태우거나 간단히 술을 마셨다.
김지유만이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그때, 팀장급 헌터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로브의 사내가 나타났다.
헌터들은 예고 없이 나타난 로브의 사내를 경계 가득한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누구냐, 넌?”
팀장 헌터 한 명이 로브의 사내를 쏘아보며 물었다.
로브의 사내는 말없이 품 안에서 명패를 꺼내 보여 주었다.
삼천교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명패.
그것을 보고 헌터들의 얼굴이 급격히 얼어붙었다.
삼천교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사, 삼천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로브의 사내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만큼 삼천교를 증명하는 명패의 힘은 강력했다.
경계하던 눈초리는 사라지고 헌터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파고들었다.
“긴히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 따라오도록.”
로브의 사내는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서, 헌터장의 회의실로 쓰는 천막 안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들어갔다.
팀장급 헌터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마지못해 로브의 사내를 뒤따라갔다.
김지유 역시 긴장한 얼굴로 그들과 함께 천막으로 향했다.
* * *
“내가 여기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건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기 위해서다.”
상석에 앉은 로브의 사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헌터들은 긴장한 얼굴로 로브의 사내를 직시했다.
그들로서는 헌터장도 아닌데 이렇듯 큰일을 논의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섞여 들어 있었다.
하지만 삼천교에서 나온 자의 명령에 의해 섣불리 행동하거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로브 사내가 자신들을 찾은 이유를 밝히기만 기다렸다.
“미국 헌터들이 강해진 걸 느꼈을 테지.”
로브의 사내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헌터들이 일제히 흠칫 몸을 떨었다.
김지유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이 ‘설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로브 사내가 환단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미국 헌터들은 본 교에서 나눠 준 이 환단을 복용했다. 그 결과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 이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연구한 결정체로, 복용하는 즉시 능력이 몇 배로 성장하는 잠재성 그 자체이지.”
로브 사내의 말에, 헌터들은 이제야 궁금했던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층에서 마인 하나를 잡지 못해 헤맸던 월드 헌터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미국 헌터들의 눈부신 활약에 의해 마인을 잡았으니,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의심스러웠던 차였다.
그 모든 이유가 삼천교를 배후에 둔 성장에 있었다니…….
헌터들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헌터장들 역시 이 환단을 복용할 생각이 있는지 그 뜻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로브 사내의 말에 헌터 팀장 하나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지금 즉시 연락을 해서 답을 듣고 돌아오겠습니다.”
한 명이 나가자, 그를 따라 줄줄이 천막을 빠져나갔다.
천막에 남아 있는 것은 로브 사내와 김지유, 둘 뿐이었다.
김지유는 굳은 얼굴로 로브 사내를 마주 보았다.
“난 한국의 헌터장입니다. 따로 보고를 올릴 필요는 없죠.”
로브 사내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가장 먼저 답을 듣게 되는 것은 한국이 되겠군.”
“어째서-”
“……?”
“어째서 미국에게 먼저 환단을 나누어 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차피 나누워 줄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로브 사내가 김지유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증명이 필요했지. 처음엔 미국의 헌터 마스터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결과를 확인했을 때, 비로소 미국 헌터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었지. 불필요한 분란을 배제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로브 사내가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지유의 눈에는 의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째서 중국은 그 귀한 환단을 나누어 주는 거죠?”
“탑은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높은 난이도의 던전. 이 환단이라면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희생 없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이 없다는 뜻인가요?”
로브의 사내는 짧게 한숨 쉬었다.
“한국의 헌터장. 가부의 결정만 내려라. 더 이상의 질문은 무례로 간주하겠다.”
살벌한 살기가 무럭무럭 나와 김지유를 집어삼켰다.
김지유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협박성 압박을 위한 오러의 표출임에도 불구하고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김지유가 점점 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로브의 사내는 살기를 점차 거둬들였다.
숨 쉬기가 조금 편해진 김지유는 다시 시선을 들어 로브의 사내를 보았다.
“……저는 환단을 먹지 않을 것이며, 우리 기관의 헌터들에게도 복용시키지 않을 생각입니다.”
“삼천교의 이름을 걸고, 먹지 않는다 해서 불이익은 없다. 다만 이 환단을 먹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큰 격차가 더욱 벌어질 텐데. 그럼에도 이 기회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김지유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번복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 환단을 받지 않겠어요.”
김지유가 거절을 표하고 일어서자, 로브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보았다.
김지유는 미련 없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 * *
삼천교의 환단을 거부하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팀장들은 모두 하나같이 해당 사안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메시지를 전송 중이었다.
마인의 탑 안에서 통화는 불가해도, 인터페이스 시스템을 통해 문자 메일을 발송하는 건 가능했다.
김지유는 그런 그들을 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치가 오른다고는 하나, 힘에 눈이 멀어 정체도 알 수 없는 환단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김지유는 가까운 바위에 앉아 탑을 응시했다.
하늘은 먹구름을 품었고, 마탑 주변으로는 사나운 날씨가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강민성이 떠난 탑 안에서 그들은 무사히 뜻대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마탑에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답신을 받은 팀장 헌터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저 환단을 먹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미국의 헌터들은 대부분 삼천교의 환단을 복용한 듯했다.
만약 삼천교에서 다른 꿍꿍이를 품고 환단을 나누어 준 거라면?
그런 생각을 하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김지유는 차라리 제발 자신의 판단이 틀렸기를 바랐다.
* * *
미국의 헌터 마스터 에단은 당황스러웠다.
삼천교에서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고는 전혀 예기치 못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헌터장들은 시스템 메일 메시지를 받았다.
미국 헌터들이 강해진 이유는 삼천교에서 나눠 준 환단 때문이며 현재 그 환단을 복용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헌터장들은 동요했고, 마음속에서는 이미 그 유혹에 백기를 든 상태였다.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미국 헌터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자신들의 공격은 마인에게 대미지를 제대로 입히지 못해 경험치 역시 소량밖에 먹지 못했다.
대미지를 입힌 만큼 경험치를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기에, 단순한 파티 경험치만 먹는 건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고, 헌터에게 있어 더딘 성장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