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96화>
* * *
“……그렇단 말이지.”
미국 헌터 마스터 에단이 2급 조사단 팀장 마이크의 말에 침음을 흘렸다.
물에 흠뻑 젖은 채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고를 올린 마이크의 이야기는 그의 모습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1층에서 단 한 마리의 몬스터에 의해 2급 조사단이 팀장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는 것은 에단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갑질과도 같은 짓거리에 시간을 낭비할 여력이 없었다.
국가 재난 위기 상황이다.
탑의 형태를 가진 던전은 미국의 맨해튼에 나타났고, 이는 지금까지 만나 온 그 어떠한 던전보다도 강력했다.
세계적으로 힘을 규합해야 한다는 김지유의 판단이 맞았다.
“빌어먹을.”
에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현재로서는 김지유의 말대로 헌터 정상 회담을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 * *
미국에 의해 탑에 대한 정보 일부가 오픈되었다.
이를 토대로 미국은 긴급 헌터 정상 회담을 열었다.
각국의 헌터 기관이 참석 의사를 밝혔고, 거기에는 한국의 김지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워프 게이트 건물 앞에 도착한 김지유가 차에서 내리며 피식 웃었다.
배제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 한국도 회담에 부르는 걸 보면 여간 심각한 게 아닌가 보네.
하긴, 이런 심각한 재난 상황에서 자존심을 따질 순 없겠지.
김지유는 워프 게이트 건물에서 뛰어나온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장시아와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자 확실히 어린 느낌이 났다.
TV에서 최근 유명세를 강하게 타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던지, 그녀들은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 신기해했다.
그런 친구들과 달리 장시아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문득 인류의 위기를 앞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어차피 강민성이 잠들어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건 일상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꼬리뼈가 근질근질했다.
마치 병에 걸려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심정이랄까…….
처음엔 어차피 죽을 가능성이 높은 거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자였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더 머릿속을 무겁게 눌렀다.
준비해야 한다.
대비해야 한다. 라는 두 가지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아저씨?”
장시아의 친구 중 하나가 이호성을 불렀다.
이호성은 그녀의 부름에 사색에서 깨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다.”
휴대폰만 보고 있던 장시아가 이상하다는 듯 이호성을 보았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호성은 드륵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황당해하는 장시아와 그녀의 친구들을 뒤로하고, 이호성이 카페에서 나왔다.
장시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따라 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녀가 샐쭉한 표정으로 묻자 이호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헌터님 깨어나시면 전화 좀 해 줘.”
이호성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차량으로 걸어갔다.
* * *
각국의 헌터장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둘 회담장 안으로 들어왔다.
김지유는 비치되어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꼈다.
모든 대화는 통역사에 의해 전달된다.
통역사들은 회담 테이블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잠시 후 미국 헌터 마스터 에단이 회담장 안으로 들어왔고, 헌터 정상 회담이 시작될 준비를 앞두었다.
헌터 정상 회담은 최초 미궁이 나타났던 때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약 10년 만의 헌터 정상 회담.
다들 미궁을 클리어한 전례가 있기에, 각국의 헌터장들은 그다지 동요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회담장 안에서 가장 크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에단이었다.
김지유는 에단의 그런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굳어진 이유가 회담이 시작되자 밝혀졌다.
“탑에 2급 조사단 1부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팀장을 제외한 전원이 탑 1층에서 사망했습니다. 팀장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조사단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에단이 한 말의 파장은 컸다.
각국 헌터장들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놀란 건 김지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 헌터 기관의 2급 조사단은 비록 2급이라고 할지라도 세계 무대를 두고 봤을 때, 그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2급 조사단 1부대가 팀장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그것은 곧 탑의 수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단은 굳은 얼굴로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었다.
“하여, 각국의 정상급 헌터들을 맨해튼으로 집결해 주시기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탑을 미국이 독식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크다.
그건 타국의 헌터장들에게 있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만큼 위험한 사태에 직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김지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가장 강한 헌터들을 보유하고 중국은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이 있는 만큼 현 사태를 관망하겠다는 태도였다.
전혀 변하질 않는구나.
김지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집에 응해 주실 분들께서는 앞에 준비되어 있는 서류에 날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단은 직설적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각국의 헌터장들은 다소 미적거렸다.
정보가 부족한 만큼 판단이 서지 않아서다.
그 모습을 보고 에단은 표정이 없는 포커페이스로 말을 이었다.
“이번 요청에 응하지 않는 나라는 탑에 대한 정보가 단절될 것입니다. 최초의 미궁이 나타났던 지난 10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임을 자각하시길 바랍니다.”
에단이 가장 먼저 펜을 들어 서류에 날인을 찍었다.
“해당 임무의 모든 작전과 정보는 서류에 날인을 찍은 이후 진행될 겁니다. 2시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날인을 찍지 않으실 분들은 자리를 비워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담장을 떠났다.
김지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에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쿨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데에는 결국 하나의 이유일 터.
욕심.
아직 욕심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버릴 카드는 버리고, 손에 들어온 카드만으로 게임을 지배하겠다.
중국이 회담에서 빠진 이상, 공격대는 미국의 주도 아래에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 와중에도 센 척이라니.
역시 에단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에단의 협박은 결론적으로 통했다.
회담에 참석한 모든 나라가 에단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만큼 탑의 존재가 이들을 자극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이름 있는 헌터장들이 협조 의사를 밝힌 만큼, 에단으로서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회의는 곧바로 공격대를 준비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 * *
마인의 탑에 대한 뉴스가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사람들은 한국에 탑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그 안도감이 불안감으로 넘어가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컨대 중앙 기관의 정예 병력이 탑 조사에 움직인다는 소식이 뉴스로 나왔을 때, 시민들은 커다란 불안감에 휩싸였다.
- 중앙 기관이 미국을 도와주러 가면 우리나라는?
- 탑을 조사하고 있을 때 다시 던전이 나타나면 어쩔 거야!
- 미국 힘 세잖아. 굳이 우리나라가 도와줘야 돼?
시민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인터넷.
SNS로 퍼지던 불만이 실제 움직임으로까지 나타났다.
시민 단체 중 하나가 중앙 기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다.
한국을 지켜 달라는 시위였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의견을 담은 시위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중앙 기관의 정예 병사들은 예정대로 미국으로 출발했다.
시민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지만,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푸념이나, 반드시 살아 돌아와 달라는 응원뿐이었다.
* * *
각 헌터국의 정예 헌터들이 미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언론사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촬영했고, 방송국 카메라는 그 어떤 때보다 치열하게 움직였다.
각국의 헌터들이 맨해튼의 집결지로 모여들자 그 장소는 마치 거대한 야외 파티장을 연상케 했다.
화려한 갑옷에 화려한 무기.
그리고 눈부신 아우라를 뿜어내는 최상위 헌터들의 존재감은 그들이 단순히 모여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모든 헌터들이 맨해튼에 집결했을 때, 그 인원수는 약 300여 명에 달했다.
단순히 집결지에 헌터들이 모여드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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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헌터들은 별달리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워낙 헌터들의 숫자가 많기도 했고, 최상위 헌터들인 만큼 자신들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집결지에 모인 헌터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자부심이 용기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용기가 군대를 이끈다.
그것은 굳이 리더가 나서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런 분위기를 함께하지 못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대한민국의 중앙 헌터 기관이었다.
김지유는 유치하다는 듯 웃었다.
미국 헌터들을 비롯해 각국의 헌터들은 모두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의 헌터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중앙 기관의 마크를 미국을 배신한 각인처럼 보고 있었다.
전투가 일어난다면 한국의 안위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겠다는 듯.
미국 헌터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을 무시했던 것처럼,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세계라는 무대를 두고 볼 때 한국은 약소국에 속했고, 약소국 주제에 배신을 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철저히 한국을 배제하고 있었다.
타국의 헌터들에게 한국 헌터들은 마치 투명인간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이건 무슨 심보일까요? 이럴 거면 초청은 왜 한 거야.”
군단장의 볼멘소리에 김지유는 쓰게 웃었다.
“총군주님. 저희 그냥 빠져도 될 것 같은데요? 굳이 가 봐야 별달리 좋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여론도 안 좋고요.”
군단장의 말에 김지유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있었을 때 이유야 어떻든 미국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미국 헌터가 다치기도 했고.”
“그렇지만…….”
“거기다 저번엔 탑의 조사단 제안까지 거절했으니, 타국에서 볼 때 한국의 헌터 기관은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그거 다 미국의 정치질 아닙니까? 결국은 덩치 큰 미국에서 한국을 누르려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순순히 고기 방패가 되어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에 자극 받지 말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김지유가 헌터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따로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신 겁니까?”
군단장의 물음에 김지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탑을 응시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천둥 벼락은 계속해서 번쩍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