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83화>
지금까지의 미궁 던전과는 별달리 특별한 차이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단지 야광석이 밝히고 있는 방 안의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이 모두 검은색이라는 불쾌한 점만 빼면.
이호성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리 강민성이 있다고 해도 미궁에서 무사히 생존하기란 힘들 것이다.
괜히 미궁에 들어오겠다고 허세를 부렸나?
이호성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쩔을 받겠다는 욕심 때문에 민성을 따라 미궁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가 물었다.
미궁에 들어갈 것이냐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고, 강해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 두 번째 이유다.
하지만 막상 미궁 안으로 들어와 고행 난이도라는 소리를 들어 보니, 단순히 자신의 결정이 무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두려움이 물밀 듯이 명치 안으로 파고 들어와 가슴속을 장악했지만, 이호성은 그 두려움을 떨쳐 내고 싶었다.
더 이상 바보처럼 굴지 말자.
무모한 선택이 아니다.
강민성이라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있으니까.
그가 있기에 전진이 가능한 것이다.
그를 완전하게 믿으면,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다.
방심은 하지 않되, 최선을 다해 생존한다.
훗날, 엄청난 적들을 상대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이호성은 결심을 굳힌 얼굴로 템 창에서 ‘데스나이트의 검’을 꺼냈다.
그 모습을 민성이 흘깃 보았다.
“주접떨지 말고 방패 들어.”
“……예.”
이호성은 조용히 데스나이트의 검을 템 창 안에 다시 넣고 방패를 꺼내 들었다.
민성은 대기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입문 앞에 섰다.
자동문이 열리자 던전이 그 웅장한 세계를 드러냈다.
오픈 던전이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울퉁불퉁한 바닥에는 곳곳에 용암이 흐르고 있는 게 보였다.
자칫 실수로 용암을 밟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발가락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이호성은 그런 오픈 던전의 풍경을 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X나 무섭다.
민성을 보았다.
자신의 주군 강민성은 최고 난이도를 넘어선 고행 난이도를 맞이했음에도 언제나처럼 예의 침착함과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외려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을 지긋지긋하게 겪어 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다.
지옥을 경험했었다고.
대체 강민성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민성의 걸음이 빨라지는 걸 보고 이호성은 황급히 머릿속에 떠다니는 잡다한 생각을 깨끗이 정리했다.
잡생각은 금물이다.
이호성은 방패 손잡이를 꽉 쥐고 민성의 뒤를 바짝 쫓아 붙었다.
* * *
로브의 사내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채 거실로 나왔다.
그는 전신 거울 앞에서 수건을 내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한쪽 눈을 앗아 간 기다란 상처가 드러났다.
로브의 사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상처를 보며 손으로 매만졌다.
그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로브의 사내는 거실 테이블 위에서 벨소리를 내고 있는 휴대폰을 돌아보며,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 명령이 떨어졌다.
휠체어 사내의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 강민성 때문에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벌어졌다. 그 틈을 파고들라는 지시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지?”
- 상세 계획은 이메일로 확인해. 그리고 비행은 1시간 후, 김포 공항 출발이다.
로브의 사내는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신규 미궁을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미국이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 테러의 수위가 높은 만큼, 분명 미국은 예상 범위 안에서 움직이겠지. 전면전까지는 아니겠지만 어차피 헌터 숫자를 줄이는 거면 충분하다고 하니까.
“알았어.”
- 머지않았어. 조금만 힘내자.
로브의 사내는 시력이 남아 있는 한쪽 눈으로 허공을 보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잠깐의 상념 끝에 빠르게 외출을 준비했다.
* * *
방패를 꽉 붙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발밑을 조심해서 걷는 이호성과 달리, 민성은 여유롭고도 빠른 걸음으로 용암이 들끓는 바닥을 지났다.
이호성으로서는 단순히 민성을 뒤쫓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정도였지만, 민성은 그런 이호성의 상황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몬스터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좀 이상한데?”
민성이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이상하다고요? 뭐가요?”
이호성이 잔뜩 긴장해 있는 얼굴로 물었다.
“던전이 열렸는데 몬스터가 안 보이잖아.”
민성의 말대로였다.
웅장하고 위험해 보이는 오픈 던전은 생명체가 살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혹시 전의 보스 몬스터처럼 헌터님을 피하는 게 아닐까요?”
이호성이 추측을 담아 말했다.
민성은 이호성의 그 추측이 그럴듯하게 느껴져 짜증이 치솟았다.
미궁을 클리어하고 빨리 뭐라도 먹고 싶었는데, 미국 헌터들도 그렇고 자꾸 시간이 질질 끌리는 것 같자 속에서 열이 점점 더 뜨겁게 가열되는 것 같았다.
감각 기관을 열어 주변을 훑어봐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호성의 말대로 작정하고 숨어들었거나, 아직 필드에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어? 이거-”
그때, 이호성이 의아한 눈으로 바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발자국 아니에요?”
민성은 이호성이 보고 있는 바닥을 보았다.
그의 말했던 것처럼 바닥에는 발자국처럼 보이는 것이 남아 있었다.
이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게 아니라 마치 길처럼 쭉 이어져 있었다.
“따라가 보자.”
민성이 앞장섰다.
이호성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민성과 함께 발자국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체감상으로 꽤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을 무렵, 발자국이 끊어졌다.
민성은 발자국이 끊어진 곳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유리관 수조가 보였다.
그 안에, 인간과 닮은 형상을 한 몬스터가 눈을 감은 채로 죽은 듯이 물속에 푹 잠겨 있었다.
마치 생체 실험관처럼 보였다.
가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암놈이었고, 그런 몬스터의 몸에는 수많은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수조 바깥에는 암놈을 닮은 몬스터가 민성과 이호성을 경계가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검은 잿빛의 피부에 새빨간 눈.
뿔이 달려 있고, 온몸에서는 그로테스크한 검은 기운이 풀풀 풍겨져 나온다.
민성은 그 몬스터를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점점 흐릿해져 가던 기억이 일시에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마인.
마계의 몬스터, 마인이다.
하지만 수조 바깥에 있는 저것은 정확히 마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아직 성체를 이루지 못한 소(小)마인이니까.
이곳 현세에 마인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민성의 기분을 다운시키기에 충분했다.
모처럼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현실 세계를 망가트리려고 하는 주체가 마인이라니…….
민성은 소마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소마인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콰르르릉!
천둥이 울리며 소마인의 손에 은빛의 기다란 창 한 자루가 쥐어졌다.
“알리다 펜 타야크 투우.”
소마인이 말했다.
이호성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민성은 소마인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계에서 살아남은 세월이 100년이 넘는다.
마인의 언어는 이미 습득되어진 지 오래였다.
“몬스터를 배양하고 있는 게, 네놈의 암컷인가?”
민성이 소마인을 향해 마인어로 물었다.
인간이 마인어를 구사하자 소마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인간이 마인어를 할 수 있는 거지?”
민성은 얼굴을 굳혔다.
“알 필요 없어. 곧 죽을 테니까.”
그러곤 오리하르콘 단검을 휘둘렀다.
번쩍거리는 빛의 궤적이 소마인에게로 향했다.
소마인은 민성의 공격을 피해 풀쩍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민성이 발출해 낸 일직선의 마기가 방향을 틀며 거대한 유리관 수조로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며 용암이 출렁였다.
오리하르콘 단검에서 발출된 마기가 유리관 수조를 때리며 커다란 충돌이 일었지만, 유리관 수조는 민성의 공격에도 작은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민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위로 들었다.
소마인은 접어 놓은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에 떠오른 채 민성을 내려다보았다.
“답하라. 어떻게 인간이면서 마인어를 알고 있는 건가?”
민성은 소마인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마계에서 왔거든. 검은 학살자라고 들어 봤나?”
순간 소마인의 빨간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민성이 공중에 떠 있는 소마인을 향해 뛰어오르기 직전, 소마인의 형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민성은 주변을 살폈으나 그는 어느새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사이, 유리관 수조에 잠겨 있던 여성체 마인이 몬스터를 출산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수조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쏟아지기 시작하는 몬스터의 수는 기하급수적이었다.
민성은 짧게 혀를 찼다.
자신의 정체를 알자마자 소마인이 도망가고 말았다.
전투적인 성향을 가진 건 성체의 마인뿐이다.
‘놈이 소마인이라는 걸 간과했어.’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을.
지겹도록 뒤엉키며 알아 왔던 게 마인이었는데, 현세로 돌아왔다고 그 점을 잊어버리다니.
민성이 짧게 혀를 찼을 때였다.
“허, 허, 헌터님.”
이호성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공포에 질린 채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여성체 마인이 배출시킨 건 모두 같은 종의 몬스터였다.
그리고 민성에겐 그 몬스터들 역시 낯설지 않았다.
마계에서 지겹도록 봐 왔던 몬스터들 중 하나였으니까.
데빌 가고일.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는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다.
일반적인 던전에서 만날 수 있는 가고일과는 다르게, 데빌 가고일은 차원이 다른 고강도의 외계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데빌 가고일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호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 태세를 잡았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고 있는 데빌 가고일을 보고 있자니, 이호성은 당장이라도 오줌을 지리기 직전이었다.
자신감이나, 민성을 향한 신뢰 같은 것으로 보호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압도적 공포에 이호성은 감히 대응할 수 없어서 그저 방패 손잡이만 꽉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다리가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미궁에서 만났던 몬스터 헤켈에 비하면 그 크기가 10분의 1도 되지 않을 크기의 몬스터였지만, 공포감은 몇 배나 뛰어났다.
데빌 가고일이 뱀처럼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블랙 브레스를 뿜었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데빌 가고일이 뿜어낸 블랙 브레스가 이호성과 민성을 향해 그 힘을 합치며 날아왔다.
곧 자신을 덮쳐 올 검은 불길을 보며 이호성은 턱을 덜덜 떨었다.
그때-
민성이 이호성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며 앞으로 나아가 오리하르콘 단검을 휘둘렀다.
번쩍!
콰르르르르르르릉!
마치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새하얀 빛이 검은 불길인 블랙 브레스와 함께 가고일을 덮쳤다.
수십 마리의 가고일은 마치 어둠이 빛을 받은 것처럼 일시에 증발하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에 이호성은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던 데빌 가고일이 마치 한낱 악몽에 불과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호성의 두 눈에 비치는 건 유리관 수조를 향해 고요히 걸어가고 있는 민성의 뒷모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