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81화>
* * *
민성이 떠난 자리는 마치 폭풍이 지나간 듯했다.
이호성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바닥에 철퍽 주저앉으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들 들어가. 사냥을 계속해 봐야 사상자나 부상자만 나올 뿐이다.”
이호성이 힘없이 말했다.
미국 헌터들도 떠난 마당에, 다이아몬드 클랜의 전력만으로 이 산을 계속해서 수색하는 건 무리였다.
다이아몬드 클랜원들이 하나둘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호성만이 클랜원들이 떠나는 자리에 홀로 남아, 담배를 피웠다.
모두가 내려가고, 조민욱이 이호성의 옆에 앉아 같이 담배를 피웠다.
조민욱이 침묵을 깬 건 이호성이 담배를 다 피웠을 때였다.
“대체 누구예요? 그 남자…… 미국 헌터 팀장을 그렇게 떡으로 만들다니.”
이호성은 검은 하늘을 보며 한숨 쉬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민욱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호성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마 강민성이 몬스터를 잡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
“그가 누구냐고?”
이호성의 말에 조민욱이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서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몰라.”
이호성이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조민욱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오늘 사건을 미국에서 알게 된다면…….”
이호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미국이 한국을 치려고 한다면 끝장이야.”
조민욱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이 진짜 위험할지도…….”
“아니. 미국이 끝장이라고.”
“……네?”
조민욱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이며 이호성을 보았다.
하지만 이호성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 * *
“총군주님. 보고 사항입니다.”
예고 없이 나타난 미궁 던전을 올려다보던 김지유는 부하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조사단장이 미국 헌터들이 모여 있는 쪽을 잠시 보았다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것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좋은 소식부터.”
“도심으로 빠져나간 몬스터의 수가 급락했다는 정보입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오늘밤 안에 모두 정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김지유의 표정이 밝아졌다.
“잘됐네. 나쁜 소식은?”
“저기, 그게…….”
조사단장이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말해 봐. 어서.”
“그게…… 한국의 헌터 한 명이 미국 헌터들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확히 설명해.”
“한국에 1지원 팀장으로 온 ‘칼리스’라는 자가 한국 헌터 한 명에게 치명상을 입고 현재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김지유가 굳어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굳이 다른 누군가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누가 칼리스를 건드린 것인지 추측이 갔다.
한국에서 칼리스를 건드릴 수 있는 인간은 그 남자 한 명뿐일 테니까.
“하…….”
김지유는 손으로 뜨거워진 이마를 덮었다.
“어쩌죠? 곧 미국 헌터들도 이 사실을 알 게 될 겁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미국 헌터들 귀에도 머지않아 그 사실이 들어가고 말았다.
미궁 탐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시점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미국 헌터들의 분위기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다.
미국 헌터 지원 총책임자, 조나단이 화난 얼굴로 김지유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조나단이 김지유를 향해 따져 물었다.
그의 성난 외침에 김지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처가 될 수 있을까?
패닉 상태가 머릿속을 파고들자 제대로 정리가 된 답변이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파악 중에…….”
“우리 헌터가 다친 이상,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건 인정하겠지요?”
김지유는 길게 한숨 쉬었다.
그사이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이번 미궁 탐사에 대한 한국의 권한을 박탈했으면 합니다.”
순간 김지유의 눈이 커졌다.
“……그런.”
“또한 우리 헌터를 다치게 한 한국 헌터에 대한 처분 역시 확실히 했으면 합니다. 이만한 처우면 충분히 그대의 사정을 봐주는 거라 보고 있소만.”
“그래서…… 이번 미궁 탐사에서 완전히 빠지라는 말씀이십니까?”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건 없는 조건이다.
피해 리스크 없이 미궁을 처리할 수만 있다면.
원론적으로는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한국의 미래는 뒤로 물러나게 되는 셈이다.
지금이야 안전할지 몰라도, 이 한 번의 물러섬이 나비 효과처럼 번져 어쩌면 국가의 명운을 뒤흔들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당장 그에 대한 결정을 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뿐더러…….”
“당신이 한국 군사권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소만. 이 정도 결정 권한도 없다고 지금 말하고 싶은 거요? 그렇다면 우린 지금 바로 전 병력을 한국에서 철수시겠소.”
김지유는 뒷골이 뻐근했다.
미국 헌터 기관에서 지원 온 총책임자 조나단은 지금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결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30분만 시간을 주세요.”
조나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콧방귀를 꼈다.
“5분 드리지.”
김지유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려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강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꽤 오랜 신호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강민성 씨?”
- 누구?
“지금쯤이면 적어도 목소리는 좀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번호 저장 좀 해요. 김지유예요.”
- 왜 전화했지?
“당신이에요? 미국에서 지원 온 헌터를 다치게 했다는 게.”
- 아마도.
김지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도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예요!?”
- 그냥.
애초에 대화가 되지 않는 것 같아 김지유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이제 어쩔 거예요. 강민성 씨 당신에게 책임을 묻고 미궁 탐사 권한을 넘기지 않으면, 미국에서 지원을 끊겠다고 했다고요.”
- 꺼지라고 해, 그럼.
“이봐요, 강민성 씨. 지금 국가 위기 상황이에요. 그렇게 감정에 치우쳐서 애들처럼 굴어선…….”
- 그놈들한테 기댈 필요 없어.
“얘기했잖아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 몬스터 위치만 보내. 도시에 있는 몬스터. 그리고 뭔지 모를 미궁까지 내가 오늘 안에 정리할 테니까.
김지유는 머릿속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그건 황당한 자신감에 어이가 없는 게 아니라, 예기치 못한 설득력이 가슴속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정말, 그게 가능해요?”
- 지금까지 몬스터를 잡은 수만 봐도 바보가 아니라면 납득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면 강민성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헌터를 다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멀쩡히 사냥을 계속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힘이 어쩌면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만큼 신중해야 해요, 강민성 씨. 미궁 안에 어떤 몬스터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 김지유라고 했나? 당신이 이 나라 헌터 쪽 총책임자라며? 근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몬스터든 미궁이든 내가 정리하면 돼.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남은 거지?
김지유는 핸들에 머리를 대며 땅이 꺼질 듯이 한숨 쉬었다.
“……미국과의 사이가 틀어질 거라고요. 대책을 마련해야…….”
- 대책 없이 헤매고 사는 건 그쪽 아닌가? 나랑은 관계없어.
김지유는 멍한 얼굴이 됐다.
맞는 말이다.
반론이 안 나온다.
“하긴, 늘 피하고 도망치는 건 나였을지도.”
뚜우, 뚜우, 뚜우.
전화가 끊어졌다.
김지유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정말 대단한 남자다.
그때, 똑똑- 하고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밖을 보자 조사단장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김지유는 눈을 감고 핸들에 이마를 댔다.
이상하게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미국 헌터들을 그렇게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라니.
강민성은 단순히 강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김지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핸들에서 머리를 떼고 차에서 내렸다.
조사단장이 불안감이 깃든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순간 문득 강민성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대책 없이 헤매고 사는 건 그쪽 아닌가?
그의 말은 자신의 가슴속에 남았다.
아픈 상처로 남을 만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민성에게는 힘이 있다.
미국이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이유는 강력한 헌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점에서 보면, 한국에 강민성이 있다는 것은 역사가 바뀔 만한 터닝 포인트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
강민성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미래를 본다면, 분명 무엇이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강민성에게 이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김지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겁쟁이구나, 난.
지금 같은 모습은 한 나라의 총군주로서 실격이야.
김지유는 마음을 굳힌 얼굴로 조나단에게 다시 돌아갔다.
조나단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김지유의 말을 기다렸다.
시간을 지체한 것에 책임을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김지유는 그의 얼굴을 보자 구역질이 났다.
자신이 세상을 쉽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나아가면, 그 역사가 이내 결과를 바꾸리라고 믿고 있었다.
오래전의 역사가 지금을 만들어 왔듯이.
그러기 위해선 뜻을 펼쳐야 한다.
‘물러서는 게 아니라, 총군주로서 한 걸음 나아가야만 해.’
그게 자신의 정의라고 생각하며, 김지유는 조나단의 앞에 섰다.
“주어진 시간을 지체한 만큼 내가 만족할 만한 대답이어야 할 거요.”
조나단이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눈빛으로 김지유를 보며 말했다.
그에 김지유는 얼굴을 굳혔다.
“팀장 칼리스가 먼저 우리나라의 헌터들에게 실례를 범하셨더군요.”
김지유의 말에 조나단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라……?”
조나단이 당장이라도 칼을 빼내 들 것만 같은 얼굴로 김지유를 노려보았다.
김지유는 그런 그의 눈빛에 주눅 들거나 동요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이었다.
“인간 병기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 바로 헌터. 그런 헌터를 용인하는 이유는, 몬스터로부터 인명을 구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팀장 칼리스는 우리나라 헌터들의 목숨을 그저 방패막이로밖에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봐, 한국의 책임자. 지금 너무 뻔뻔하게 나오는 거 아니야?”
김지유의 아름다운 눈에 파란 불꽃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