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77화>
* * *
“……예?”
“네가 미끼가 되라고.”
민성이 팔짱을 끼고서 이호성을 보며 말했다.
이호성은 힘이 하나도 없는 환자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보스 몹의 미끼가 돼서 유인하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래. 미궁 전체를 돌았지만 보스 몬스터가 있는 룸이나 장치 같은 건 없었어. 분명 날 피하고 있는 거다.”
이호성이 잠시 숨을 멈췄다가 바가지를 가리켰다.
“저보다는 몬스터랑 비슷하게 생긴 바가지가 낫지 않을까요?”
이호성의 말에 바가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을 들어 이호성에게 던졌다.
이호성은 이를 무시하곤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민성을 지켜보았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죽기 전에 보스 몹은 내가 처리할 건데 뭐가 걱정이야?”
민성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기 헌터님. 고소 공포증 환자가요, 안전한 놀이기구를 안 타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왜? 무서우니까요. 그런 상식적인 이유로…….”
“그럼 그 상식적인 이유로 여기서 천년만년 살면 되겠네?”
“그건 아니지만, 바가지도 있고…….”
“시키는 대로 해.”
민성이 마지막 경고라는 듯 눈빛을 빛냈다.
결국 이호성이 체념한 얼굴로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민성을 보았다.
“그래서 계획은요?”
민성은 주변을 한차례 훑어보곤 이호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기척을 숨기고 은신을 하고서 널 뒤따를 거다. 네가 보스 몹을 찾으러 다니면, 놈은 추적을 느껴 널 먼저 제거하려고 들겠지.”
“그럼 헌터님이 애초에 처음부터 그냥 은신해서 추적하시면 되지 않나요?”
“미궁이 넓어서 차라리 미끼를 뿌리는 게 빨라. 그러니 놈과 마주치게 되면 놈을 자극해라. 그사이에 내가 접근할 테니.”
“헌터님. 근데 헌터님이 멀리 계시면 제가 보스 몹한테 한 방에 훅 갈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민성이 한숨을 쉬면서 템 창에서 오리하르콘 단검을 꺼냈다.
그에 기겁한 이호성이 민성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시작하시죠, 헌터님.”
* * *
자신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던 ‘검은 학살자’가 추적을 포기한 것 같았다.
미궁의 주인인 보스 몹 헤켈은 그제야 숨을 좀 쉬겠다는 듯 안정을 취했다.
도망 다니는 건 충분히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조함과 불안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헤켈은 안전해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상대는 다름 아닌 마인도 죽이고 다닌 ‘검은 학살자’니까.
영혼석을 삼키며 약간의 허기를 채우던 ‘헤켈’은 누군가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해 냈다.
영혼석을 내팽개치며 긴장을 끌어 올렸던 헤켈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은 학살자라고 하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아니, 약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허접한 수준의 존재감이다.
헤켈은 먼 거리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발동시켰다.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인간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검은 학살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헤켈은 뱀처럼 생긴 눈을 요사스럽게 빛냈다.
검은 학살자와 달리, 천지를 모르고 미궁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저 인간은 한입거리도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흩어져서 자신을 찾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생각이 잘못됐어.
저 추적의 꼬리를 먼저 잘라 내야겠다고 헤켈은 마음속으로 결정 지었다.
헤켈은 남아 있는 영혼석을 자신의 커다란 입에 몽땅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생명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영혼석을 단숨에 씹어 삼킨 헤켈이 악마와도 같은 날개를 퍼덕이며 놈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만약 검은 학살자의 기척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 전에 저 나약한 인간 정도는 단숨에 씹어 삼킬 수 있을 듯했다.
대체 이런 곳에 어째서 검은 학살자가 나타난 건지 한탄스러운 심정으로 헤켈은 속도를 높여 날아갔다.
* * *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에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 ‘검은 학살자’와 달리 놈은 벌레와도 같은 수준에 불과했다.
헤켈은 혹시나 주변에 검은 학살자가 있지 않을까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다행히 놈의 기척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헤켈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호성을 보며 손톱을 세웠다.
손톱이 길게 솟아나면서 거대한 창처럼 변했다.
헤켈이 놈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그때-
“푸풉! 푸핫! 푸하하하하!”
갑자기 이호성이 배를 붙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헤켈은 그런 이호성을 황당하다는 듯이 보았다.
저 인간 놈, 공포에 질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호성이 여전히 웃음을 흘리면서 손가락으로 헤켈을 가리켰다.
“너, 네가 진짜 보스 몬스터냐? 너 진짜 도망 다니고 있던 거였어? 푸하하! 미궁의 보스가 뭐 이래!”
그가 실성한 것처럼 웃어 댔다.
헤켈은 그런 이호성을 보며 피부를 덮고 있는 단단한 붉은 비늘을 바짝 세웠다.
그러나 이호성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으로 헤켈을 올려다보았다.
“미궁의 보스 몬스터가 아니고 쥐새끼네, 쥐새끼. 야, 인마. 너보다 네 밑에 있는 몬스터들이 훨씬 더 용감하더라. 날 상대로도 도망가 보지 그래? 엉? 왜? 나한텐 덤비려고?”
헤켈은 약이 바짝 올랐다.
저 인간 놈이 뭐라고 말을 하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분명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은 충분히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로군.
헤켈은 날개를 퍼덕이며 이호성을 죽이기 위해 그에게로 날아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호성의 얼굴은 점차 공포로 물들어 갔다.
정신 나간 놈.
이제 와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검은 학살자가 합류하기 전에 네놈은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니까.
“허, 헌터님?”
이호성이 말을 더듬었다.
바로 그 순간, 헤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감을 느꼈다.
설마, 함정……?
헤켈이 눈치를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뭔가가 자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에 곧장 몸을 돌리려 했으나, 이미 검은 학살자는 자신의 코앞에 당도한 후였다.
“이런 빌어먹을……! 거, 검은 학살자!”
헤켈이 침음을 흘리자, 눈부신 속도로 나타난 민성의 오리하르콘 단검이 새하얀 오러를 머금은 검기를 뿌렸다.
콰르르르르르릉!
검에서 오러 발출과 함께 천둥 벼락이 쳤다.
서걱!
민성의 오러 검기에 의해 헤켈의 팔이 찢어지고 날개가 너덜거렸다.
“크으윽!”
이미 거리가 좁혀진 이상, 검은 학살자와 다시 거리를 벌리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전면으로 붙는 수밖에 없는데, 상대는 검은 학살자였다.
괜히 지금까지 놈과의 전투를 피해 왔던 게 아니다.
헤켈은 질린 얼굴로 민성을 보며, 뒤로 물러나 방어에만 집중했다.
도저히 공격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포감이 마치 폭등하는 주식처럼 치솟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바보 같은 방심과 실수가 만든 참혹한 결과였다.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민성의 눈이 살심으로 물들자, 헤켈은 죽음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음을 느꼈다
“아, 안 돼. 살려…….”
검은 학살자. 민성의 검이 강렬한 궤적을 그렸다.
서걱! 서걱! 서걱 ! 서걱!
미궁의 보스 몬스터, 헤켈의 몸이 4등분으로 잘려 나가며 이내 소멸을 위해 폭발했다.
퍼어어어어어어어엉!
헤켈이 마치 유리 파편처럼 변하며 최상급 아이템을 떨어트렸다.
민성은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직접 주워 템 창에 넣은 후, 서둘러 미궁을 나가기 위해 이호성을 돌아보았다.
이호성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엎드려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이호성의 말대로 고소 공포증 환자가 최고 난이도의 놀이기구를 타면 어떤 모습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 * *
중앙 기관의 총군주 김지유는 미국 헌터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 황급히 1급 보안실로 뛰어갔다.
보안실 룸 안으로 들어가자, 부하들이 벌떡 일어나며 경례를 올렸다.
“바로 연결해 주세요.”
김지유가 빠르게 블루투스 헤드셋을 쓰며 말했다.
부하는 명령대로 곧장 영상 통화를 연결했다.
잠시 후, 커다란 화면에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미국 중앙 헌터 기관의 총군주이자 아메리칸 마스터, ‘에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지유가 다급함을 가라앉히며 화면을 향해 인사했다.
- 한국에 전례가 없는 미궁이 나타났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많이 어렵습니다. 최대한 미궁 밖으로 나오는 몬스터를 막아 내고는 있지만, 몬스터의 등급이 점점 오르고 있습니다.”
- 현재 저희 측 헌터들이 한국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순간 김지유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김지유의 감사 인사에, 미국 중앙 헌터 기관의 총군주 ‘에단’이 조건을 덧붙였다.
- 단, 지금부터 프로젝트는 우리 쪽 헌터가 주도할 것이며, 미궁 탐사 전권 역시 우리가 가져갔으면 합니다.”
그가 느긋한 태도로 답변을 기다렸다.
김지유는 어금니를 깨물며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미국의 주도하에 한국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것이 뼈아팠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를 위해, 위험에 처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유 없는 도움이 있을 리 만무하다.
‘미국의 선택과 우리의 대답은 충분히 합리적인 거래야.’
각성의 브레이크가 지나고서도 미국을 상대로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으나, 현재 힘을 빌릴 수 있는 건 미국뿐이었다.
“전폭적으로 협조할게요.”
김지유의 대답에 에단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 * *
미궁 밖으로 나오자 도로와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전봇대와 가로등이 부러져 있고, 바닥에는 핏자국이 있었으며, 조금 더 걸음을 옮겼을 때 5대의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 뒤로는 헌터들의 차량 역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미궁에서 나온 민성과 이호성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지나치면서 멀어졌다.
젠 브레드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규칙을 무시한 미궁에서 고등급의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계엄령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이호성이 휴대폰을 통해 뉴스 기사를 보며 말했다.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성의 말대로 계엄령이 떨어질 만했다.
마치 멸망하고 있는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도로와 거리가 망가져 있고, 곳곳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이호성과 조금 더 거리를 걷자, 죽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민성은 죄 없는 이들이 몬스터에게 살해당한 거리를 걸으며, 마음이 마치 돌을 얹은 듯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현세로 귀환한 후 처음으로 느껴 보는 낯선 감정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자 영업 중인 가게는 한 곳도 없었다.
모두 불을 끄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가 둔 상태였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가게 문들이 모두 잠겨 있는 걸 보자 강한 스트레스가 함께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