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72화>
이호성이 시범을 보였다.
“그렇게 안 하면 터지는 건가?”
“그렇습니다.”
“알았어.”
이호성이 꾸벅 인사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민성은 이호성이 말한 대로 주둥이 쪽을 꽉 잡아 누르며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이호성의 말대로 막걸리 병에서 거품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민성은 막걸리를 보며 고개를 주억인 다음, 대나무처럼 생긴 잔에 따랐다.
막걸리를 먹어 보는 건 역시나 이번이 처음이다.
어떤 맛일까?
민성은 기대감을 갖고 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꿀꺽!
막걸리를 세 모금 만에 원샷 했다.
잔을 내려놓는 민성의 눈에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
한국의 전통주 막걸리.
어쩜 이렇게 달짝지근한데 깊은 맛이 날 수가 있지?
보통 달기만 하면 다소 부담스럽기 마련이나, 이것은 단순히 달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신선이 노니는 계곡의 폭포와도 같은 맛이다.
민성은 입을 짝짝 다시며 해물 파전을 찢어 간장에 살짝 찍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으로 직행시켰다.
우물-♬
입안에서 해물 파전이 녹아내린다.
오동통한 오징어가 씹히자 아침 바다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해물 파전은 두껍지만 부드러웠다.
끝내주는군.
민성은 다시 본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흑미가 섞여 들어 있는 콩나물 해장국을 떠서 후후! 분 다음에 먹었다.
뜨겁다.
뜨겁지만 맛있어.
대체 이 미칠 듯이 맛있는 콩나물 해장국의 비결은 뭐지?
민성이 마치 추적자의 눈으로 해장국을 들여다본 결과,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 것에 있다는 사실을 캐치해 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계란이었다.
계란을 익힌 정도에 바로 그 비법이 있는 거였어.
익을 듯 익지 않은 계란이 완벽한 밸런스로 콩나물 해장국을 받쳐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맛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어 준 것이다.
민성은 한 술을 더 떠서 후우, 후우 분 다음, 콩나물과 야채를 함께 먹었다.
뜨겁고 따뜻하며 배 속이 후끈거린다.
다시 먹어 봐도 계란이 베이스로 된 이 국물은 그야말로 미쳤다!
깊은 맛에 부드러움의 극치를 더하니 천상이 있다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 민성은 잠시 콩나물 해장국을 두고 외도를 하기로 했다.
막걸리를 잔에 가득 채우고 다시 한 잔.
꿀떡, 꿀떡, 꿀떡.
해물 파전을 집어 입에 넣자 파전의 진한 맛이 간장과 함께 코끝을 삭 스친다.
황홀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이호성의 메뉴 추천은 그야말로 극상이었다.
반면 민성은 자신의 수준에 한심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너무 이호성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스스로 음식을 선택하고 먹는 것에 있어 홀로서기가 가능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건만, 이호성과 견주어 보면 자신의 실력은 밑바닥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너무 의존하지만 말고 정진해야겠어.
이호성에게 추천을 받아서 음식을 먹는 게 편하긴 하지만 그건 의미가 약하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만이 즐거움을 배가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민성은 원대한 맛집 로드의 포부를 굳건히 하며 해장국을 떠먹었다.
* * *
젠 브레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푸른 하늘이지만, 그는 그런 푸른 하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의 일부분이 조금씩 변형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일그러지고 있는 형태를 보며 그가 미소 지었다.
하늘을 한동안 올려다보던 젠 브레드는 손목시계를 힐끔 응시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확인하자 온몸이 근질거렸다.
특히나 천을 감아 놓은 오른손에서는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르르 울렸다.
파괴 충동이 손끝으로 몰린다.
젠 브레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술을 마셨다.
곧…… 신탁을 이루리라.
* * *
“누구지?”
이호성이 의아한 시선으로 미궁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보았다.
요즘은 헌터가 부족함에 따라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자주 출몰하고 있어서 위험한 시기였다.
그런 때에 미궁 앞에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이호성이 민성과 함께 미궁 앞에 도착하자, 두 명의 사내가 민성과 이호성을 보고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멀어졌다.
“뭐야, 저 자식들?”
이호성이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민성은 신경 쓰지 않고 던전 입장을 위해 게이트 라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호성도 재빨리 민성을 따라 라인에 섰다.
입장이 되려나? 제발 돼라, 제발!
이호성은 두 손을 꽉 잡고 마치 기도하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내 이호성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부양되고 있음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됐다.
입장이 가능해졌어!
던전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예의 그렇듯 어둠이 찾아오고, 다시 빛이 밝았을 때 시스템 음성과 메시지가 나타났다.
[미궁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던전을 클리어하기 전까지 미궁은 탈출할 수 없습니다.]
[난이도가 고정됩니다.]
[미궁 난이도]
[불지옥]
[지금부터는 몬스터의 등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합니다.]
[주의를 요하며, 클리어를 기원합니다.]
이호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몬스터의 등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고?
레벨 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막상 ‘미궁’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들어오고, 무엇보다 몬스터의 등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향되었다는 시스템 음성을 듣자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긴장으로 이마에 배어든 땀을 닦으며, 이호성은 템 창에서 방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강민성과의 파티 사냥에서 검은 필요 없다.
이런 무자비한 난이도의 미궁에서 자신의 공격은 전혀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전 재산을 털어 방패와 회복 물약을 샀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서 던전을 나오는 거다.
이 방패라면 생존 확률이 좀 올라갈 것이다.
그때, 민성의 주머니에서 바가지가 기어 나와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칵칵 웃으며 신이 난 듯 민성을 뒤따랐다.
“……긴장한 건 나뿐이구나.”
이호성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린 후, 민성과 바가지를 뒤따르기 위해 뛰었다.
* * *
분수대에 걸터앉아 마치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햇빛을 받고 있던 젠 브레드는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느릿하게 휴대폰을 들어 귀에 대자 목소리가 울려 왔다.
- 강민성이 미궁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위치는?”
젠 브레드가 나른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 사람을 보냈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미궁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분 내외입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멀리서 검은색 세단 차량 하나가 오더니 부근에서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검은 슈트 차림의 사내가 내려 젠 브레드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곤 시계 하나를 내밀었다.
“통화와 메시지가 가능한 것은 물론, 언어까지 해석해 주는 디지털 워치입니다. 미궁 안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특수 제작된 물건입니다.”
젠 브레드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빼서 분수대로 던졌다.
반짝거리던 스틸 시계가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사내로부터 디지털 워치를 넘겨받아 손목에 찬 뒤, 젠 브레드는 천천히 일어났다.
드디어 신탁을 이루러 가야 할 때였다.
젠 브레드가 치렁치렁하게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사내와 함께 검은 차량으로 이동했다.
* * *
어둠이 개이고 빛이 밝혀지자마자 민성은 앞장서서 걸었다.
짧은 복도 끝에는 엘리베이터가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형태의 던전이었지만, 민성은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탄 민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해?”
이호성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층수와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 엘리베이터…… 뭔가 불안해 보여서요. 갑자기 막 떨어지거나 그러진 않겠죠?”
그에 민성은 여기저기를 봤지만 다소 더럽고 먼지가 많은 것 말고 특별한 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민성의 채근에 이호성이 파리한 안색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왔다.
버튼은 총 두 개밖에 없었다.
1B, 그리고 1F.
민성은 1F를 눌렀다.
문이 닫히고 기이잉! 하는 엘리베이터 특유의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는 고작해야 한 층을 올라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 올라갔다.
약 1분 정도가 지나서야-
땅!
엘리베이터가 1층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종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광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민성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이호성이 입을 떡 벌린 채 민성을 따라 내렸다.
해가 쨍쨍한 밝은 대낮.
좌우와 등 뒤로 푸른 들판이 보였고, 전방의 멀지 않은 곳에는 거대한 회색의 벽이 세워져 있었다.
63빌딩보다도 훨씬 크고 높아 보이는 벽이다.
“저 커다란 벽은 대체 뭐죠?”
“벽이 아니다.”
“네? 벽이 아니라니……. 그럼?”
이호성이 민성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로.”
민성은 템 창에서 오리하르콘 단검을 꺼내며 답했다.
“……미로라고요?”
“그래.”
이호성은 다시 벽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벽 사이에 금이 가 있었다.
여기서 금이 가 있는 게 보일 정도면 가까이 가면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다는 얘기.
이호성은 납득했다는 듯 잔뜩 얼어 있는 얼굴로 숨을 탁 뱉어 냈다.
“정신 차려. 여기라면 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민성이 거대한 미로를 보며 말하자 이호성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러세요. 무섭게.”
“일반적인 미로라면 별문제가 없긴 하겠지만, 어쨌든 집중해. 겁만 집어먹고 멍청하게 있다간 끝이다.”
그에 이호성은 각오를 굳힌 얼굴을 무겁게 끄덕였다.
“……예.”
민성이 오리하르콘 단검을 꽉 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지금까지 겪어 왔던 던전과는 꽤 다른 느낌이다.
경계하라는 신호가 본능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난이도가 거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게 되자, 몬스터들의 등급이 그동안 보아 온 하찮은 것들과는 꽤 차이가 있는 듯했다.
그것은 이 던전 안의 공기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사선.
그 생사의 선을 수없이 지났던 민성이었다.
두려움이 언제부터 없어졌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다.
몬스터가 높은 수준의 등급을 갖고 있다는 것은 외려 민성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계에서부터 만들어진 포식자로서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미로의 입구 앞에 선 민성이 당당하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가지도 뒤뚱거리면서 따라 들어갔고, 이호성은 사색이 된 얼굴로 배를 틀어잡으며 뒤따랐다.
“아오…….”
민성이 의아하다는 듯 이호성을 보았다.
이호성이 쓰게 웃었다.
“……긴장을 너무 했는지 배가 다 아프네요. 하하.”
무더운 여름의 현세와는 달리, 던전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