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67화>
* * *
유명한 모 브랜드 커피숍에 도착했다.
민성이 수많은 메뉴들을 보며 고민하는 사이, 김지유가 카드를 꺼냈다.
“전 아메리카노로. 민성 씨는요?”
민성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팥빙수.”
김지유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보통 이럴 때 커피 먹지 않나요? 분위기상.”
“뭔 상관이야?”
“……그렇긴 하죠.”
김지유는 그 말 뒤로 조그맣게 ‘왕 싸가지’라고 덧붙였다.
민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다 들려. 그리고 난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니라 솔직한 거다. 뻔뻔하고 무례한 당신보다는 내가 2만 배는 지적인 영장이지.”
“뻔뻔하고 무례하다고요? 제가?”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안 나가고 버티는 것만 봐도 설명이 되지 않나?”
김지유가 민성을 쏘아보자 알바생이 괴로운 얼굴로 둘을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민성이 카드를 꺼냈다.
“계산은 따로.”
“제발 창피하니까 제가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굳이 산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지.
민성은 카드를 도로 지갑에 넣었다.
“좋을 대로.”
“여기 카드요.”
김지유가 카드를 쑥 내밀자 알바생이 재빨리 카드를 받아 포스기에 긁었다.
잠시 후, 김지유가 커피와 팥빙수를 들고 민성이 앉아 있는 창가 자리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커피숍 내에 있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김지유에게로 쏟아졌다.
한 남자는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김지유는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민성의 반대편 쪽에 서서 커피와 팥빙수를 내려놓았다.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보통 이런 거 남자가 들고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왜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레이디 퍼스트 같은 신사적인…….”
“적어도 당신 직급이면 페미니스트여야 하지 않나?”
“한 마디를 안 져요, 아주.”
김지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민성은 무시하고 스푼을 들면서 팥빙수를 내려다보았다.
심플한 팥빙수다.
하얗게 눈꽃처럼 갈린 얼음 위로, 팥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민성은 이 기본에 충실한 팥빙수가 마음에 들었다.
팥빙수는 자고로 녹이지 않고 먹어야 제 맛.
우선 얼음부터 먹는다.
눈처럼 쌓여 있는 얼음을 살짝 떠서 입에 넣었다.
차가운 얼음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단순한 얼음이 아닌 우유 얼음이다.
그렇기에 달고 맛있다.
이렇게 갈아 놓은 얼음만 먹어도 일품의 맛이 혀끝 위에서 춤을 춘다.
김지유는 팥빙수를 음미하는 민성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았다.
“진짜 처음이네요. 당신 같은 사람.”
민성이 고개를 들어 김지유를 보았다.
“무슨 뜻이지?”
“나 같은 미녀를 앞에 두고도 팥빙수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 애초에 팥빙수를 시키는 것 자체가 남다르긴 하지만요.”
“진심이라면 걱정될 정돈데.”
“농담 좀 받아 주고 해요.”
“본론으로 넘어가지.”
민성이 팥을 살짝 긁어서 눈꽃 얼음과 함께 먹었다.
달달한 팥과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얼음이 섞여서 황홀하게 입맛을 끌어 올렸다.
식사를 마친 직후인데도 너무 맛있게 먹어진다.
“그림자 길드로부터 하나의 정보를 받았어요. 당신이 에이스와 있었을 때 에이스가 말했죠.”
김지유의 얼굴이 진지하게 무거워졌다.
“머지않아 지옥이 열리게 될 거야. 결국 혼란을 막을 수 없겠지. 대혼란이 찾아올 거다. ‘마인의 탑’이 열리는 날.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라고.”
민성은 스푼을 놓은 뒤 의자에 허리를 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녀를 보는 시선에 불만이 가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주려는 게 아니라 받고 싶었던 거로군.”
김지유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팥빙수 샀잖아요.”
민성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깊게 한숨 쉬었다.
“강민성 씨.”
김지유의 웃던 얼굴이 다시 무거워졌다.
“뻔뻔하다고 생각해도 좋고, 무례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제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다가가야만 하는 문제예요.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민성은 김지유를 빤히 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조금만 기다려.”
그가 다시 스푼을 들고 팥빙수를 자신의 앞쪽으로 당겼다.
* * *
민성은 팥빙수를 깨끗하게 비웠다.
밥을 먹고 난 직후라 생각보다 양이 많았지만, 아침인 만큼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민성이 팥빙수를 모두 먹고 나자, 김지유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다 먹었어요?”
김지유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민성은 다 먹은 빈 그릇을 한쪽으로 치워 두고 허리를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김지유를 보았다.
이제 얘기해 보라는 민성의 눈빛에, 김지유가 숨을 한차례 고르고 민성을 보았다.
“마인 얘기 전에, 실은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무슨 부탁?”
“에이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어요. 중앙 기관의 헌터뿐만이 아니라, 일반 클랜의 헌터들까지.”
김지유가 착잡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헌터는 부족하고, 던전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고…… 이대로라면 자연히 시민들의 안전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김지유는 민성을 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지방 기관에서도 던전을 공략하는 데 있어 헌터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판국이에요. 서울이 에이스에게 타격을 입었다고 해서, 지방의 지원 병력이 올라올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도와 달라?”
“당분간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김지유가 간절한 눈으로 민성을 보며 말했다.
“얘기했을 텐데.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조만간 워프 게이트가 상용화될 겁니다. 알고 계신가요?”
민성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국내로 들어올 경우, 1회 이용료는 1억2천을 상회하게 될 겁니다. 도와주시는 동안 워프 게이트 이용을 강민성 씨에게 지원해 드릴게요.”
민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혀를 찼다.
“할당량은?”
“도와주시는 건가요?”
김지유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밥 먹는데 몬스터가 나돌아 다니면 밥맛 떨어지니까.”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워프 게이트가 아니라 그게 이유였군요.”
민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계산이 너무 안 되는 거 아니야? 미궁 하나만 처리해도 수십억이 떨어지는데. 내가 워프 게이트 무료로 좀 쓰자고 그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나라를 위한 일이에요. 이유야 어떻든 훌륭한 결정을 내리신 겁니다.”
김지유의 반짝거리는 눈이 민성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당분간이다.”
김지유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기관이 안정화될 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할당량은?”
“신규 생성되는 미궁만 부탁드립니다. 난이도 때문에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민성 씨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미궁은 얼마나 생겨나는 거야?”
“평균치로 볼 때 2주에 하나 정도예요. 보통은 미리 감지가 되지만, 최근에는 불규칙해지고 있어요. 때문에 미궁이 나오는 대로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 거예요.”
2주에 미궁 하나라니.
누워서 떡을 먹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너무 쉬운 일이다.
“일반 던전을 커버하는 데에 문제는?”
“저 역시 손이 부족한 만큼 직접 던전 레이드에 나설 겁니다. 제가 움직이면 커버는 충분할 거예요.”
기타 능력자의 영향력이 김지유의 말로부터 전해져 왔다.
수십, 수백의 헌터를 합쳐도 기타 능력자 하나보다 못하다는 것.
기타 능력자가 국가 권력의 핵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추가 기타 능력자가 나타나지 않는 실정이라고 하던데.”
“네. 대한민국에 남은 기타 능력자는 저 하나뿐이죠.”
김지유가 쓸쓸한 눈으로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먼 미래. 당신이 사라진다면?”
민성의 물음에 김지유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커피 잔을 어루만지던 김지유가 애써 웃음 지었다.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겠죠.”
공기가 무거워졌다.
민성은 신경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눈부실 정도로 신성한 아름다움을 가진 외모가 가까워져 온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민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이제 얘기해 줘요. 마인, 그리고 마인의 탑에 대해서.”
“그림자 길드에서는 알고 있는 정보가 없던가?”
김지유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전혀요.”
민성은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마계다.”
“마계라고요?”
“마계의 통로가 열린 것이겠지.”
“마계라면…… 악마들 같은?”
“아니. 조금 달라. 그냥 짐승이다. 그것들은.”
민성이 거북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째서 강민성 씨는 그 마계라는 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어차피 놈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내가 전부 다 죽여 버릴 거니까.”
민성의 말에 김지유는 흠칫 놀라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민성에게서 어두운 심연을 파고드는 살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김지유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커피숍 안의 일반인들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민성의 차가운 시선이 김지유에게 꽂혔다.
“만약 놈들에 대한 단서나 정보가 나온다면 나한테 넘겨. 어차피 너희들은 감당하지 못할 무게니까.”
“마인의 탑은…… 뭐죠?”
김지유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놈들이 세운 탑이겠지.”
“전력은요?”
“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인 열 마리 정도가 이 나라를 쓸어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30분 내외.”
민성은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말했지만 김지유는 그 이야기를 절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김지유가 충격을 먹은 얼굴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강민성 씨.”
“……?”
“대체 당신은 누구죠? 국적은 한국.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고. 추정 전력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해도 될 만한 헌터. 그리고 마계, 마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당신은…….”
“설명하기 귀찮아.”
민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김지유를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단서를 얻으면 찾아와. 그리고 더 이상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지 마라. 부탁을 들어주는 건 미궁 처리. 딱 거기까지다.”
민성은 그 말을 끝으로 커피숍을 나갔다.
김지유는 복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민성이 커피숍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