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47화>
* * *
인적이 없는 새벽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멈춰 서서 손에 있는 비행기 티켓을 내려다보았다.
멍하니 티켓을 보던 이호성은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대교가 보였다.
이호성은 홀린 듯이 그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대교로 올라간 이호성은 한강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 대교 중앙에서 우뚝 멈춰 섰다.
만약 이대로 해외로 간다면.
그럼 또 강민성은?
만약 자신을 찾았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강민성은 해외로 찾아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니까.
이호성은 담배를 초조하게 피우면서 슬쩍 한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높아서 살짝 오금이 저렸다.
그는 시커먼 한강물을 보다가 비행기 티켓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대박이네, 진짜. 도착지가 뉴욕도 아니고, 홍콩…….”
이호성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 맞는 길인지, 길이 있긴 한 건지 알 수 없는 혼란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바로 그때-
갑자기 끼이익! 하고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성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검은색 외제 세단 한 대가 긴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정차해 있었다.
차에서 최고급 슈트를 입은 4명의 남자가 내렸다.
이호성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헌터 네임이 없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기다란 도검을 들고 있다.
도검에는 묵직하면서도 진한 오러가 넘실거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이호성은 본능적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해외로 떠나지 않는다면 죽게 될 거라는 김지유의 말.
그 말은 공포탄을 쏘기 위해 격철을 내린 효과를 일으켰다.
이호성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4명의 남자들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등과 허리가 대교의 난간에 닿았다.
난간에 바짝 기댄 이호성의 얼굴에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너, 너희들 뭐야?”
이호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4명의 남자들은 제각기 반응이 달랐다.
도검을 든 남자, 북부 기타 능력자 김수현은 미소를 지었고.
동부 기타 능력자는 난간에 매달려 어린아이처럼 대롱거렸다.
서부 기타 능력자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고, 긴 머리가 치렁치렁한 남부 기타 능력자는 텅 빈 도로를 보며 담배를 피웠다.
“이런 피라미 잡는데 굳이 우리까지 나서야 하나?”
서부 기타 능력자의 말에 김수현이 싱긋 웃었다.
“이렇게 작업 치는 김에 얼굴 보면서 회의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하여튼 번거롭게 하는 녀석이라니까.”
그에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판을 짜 주는 녀석이 있어서 중앙 진출에 가담할 수 있었던 거잖아. 편승하고 있으면서 투덜거리면 안 되지.”
동부 기타 능력자가 난간에 매달려 한강물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서부 기타 능력자는 엷게 웃으며 눈매를 좁혔다.
“그건 맞는 말인데,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나?”
동부와 서부 기타 능력자 간의 눈빛 교환에 스파크가 튀었다.
김수현은 그런 그들을 보며 손을 들었다.
“아아, 거사 앞두고 우리끼리 이러지 맙시다. 이러다 중앙을 치기도 전에 우리끼리 박 터지겠네. 내가 이래서 친목을 위해 직접 자리를 만드려고 하는 겁니다.”
남부 기타 능력자는 유치한 싸움질에는 관심 없다는 듯 도로를 보며 담배만 연이어 피웠다.
동부 기타 능력자는 ‘예예-’ 하며 다시 한강물을 내려다보았고, 서부 기타 능력자는 콧방귀를 끼며 이호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부 말대로네. 이놈 티켓을 들고 있어.”
서부 기타 능력자의 말에 김수현이 이호성에게로 걸어갔다.
이호성은 식은땀에 가득 젖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김수현은 이호성이 들고 있는 티켓을 휙 낚아챘다.
티켓을 확인한 그가 이호성을 향해 티켓을 흔들어 보였다.
“홍콩행 비행기 티켓? 중앙 기관에서 주던가?”
이호성은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몸만 떨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지만, 기타 능력자로 예상되는 그들을 상대로는 이빨을 보이는 것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김수현은 이호성을 빤히 보며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스피커폰으로 통화가 연결되었다.
“아, 김지유 씨. 김수현입니다.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이호성 이자에게 비행기 티켓을 준다라……. 이러깁니까?”
- 미행한 건가요?
김수현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 시간을 준다고……!
“이봐요. 뒤통수를 친 건 우리 쪽이 아니라 당신이잖아. 약속을 어긴 건 당신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 너희들이 무슨 생각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지금 당장 칼을 거두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 협박? 전쟁을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우린 그 전쟁을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으니까.”
김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 …….
김수현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짧게 한숨 쉬었다.
“어차피 언제든 명분은 만들어질 겁니다. 이미 언론사 쪽도, 그림자 길드 쪽도, 사실상 매수가 끝난 상황이거든.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고.”
- …….
“김지유 씨. 집단이란 본래 대세를 따르는 법이에요. 그러니 혼자서 뭘 하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 그건 욕심입니다.”
- 만나서 얘기하죠.
“모든 게 준비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어요.”
김수현이 이호성의 바로 옆에서 난간에 팔을 기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바로 당신이 이호성이라는 인간을 싸고 도는 이유. 그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내전의 불씨를 원치 않을 뿐이야. 너희들의 중앙 집권은 전쟁을 위해서잖아. 그게 가당하다고 생각해!?
“처음엔 당신이 이호성을 지키는 이유가 그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호성을 죽이면 지방 기관이 더 이상 당신 손에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거. 때문에 전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 즉 당신 말대로 내전의 시작.”
- 그렇게 머리가 나쁠 줄은 몰랐는데, 안타깝네.
“에이. 센 척하지 맙시다. 당신 어차피 자존심 별로 없잖아요? 이 조국의 평화를 위해선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거. 그게 자존심 아니었나? 그래도 말이야. 이건 조금 이상하게 찜찜하단 말이지. 이호성이 설령 죽는다고 해도 그건 사실 생각하기 나름이거든요. 그냥 버리는 카드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당신이 이상할 정도로 깊게 들어온다는 거야.”
김수현의 눈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김수현이 이호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김수현은 이호성 쪽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이호성은 죽을 겁니다. 약속은 어기고 뒤통수를 친 건 당신이니까? 그럼 조만간 다시 뵙죠.”
김수현은 전화를 끊고 이호성에게 턱짓했다.
“받아요. 괜찮으니까. 마지막 유언 정도는 남겨 둬야죠.”
김수현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호성은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 보았다.
주군(主君) 강민성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강민성의 전화다.
이호성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디야?
“대교요.”
- 집으로 와. 밥 먹으러 가게. 혼자 먹으러 다녔더니 다 실패하네. 의외로 맛집을 찾는 게 쉽지가 않아.
“저 못 갈 것 같아요.”
- 왜?
“저 지금 곧 죽을 예정이라서요.”
- 네가 왜 죽어?
“누가 저 죽이려고 해서요.”
- 너 지금 나랑 장난…….
“저번처럼 거짓말하거나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이번엔 저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이호성이 훌쩍이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식사는 혼자 다니셔야 할 것 같…….”
- 그 새끼 바꿔 봐.
“예?”
- 너 죽인다는 놈 바꿔 보라고.
이호성은 손등으로 콧물을 닦으며 김수현을 돌아보았다.
“……전화 받아 보시라는데요?”
김수현은 이호성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그가 건네는 전화를 넘겨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 이호성이 죽는다고 하던데.
“네. 그렇습니다만?”
- 이호성 바꿔.
김수현은 코웃음을 치며 이호성에게 다시 전화를 넘겨주었다.
이호성은 눈치를 살피며 벌벌 떠는 손으로 휴대폰을 받았다.
“여, 여보세요?”
- 3분만 끌어 봐.
뚜우. 뚜우. 뚜우.
이호성이 침을 꿀떡 삼키며 휴대폰을 보았다.
꺼졌다.
“통화를 넘겨주신 분은 누군데 반말을 그렇게 찍찍 하시나요?”
김수현이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을 이호성의 턱 밑으로 겨누며 웃었다.
이호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시, 신규 기타 능력자랄까……?”
이호성의 말에 김수현의 행동이 멈췄다.
“……이호성 씨. 지금 뭐라고 하셨죠?”
김수현이 이호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여유 있던 표정이 사라지고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신규 기타 능력자요.”
그 대답과 동시에 김수현을 포함한 동부, 서부, 남부, 4명의 기타 능력자들이 급격히 관심을 보였다.
“신규 기타 능력자라니. 이호성 씨, 그게 사실입니까?”
이호성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산 채로 온몸의 가죽을 벗겨 버릴 겁니다. 다시 묻죠. 신규 기타 능력자라는 말. 신빙성이 있는 얘기예요?”
이호성이 눈치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자가 신규 기타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호, 혼자서 미궁을 클리어했으니까요.”
김수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엄청난 뉴스네요? 그자에 대해 얘기해 봐요. 알고 있는 모두.”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이호성은 휴대폰에 나타난 시간을 보며 바짝 고개를 들었다.
“어…… 3분 됐다.”
김수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호성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콘크리트 바닥이 박살 나면서 굉음이 울렸다.
김수현과 동부, 서부, 그리고 남부의 기타 능력자들이 일제히 한 지점의 포인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곳엔 강민성이 착지 이후 굽혔던 다리를 펴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 * *
민성은 주변을 훑었다.
시야에 이호성이 들어왔다.
“이호성.”
민성이 몸과 다리에 묻은 콘크리트 파편과 흙먼지를 털어 내면서 불렀다.
이호성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민성이 미간을 구기며 이호성을 보자, 김수현이 히쭉 웃으며 이호성의 폰을 빼앗아 민성 앞으로 걸어왔다.
“당신입니까? 신규 기타 능력자가?”
김수현이 이호성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민성은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벨소리가 울리는 걸 무시하고, 김수현의 푸른 눈을 빤히 보았다.
“비켜. 맞는다.”
민성의 말에 김수현이 피식 웃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잘 못 하는 것 같은데. 저와 여기 있는 사람들은 헌터 기관의…….”
민성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김수현이 민성의 주먹에 머리를 맞고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민성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떨어지는 김수현을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
그가 민성의 발등을 맞고 고급 외제 세단 차량으로 날아갔다.
꽈아아아앙!
고급 외제차가 폐차가 되듯이 찌그러지고 박살이 나면서 도로를 3바퀴 반 굴렀다.
김수현은 차량 부근에서 바닥에 엎어진 채 간헐적인 숨을 뱉으며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