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삼시세끼 7화>
문을 잠근 뒤 로커 키를 손목에 차자, 살짝 웃음이 났다.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 새삼 실감난다.
만약 잠에서 깨어나 다시 마계라면 아마 버티지 못할 것만 같다.
드라케니안 절벽에 다시 몸을 내던지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달콤했다.
민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계의 기억을 애써 지워 낸 후, 사우나를 하기 위해 입욕실 안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자마자 목욕탕 특유의 습기가 안면과 가슴에 스며 들어왔다.
정겨운 목욕탕 특유의 냄새가 나고, 천장에는 물기가 맺혀 있다.
민성은 주변을 훑어봤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민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목욕을 할 수 있게 되다니 믿기지 않아.
설렌다.
투명한 물빛의 탕이 보였다.
물거품이 올라오고 따뜻한 열기를 머금은 탕은 마치 신선들이 노니는 곳처럼 보였다.
진정하자.
순서를 지켜야 해.
탕에 들어가기에 앞서 민성은 몸을 씻기 위해 스탠드형 샤워기 앞에 섰다.
샤워를, 드디어 샤워를 한다.
따가울 정도로 마른침이 목을 넘어간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맑은 물로 몸을 씻는 것이다.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아아!
다발의 물줄기가 나왔다.
그 물줄기가 민성의 머리를 적시고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민성의 몸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물이 얼굴을 적시며 흐른다.
호흡이 가빠진다.
투명한 물이 머리를, 그리고 얼굴을, 몸을 씻으며 내려가는 기분은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민성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줄기를 맞는 것을 음미하듯이 세포 하나하나로 느꼈다.
대체 이게 얼마 만의 목욕이던가?
약 5분여 동안 물줄기를 맞으며 켜켜이 묵혀 있던 지난 세월의 흔적을 보낸 민성은 챙겨 온 면도칼을 들고 거울을 보았다.
물에 젖은 수염이 보였다.
민성은 거울을 보면서 수염을 잡고 잘라 내기 시작했다.
마계에서 단 한 번도 자르지 않아 길러진 수염.
그것을 민성은 미련 없이 잘라 냈다.
비누를 묻히고서 면도도 시작했다.
부드럽게 잔털이 잘려 나간다.
그로써 수염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그 면모를 드러냈다.
민성은 가늘고 긴 손으로 거울을 보며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수염을 자르고 면도를 하고 나자, 면도칼보다도 날카로운 턱 선이 드러났다.
높게 솟은 코.
무심한 듯 시크하면서도 낭만적인 깊이가 있는 눈빛.
가히 조각에 가까운 얼굴이 거울에 비쳐졌다.
앳되었던 학생의 얼굴이 세월을 먹고 이렇게 변해 있다는 사실에 민성은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보게 되자 조금은 어두운 기분이 가슴을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 동안 거울을 보던 민성은 짧게 숨을 고르고 돌아섰다.
탕이 보였다.
조금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몸을 씻어 냈으니 이제 탕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온탕]
탕을 가리키는 이름이 보인다.
기대감이 솟구쳤다.
어릴 적 친구와 물장구를 쳤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어렴풋이 났다.
그 옆엔 통나무로 지어진 건식 사우나실도 보였다.
어디부터 갈까?
잠시 고민하던 민성은 결정을 내렸다.
어렸을 때는 탕보다 사우나가 먼저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민성은 건식 사우나실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중년인 한 명은 TV를 시청하다가 민성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놀란 눈으로 보고는, 사우나실을 빠르게 어기적거리며 나갔다.
그사이 민성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외부 온도를 조절하는 속성 저항 능력을 해제했다.
민성이 속성 저항 능력을 해제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게임 시스템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이것은 마치 카멜레온이 자신의 피부 색깔을 바꾸는 것과 비슷했다.
속성 저항 능력을 해제하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몸을 쪼여 왔다.
좋구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혈액이 순환되는 느낌이 분명하다.
사치스럽다.
민성은 그 뜨거운 열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눈을 감고 작게 미소 지었다.
“후우우우.”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어 본다.
입에서 나온 숨이 온도에 의해 뜨거운 바람이 되어 팔과 다리에 스쳐 지나갔다.
민성의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몸에 열이 잔뜩 배어들었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보니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민성은 출입구 쪽을 보았다.
밖으로 나가게 되면 시원한 공기가 더운 몸을 해방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온탕으로.
몸은 확실하게 불려야 하니까.
민성은 온탕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미소를 지으며 건식 사우나실을 나왔다.
예상대로 시원한 공기가 순식간에 몸을 훑으며 땀을 식혔다.
목욕탕 특유의 냄새가 또다시 후각을 찔러 온다.
민성은 사우나에서 얻은 땀을 간직한 채 곧장 온탕으로 향했다.
단숨에 온탕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온도의 물이 몸을 가득 감싸 왔다.
“후우……!”
민성이 뜨거운 숨을 밀어냈다.
몸에 닭살이 오른다.
이어 뜨거운 물결이 몸을 어루만졌다.
그 느낌은 마치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시원했다.
민성은 온탕 속에서 목욕탕 천장을 보며 나른한 얼굴이 됐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 * *
‘철혈의 마체테’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현재 그림자 길드 내에서 최고의 성장 속도와 임무 해결 능력을 보여 주고 있는 헌터, 구양봉은 목적지 앞에 도착해 목을 뚜둑 꺾었다.
그런 구양봉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그림자 길드의 인턴사원 10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곧 200레벨을 앞두고 있는 인턴들로, 지원 인력으로 차용된 이들이었다.
공을 세워야만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는 만큼, 인턴들의 눈빛은 마치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런 인턴들과 함께 포커페이스의 표정으로 목욕탕 입구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 목욕탕 계단 위로 줄지어 저벅저벅 올라갔다.
카운터 주인아줌마는 우글거리는 남자들이 남탕으로 올라가는 걸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곤 불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사이 구양봉이 가장 먼저 목욕탕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 앞에서 졸고 있던 카운터 지기 노인은 십여 명이 넘는 사나운 인상의 사내들이 동시에 훅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노인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목욕탕을 점령하러 들어온 헌터들을 보며 어깨를 오들오들 떨었다.
인턴 중 하나가 노인에게 턱짓으로 나가라고 신호를 줬다.
노인이 러닝셔츠에 팬티 차림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때, 구양봉이 아이템 창을 열어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채챙!
칼날 길이는 60센티미터, 두께는 5밀리미터.
마체테는 흔히 밀림에서 길을 낼 때 사용하는 무기로,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애용해 온 구양봉 자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구양봉은 그런 자신의 애검 마체테를 들고 입욕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쐐애액!
마체테를 휘둘렀다.
마체테에 서린 푸른 기운이 입욕실 입구를 와장창 깨트렸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입욕실 입구가 뻥 뚫렸다.
구양봉의 시야에 온탕 안에서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퍼스트
Lv150 강민성
민성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네임을 보고 구양봉은 일순 동공이 흔들렸다.
분명 오더를 받을 당시, 정보에 기록된 그의 레벨은 50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 150레벨이 되어 있는 거지?
게다가 어떻게 150레벨에 불과한 놈이 유니크 호칭인 퍼스트 호칭을 보유하고 있을 수 있는 건가?
두 개의 의문이 그를 보자마자 나타났다.
잠시 당황한 구양봉은 생각을 잠깐 정리한 끝에 어쩌면 예전의 자료를 토대로 오더가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저 유니크 호칭이 마음에 걸린다.
퍼스트는 최초라는 업적 시스템을 달성해야만 보유할 수 있는 호칭이다. 그런데 족보도 없는 잡놈이 퍼스트 호칭을 달고 있어?
호기심이 생기는 만큼 경계심도 올라갔다.
괜히 준마스터, 혹은 마스터급 성장력을 가졌다는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민성이 뒤를 돌아봤다.
구양봉과 민성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구양봉은 단순히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일순 등이 오싹해졌다.
식은땀이 이마에 슥 배어든다.
구양봉은 어금니를 깨물며 마체테를 꽉 힘주어 잡았다.
그사이 민성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구양봉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뭐야?
마스터급의 성장 능력을 가진 건가?
마스터급이 이 정도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상상 이상의 잠재력이다.
하지만, 오경태의 말대로다.
마스터급 성장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건 잠재력과 성장 능력뿐.
상대의 레벨은 어차피 150 수준에 불과하다.
마스터의 잠재력이라고 해 봐야 성장 속도에만 괴물 같은 힘을 발휘할 뿐이다.
아직 150밖에 되지 않는 고정된 레벨이라면, 자신의 전력과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구양봉은 자신감을 가지며 강민성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구양봉을 따라 열 명의 인턴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구양봉은 바로 민성의 등 뒤에 섰다.
그럼에도 민성은 뒤를 돌아보지도, 방어 태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고작 150레벨 주제에 감히 이런 여유를?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호칭도 그렇고 다이아몬드 클랜을 밟았다는 걸 보면 본인의 실력에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만, 어떤 식이든 그건 뒷골목에서의 얘기다.
그림자 길드는 그런 뒷골목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이.”
구양봉이 민성의 뒤통수를 보며 불렀다.
민성은 땀으로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푸우! 하고 숨을 뱉었다.
“나와서 옷 입어라. 가야 할 곳이 있다.”
구양봉이 말했다.
“가야 할 곳? 그게 어딘데.”
민성이 되물었다.
“따라와 보면 알아.”
민성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싫다면?”
“피를 보게 되겠지.”
“피라…….”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탕에서 일어났다.
쏴아아!
온탕 물이 바깥으로 밀려 나온다.
수많은 흉터를 가진 아름다운 뒤태가 드러났다.
탄력 있게 솟은 엉덩이까지 완벽하다.
민성이 느릿하게 구양봉을 돌아보았다.
구양봉 뒤로, 인턴들이 무기를 잡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차가운 한기가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민성은 그들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맥반석 계란 두 개에 사이다 하나.”
“……?”
“……?”
“……?”
구양봉과 열 명의 인턴들이 얼굴에 물음표를 띠었다.
“너희들 목숨값이다.”
민성이 냉랭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살고 싶으면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