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2권 -- >염신약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해서 대전에서 나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개경출신 귀족들이었다. 이제 편제가 바뀌었고 각 청의 수장들을 회생이 내무부 장관이라는 직위를 맡긴 염신약에게 정하라고 했으니 개떼처럼 모여 든 거였다.
“문하시중 대, 아니 내무장관 대감!”
개경출신 귀족 하나가 다가와 밝게 웃었다. 그 귀족출신 중에 오직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규철이 굳어진 표정으로 염신약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감축 드리옵니다. 태자마마께서는 여전히 대감을 중책을 맡기셨사옵니다.”
“그리 보이는가?”
“그렇지 않사옵니까? 부서가 내무부와 국방부로 나눠졌습니다. 뭐 군부를 쥐고 있는 국방부가 강성해 보이기는 하나 그래도 내무부가 우선이지요. 소인이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무부의 수장을 태자마마께서 맡기셨으니 감축 드릴 일 아니옵니까?”
“그런가? 그렇지. 그런 것이지. 하지만 내가 이제 노쇠하여 지금 막 그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씀을 올렸네. 그러니 줄을 서려면 다른 곳으로 가 보시게. 아마도 태자마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북천이 다음에 그 자리에 앉을 것이야!”
염신약은 담담히 말했다. 이젠 미련도 없고 원망도 없었다. 아니 그 험하고 파란만장한 세월 동안 몸이 상하지 않고 가문이 상하지 않고 이리 물러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예?”
“용퇴를 했지. 태자마마께서 받아주셨고.”
“정말이옵니까?”
“허허허! 아닌 것처럼 보이나?”
“그건 아니지만 어찌 만인지상 일인지하나 다름이 없는 자리를,,,,,,,.”
“내 자리가 아니니 그러지. 난 이만 퇴청을 해야겠네.”
염 신약은 담담히 퇴청을 위해 걸었다.그때 이규철이 다가와 목례를 했다.
“자네도 내게 자리를 청탁하기 위해 왔나?”
“아니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규철의 말에 염신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을 했다면 고생을 했지! 또 아무 것도 안 했다고 하면 또 아무 것도 안 했고. 아무 것도 안 해서 이렇게 살아 낙향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염 신약은 몇 주 전 조경호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그 일이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이렇게 물러나게 되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그래 가랑비에 내가 젖었군! 폭우를 피했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었어.’무슨 일이든 이렇게 미련은 남는 법이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대감!”
“자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지?”
“예?”
이규철은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소인이 일을 꾸밀 깜냥이라도 되겠사옵니까?”
“일을 꾸미려면 다부지게 꾸미시게. 폭풍을 피해도 가랑비를 맞으면 끝내 옷은 젖는 법이네.”
이규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네.”
“알고 있사옵니다.”
“개경 토호들이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개떼들은 그저 먹잇감이 있는 곳에 모여들 뿐이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개경출신 귀족들을 보며 염 신약은 개떼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진승과 오광이 시작을 할 때도,,,,,,,.”
“쉬!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네.”
“그렇지요.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사옵니다.”
“따로?”
염 신약이 이규철을 물끄러미 봤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이규철의 얼굴이 아닐 것이다. 예전 자신에게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던 조경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낙향을 하시는데 송별회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조정을 위해 한 평생을 받친 대감의 송별회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누구라고 칭한 것은 태자 회생을 말하는 걸 거다.
“그런가?”
“그렇사옵니다. 대감!”
“송별회라,,,,,,.”
“그렇사옵니다.”
“그리 알겠네.”
염 신약은 뭔가를 결심한 눈빛이었다.
“예. 이제 퇴청을 하시지요.”
“그러지.”
그렇게 염 신약은 퇴청을 했다. 그리고 바로 이규철의 주변에 개경출신 귀족들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몇 명의 귀족들이 모였다.
“무슨 도움이 된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규철은 자신의 계획에 염신약을 포함시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염신약이 스스로 용퇴를 한다는 말에 조금은 당황했었다. 물론 그 당황의 이유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어쩌면 태자인 회생이 염신약의 물러남을 종용할 것이라는 것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고려에 아니 태자마마의 심중에는 구신들은 없다.”
이 규철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 합니까? 문하시중이었던 분도 저리 내쳐지는데 우리는 어찌 합니까?”
개경출신 귀족 하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도 우리가 살 방법을 찾아야지.”
이 규철은 참지정사 강일천의 빈소가 마련된 곳 쪽 하늘을 봤다.‘태자비마마께서 회임을 하시고 황자를 잉태하신다면,,,,,,,.’이규철은 엄청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가 곧 오겠지. 그때까지는 가랑비를 온몸으로 맞고 버텨야 하네.”
“예?”
“가세!”
“어디를 말입니까?”
“태자비마마께서 아무도 찾지 않는 빈소를 지키고 계실 것이네.”
이규철은 태자비인 백화를 이용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태자비인 백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주 때가 좋다. 서로서로가 필요할 때가 바로 지금이니 말이다.
5. 대타발의 무섭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요동성에 위치한 성주의 저택 내실.병색이 깊어진 대타발이 가신들이 모인 상태에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른 기침을 한 지가 며칠이 지났고 이제는 고열에 반점까지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내실에 죽음의 메아리처럼 휘몰아쳤다.
“쿨럭! 나, 나를 일으켜라!”
대타발의 명령에 그를 간호하던 장자인 대호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타발을 봤다.
“아니 되옵니다. 아버님! 겨우 정신을 차리신 지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쿨럭! 쿨럭! 내 가신들을 침대에서 맞이할 수는 없다. 어서!”
기력이 쇠한 상태에서도 대타발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호연은 대타발을 일으켰다.
“여승!”
“예. 대한무극!”
“출병은 어찌 되었느냐?”
대타발의 말에 여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냐고 물었다.”
“건초창고에 붙은 불이 사방으로 튀어 말을 먹일 건초가 부족하옵니다.
대한무극!”
“그래서 진격을 못한다는 말이냐?”
“그것뿐이 아니오라,,,,,,.”
“쿨럭! 쿨럭! 무엇이 더 있더냐?”
얼굴에 죽음 꽃이라고 불리는 붉은 반점이 난 대타발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크게 소리쳤다.
“신성과 개모성들에서도 건초창고와 식량창고가 불탔사옵니다.”
여승의 말에 대타발은 인상을 찡그렸다.
“우연은 아니겠지.”
대타발의 물음에 여승은 표정이 굳어졌다.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무엇이냐?”
“아무래도 고려의 소행인 것 같사옵니다.”
“고, 고려?”
“그렇사옵니다. 신성을 비롯한 개모성 그리고 그 근방에 있는 12개성에서 모두 원인 모를 불이 발생했사옵니다. 어떤 곳은 식량 창고를 또 어떤 곳은 병기 창고를 태웠사옵니다.”
“각성에 침입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냐? 세작의 소행이더냐?”
“철통 같이 경계를 했사옵니다. 침입은 분명 없사옵니다.”
“없다? 그런데 어찌 불이 난 것이냐?”
“그 영문을 모르겠나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의 소행이라는 것이옵니다. 집중적으로 건초창고가 불탄 것도 그렇고,,,,,,,.”
“심증, 심, 쿨럭,,, 심정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말이냐?”
“정확이 그렇사옵니다. 요동의 기마군단의 남하를 막기 위한 고려의 술책 같사옵니다.”
“겨우 건초가 없다고 진격을 못한단 말이냐? 말이 되지 않는다. 갑주를 가지고 와라! 진격을 할 것이다. 이제는 더는 조정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되시옵니다. 위중하시옵니다.”
“위중? 이 요동성이 위중하다. 이 요동성을 우리 발해민이 잃게 된다면 후발해는 없다. 나는 금의 대한무극 이전에 발해의 마지막 황족이다. 어서 갑주를 가지고 와라.”
“대한무극 아니 되옵니다.”
“어서! 쿠럭!”
순간 피를 토하는 대타발이었다.
“내 패부가 원통하여 피를,,, 피를 토하지 않느냐! 어서 갑주를 가지고 와라! 조정에서 나의 남진을 막는다면 내 요동 기마군단의 말머리를 황도로 돌릴 것이다.”
“하오나 진격은 불가하옵니다. 대한무극!”
“건초 따위가 없다고 진격이 불가하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냐? 건초가 없다면 이동을 하며 말을 먹이면 된다.”
“,,,,,,,.”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냐?”
“요동 벌판에 마른 풀은 그 어디에도 없사옵니다.”
“뭐, 뭐라? 쿨럭!”
순간 눈에 초점이 흐릿해지는 대타발이었다.
“온 천지가 불바다이옵니다. 모두가 숯덩이로 변했나이다.”
“어떻게 고려의 잡것들이 불을 그리 크게 지를 수 있단 말이냐?”
“그, 그리고,,,,,,,.”
“또 무엇이냐? 여승!”
“대한무극의 병세가 위중한 것을 알고 군부의 동요가 아주 크옵니다.”
“군부의 동요?”
“그렇사옵니다. 여진출신의 무장들이 이 요동 내성을 주시하고 있사옵니다.”
“이, 이런 망할! 충성 맹세는 어디에 갔단 말이냐?”
“그것뿐이 아니옵니다.”
“또 무엇이더냐?”
“요동성부터 신성까지 12개성에서 역병이 돌고 있사옵니다.”
여승의 말에 뭐라고 할 말이 없는 대타발이었다.
“역, 역병?”
“그렇사옵니다. 그 증상이 대한무극의 증상과 흡사하옵니다. 군영에도 이미 역병이 돌아 군사의 손실이 아주 크옵니다. 대한무극!”
여승 역시 그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하, 하늘이,,, 하늘이 이 대타발을 버렸단 말인가?”
다다닥! 다다닥!그때 급하게 내실 복도를 뛰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승상! 승상!”
승상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여승이었다.
“문을 열겠습니다.”
그와 함께 급히 무장이 들어와 대타발이 깨어난 것을 보고 잠시 안도를 했다가 다시 자신이 가지고 온 전갈 때문인지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무엇이냐?”
“고려 갑산군이 압수를 넘었다는 파발이옵니다.”
“뭐라! 고려군이 압수를 넘어 으으윽!”
대타발은 분노에 뒷목을 잡고 신음을 토해냈다.
“아버님! 고정하시옵소서!”
대호연이 놀라 대타발에게 말했다.
“어떤 놈이 지휘를 한다고 하더냐?”
“고려무장 조충이라 하옵니다. 세작의 보고에 의하면 조충 휘하 갑산군 6만이 압수를 넘어 진격해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진격? 요동 벌판에서 15만 기마군단을 상대해 보겠다고 진격을 해 온단 말이지?”
대타발은 분노한 상태에서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놈들이 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는 어찌 겨우 6만으로 진격을 해 온단 말이냐! 어리석은 놈! 잘 되었다. 말먹이가 없어 남진을 하지 못하는 판에 그놈들을 죽여 요동 들판을 먹일 것이다.”
대타발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여승과 대호연의 표정은 밝을 수가 없었다.
“호연아!”
“예. 아버님!”
“네가 선봉에서서 요동 기마군단을 이끌고 조충의 목을 베어 와라.”
“아버님! 그것이,,,,,,.”
“그것이 뭐? 설마 겁이라도 난다는 것이냐?”
“그게 아니옵니다. 기마군단이,,,,,,.”
“나의 기마군단이 무엇을 왜 적과 싸운 적도 없는데 와해라도 되었단 말이냐?”
“그것이,,,,,,,.”
이 순간 누구도 쉽게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타발의 성정이 불같으니 말이다.
“말을 해 보란 말이다. 말을! 쿨럭!”
다시 기침을 하는 대타발이었다.
“15만 기마군단 중에 여진출신 장군이 지휘하는 군영은 지휘통솔이 쉽지 않사옵니다.”
“뭐라? 여진출신 장군들이 반란이라도 꾸미고 있단 말이야?”
“반란을 획책하는 것은 아니옵고,,,,,,,.”
쾅!대타발은 침상 옆 기둥을 자신의 손으로 후려쳤다.
“아버님! 고정하시옵소서!”
“말을 해라! 말을! 무슨 말이든 해야 대책을 마련할 것이지 않느냐!”
“소신이 말씀 올리겠나이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여승이 나섰다.
“그래! 말해 보라! 승상 무슨 일이 있는가?”
“15만 기마군단 중에 여진 출신이 6만이옵니다.”
“그래! 그렇지. 총 6개의 군영이옵고 그 군영 중 5개 군영이 역병으로 군기가 와해되어 있사옵니다.”
“역병으로?”
“그렇사옵니다. 요동 전역에 역병이 창궐하고 있사옵니다. 백성들뿐이 아니라 군사들도 역병에 걸려 죽어나가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대타발이 여승을 무섭게 노려봤다.
“만약을 대비하여 5개의 군영을 폐쇄시켰사옵니다.”
여승의 말에 대타발의 표정이 굳어졌다.
“결국 스스로 적을 5만을 만들었다는 것이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사옵니다. 아버님!”
“닥쳐라! 15만의 기마군단 중에 5만이 이제는 적과 다름이 없다. 죽어가는 자들을 우리가 버렸으니 그들이 나에게 충성을 하겠느냐! 이 어리석은 놈아!”
“이 모든 것이 소신의 잘못이옵니다.”
“으음,,,,,,,.”
“송구하옵니다. 아버님!”
“이제 어찌 한단 말이냐? 적은 진격해 오고 내부에서는 언제 반기를 들지도 모를 군사들이 있고 백성들은 병에 걸려 죽어나가고 있고.”
이것이야 말로 사면초가에 진퇴양란이라고 할 것이다.
“성문을 닫고 수성을 명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가장 어리석은 하수를 쓰자는 것이냐?”
대타발은 대호연이 한 말을 바로 묵살했다.
“하오시면?”
“적이 될 존재라면 안에서 두는 것보다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이 좋지.”
“예?”
“군영을 봉쇄했으니 식량과 약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지?”
“그렇사옵니다. 어쩔 수가 없었사옵니다. 식량도 부족하고 약재도 부족했사옵니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대타발은 눈이 무섭게 변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승! 아직 이해를 못한 건가? 내 아들이야 워낙 아둔하기에 이해를 못했겠지만 자네도 이해를 못했다면 난 자네를 택할 것이네.”
그 순간 여승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합당한 자를 찾겠사옵니다.”
“너는 물러가라!”
대타발은 대호연을 보며 말했다.
“예?”
“여승과 따로 할 말이 있다.”
그 순간 여승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알겠사옵니다. 아버님!”
그렇게 대호연은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