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475화 (475/620)

< -- 간웅 22권 -- >

“그렇지요. 태자마마께서는 출신도 없는 것들을 귀족으로 만들어주시고 또 오랑캐를 고려의 관리로 만들어줬습니다. 또한 불학무식한 것들에게 권력을 줬습니다. 태자마마께서는 우리가 필요 없소이다.”

“그렇지요.”

“그럼 또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들고 있던 이인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이규철에게 물었다. 이인수는 이인로의 조카였다. 그의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태자의 환심을 사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은 차마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단 한가지 일 뿐이다.

“말을 해야 알겠소이까?”

그 순간 이규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알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지요.”

역시 이인수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뭐 대단한 이야기라고 자기 집에서도 그런 소리를 못합니까!”

귀족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리 겁이 많고 답답하게 구니 울화통이 치미는 모양이다.

“조용히 하게! 벽에도 귀가 있어.”

“그렇지요. 그 귀가 있지요. 오늘 귀가 들으면 내일 목이 달아날 것인데 아아구! 겁이 나서 오늘 어디 자택에나 돌아가시겠소.”

지금 소리치는 존재는 황복이다. 문신출신에서 나온 무신으로 그래도 이들 중에서는 병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황복!”

이규철이 나직이 꾸짖듯 이름을 불렀다.

“송구합니다. 하도 답답해서.”

“여기 어디 답답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그렇지요.”

황복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황복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산 사람은 아닐 것이요.”

이규철의 말에 모인 자들이 모두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요.”

“뭉치자는 겁니다. 뭉쳐야지요. 뭉쳐야 후일을 도모하고 시간을 벌수 있습니다. 우선은 태자비마마의 발아래 납작 엎드리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때를 기다리는 거지요.”

“그래.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때가 오면,,,,,,.”

“거병할 병력도 없는데 때만 기다려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황복이 조금 전보다는 작은 목소리도 말했다. 거병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방법이 꼭 거병뿐이겠는가.”

-멍멍! 멍멍! 멍멍엄!그때 요란한 개울음소리가 저택 앞에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밤에 개가 이리 요란하게 짖습니까?”

이인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할 때 스륵 문이 열렸다.

“멍멍멍! 멍멍멍!”

개소리를 낸 것은 젊은 청년 이규보였다.

“뭐하는 짓이냐?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규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가 짖으니 개소리를 하는 겁니다. 멍멍멍!”

“뭐라?”

이규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규보! 네 이놈!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만큼 누리고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십니까.”

“이놈이 그래도!”

“괜한 망발에 가문 말아 잡수시지 말고 웅크리고 계십시오.”

“뭐라?”

“멍멍멍! 멍멍멍! 저 이만 개새끼는 갑니다.”

이규보가 씩 웃으며 밖으로 나갔고 이규철이 이규보를 노려봤다.

“네 이놈! 너는 이제 내 동생이 아니다.”

“오호! 그렇습니까? 그럼 목숨부지는 하겠군요. 알겠습니다. 내 오늘 들은 이야기는 어디 가서라도 토설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고 개짓이나 잘 하십시오. 형님! 아니 누구시더라?”

이규보가 익살스럽게 말하며 돌아섰고 돌아서는 순간 지그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온 순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이 풍진 세상 이제는 시나 쓰며 살아야겠구나! 쯔쯔쯔! 흐름을 저리 모를까.”

-저리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혹시 밀고라도 한다면!-시나 쓰며 사는 동생이니 그리 걱정하지 마시오. 이제는 동생도 아니지만.-그러니 말입니다. 그리니 위험하다는 거지요.-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요. 우리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냥 때를 가다리자는 거지. 태자비마마를 도와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지금은 그래야 합니다.이규보가 저택 전각을 조금씩 멀어질 때마다 개경출신 귀족들의 모의는 점점 더 작게 들렸다."쯔쯔쯔! 그리 못 버리는 건가!"그렇게 이규보는 묘향산으로 떠났다.

"또 나는 왜 이리도 비겁한 것인가!"

그렇게 개경출신 귀족들은 참지정사 강일천이라는 아비를 잃은 태자비에게 모이기로 서로서로 다짐했다. 그들이 말한 것처럼 상황이 달라진 거였다.

이제는 영화공주보다도 더 세력이 없어진 백화였다. 그것이야 말로 회생이 원하는 일 것이다.

외척의 발호의 억제!회생은 자신이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태자비의 전각.전각 앞마당까지 백화의 흐느낌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또한 그 백화의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태자비의 전각이었다.

고요할 만큼 차분하다. 그 차분함 속에서 울리는 흐느낌이 더욱 서럽게 들린다.

그 고요함을 깨는 것은 의종황제의 발걸음이었다.초취한 모습으로 태자비인 백화를 위로하기 위해 그는 이 전각을 찾았지만 차마 전각 안으로는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의종황제의 모습을 보고 상궁들이 급히 내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폐하를 베옵니다.”

“태자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고 계속,,,,,,.”

“그래. 그럴 것이야!”

의종황제가 말할 그때 의종황제를 맞이했던 상궁이 힐끗 의종황제의 뒤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상궁을 봤다. 그리고 눈으로 무엇인가를 주고받더니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폐하께서 오셨다는 것을 태자비마마께 아뢰겠나이다.”

“아니야! 짐이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쿨럭! 쿨럭!”

“괜찮으시옵니까?”

상궁이 놀라 의종황제에게 물었다.

“알았다. 짐은 돌아갈 것이다.”

“예. 황제폐하!”

그렇게 의종황제는 돌아섰고 조금 전 서로 눈을 맞췄던 두 상궁이 다시 의미 있는 눈빛을 교환했다.태자비의 전각 내실.백화는 홀로 전각 내실에 앉아 깊은 실음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까지 구슬피 곡을 하던 백화이기에 그 얼굴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이제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하지?’참지정사 강일천이 대마도에서 비명횡사를 한 이후 백화는 아비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배후가 되어주고 힘을 실어줄 존재가 사라졌다는 거였다.

‘이제 이 구중궁궐에 나 혼자다.’황궁의 여인일수록 힘이 되어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 세력이 있어야 태자비도 되고 황후도 되고 태후도 된다는 것을 백화는 무비를 보며 잘 알고 있었다.‘무비는 자식을 다섯이나 생산을 했지만 그 신분 때문에 비에 불과했다. 또한 힘을 실어줄 세력도 없었고.’이 순간의 백화는 참으로 표독했다.

부친의 죽음보다 자신의 현실을 더 걱정하니 말이다.

“어찌 하지?”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개경귀족 떨거지들이었다.

“망할! 참으로 비참하군!”

힘을 모두 잃은 개경출신 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백화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의 휘하에 있던 무장들을 모으기 위해서면,,,,,,,.”

그때 떠오르는 이름이 전준걸이었다. 이제는 대장군이 되어 있는 강일천의 부장이었다.

“믿을 수 있을까?”

수백 번 수천 번 생각을 해 보는 백화였다.

“이고 대장군은,,,,,,,.”

백화는 이고대장군이 회생의 외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고에게는 해월이라는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고대장군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해월상궁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하지만 해월은 태후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영화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얻는 싸움에서 이겨야 해!”

그러고 보니 자신의 주변에는 이제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생각이 나는 것이 개경출신 귀족들이 전부이니 말이다.그때 조심히 문이 열렸고 황제를 맞이했던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섰다.

“황제폐하께서는 가셨느냐?”

백화가 나직이 물었다. 상궁이 들어서자말자 묻는 것을 봐서 이미 의종황제의 행사를 알고 있었다는 거였다.

“그렇사옵니다. 태자비마마께서 슬피 우시는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기시고 발걸음을 돌리셨나이다.”

“그래! 그렇구나!”

어느 순간 흐느끼던 곡은 사라졌다. 그저 도도하고 야무진 백화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이 딸이 이제는 이 구중궁궐에서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님!”

백화는 시신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강일천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누가 있어 저에게 힘을 실어 주겠습니까?”

마치 백화는 옆에 강일천이 있는 듯 물었다.

“저는 이제 어찌합니까?”

그녀의 눈에는 눈물 따위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녀와 강일천에게는 부녀의 정 따위는 없었다. 아니 있을 틈이 없었다.

강일천이 자신의 생부라는 것을 알았지만 회생을 만나기전까지 강일천은 백화를 애써 외면했다. 그러다가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했기에 자신을 딸로 받아드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백화였다.그러니 눈물 따위는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울어야 한다. 또 울어야 한다면 슬피 울어야 한다. 그 곡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냉랭한 회생이 발걸음을 할 수 있도록 구슬피 울어야 했다.

“저는 이제 어찌 합니까?”

그 순간 백화의 눈에는 그렇게 곡을 할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태자비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고정?”

“그렇사옵니다.”

“그래! 고정해야지. 이보다도 더 위태로운 적이 내게는 많았다. 그러니 고정해야지.”

백화는 자신을 다잡듯 말했다. 그런 상태에서 상궁이 백화의 눈치를 봤다.

“할 말이 있는가?”

“그것이 황제폐하의 옥체가 미령하신 것 같사옵니다.”

“폐하의 옥체가?”

그 순간 백화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의종황제가 승하라도 한다면 이 상태로 자신이 황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백화였다.

“그렇사옵니다.”

“어느 정도?”

“그 미령함이 심하신듯 하옵니다.”

“그래?”

“그렇사옵니다. 태자비마마!”

“걱정을 해야 하겠지?”

백화의 말에 상궁의 눈빛이 놀라 떨렸다.

“당, 당연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은상궁!”

“예. 태자비마마!”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가?”

“아, 아니옵니다.”

“자네가 나보다 더 황궁 생활을 오래 했으니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황궁에는 정이라는 것이 없지. 옥좌에는 형제가 없고.”

놀랄 말을 하는 백화였다.

“그렇사옵니다.”

“내가 태자비에서 황후가 되어야 자네도 부귀영화를 누리겠지.”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난 또 이제는 힘이 없어. 자네 말고는 내게 힘이 되어줄 사람도 없고.”

“태자마마께서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나의 상공이 있었지.”

백화는 회생의 얼굴을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에는 그 어떤 속세의 추잡함도 담겨 있지 않는 미소였다.

아주 옛날 백화가 가졌던 그 미소를 이제야 보이는 백화였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는 것을 지금 백화는 모를 것이다.그녀의 욕망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였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려는 것뿐이네.”

“소인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나이다.”

“나의 상공이셨지. 나의 상공!”

백화는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공주와 이의방의 딸인 이연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순간 다시 표독해지는 백화였다.질투심에서 시작된 백화의 변화일까?아니면 권력 욕구에 사로잡혀 변한 백화의 변화일까?지금 이 순간 그것을 따진다고 해도 다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영화공주의 동태는 어떠하더냐?”

순간 다시 싸늘해지는 백화였다.부친의 죽음 앞에서도 백화는 황후의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이 많사옵니다. 요즘 들어 태후 전에도 문안이 없고 내실에서 두문불출하신다고 하옵니다.”

“두문불출?”

“그렇사옵니다.”

“그래? 병이라도 난 것이냐?”

“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이 창백하다고는 하옵니다. 또 음식을 도통 못 드시는 것 같습니다. 수라간으로 나오는 상이 그대로라고 하옵니다.”

“그래?”

순간 의구심이 드는 백화였다.회생이 이 서경으로 천도를 한지도 4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영화공주의 배도 어느 정도 불러와야 했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영화공주는 배가 많이 불러오지 않는 체형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숨길 수가 있었다.

공주가 태자의 용정을 회임하고도 숨겨야 하는 현실이 어처구니없지만 그것은 회생의 명이었다. 표독하게 변한 백화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었고 만약 그렇게 백화가 영화공주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된다면 그것을 회생 자신이 용서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달거리는 언제 하였다고 하더냐?”

“달거리라 하셨습니까?”

“그래. 달거리!”

“그것은 확인해 보지 못했사옵니다.”

“그래? 혹시!”

점점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주마등처럼 영화공주가 전장으로 나간 자신의 상공 회생을 찾아간 일을 떠올렸다.‘아닐 것이야! 아니어야 해! 이 고려의 제일 황손은 내가 생산을 해야 해!’백화는 이 순간 마음속으로 울부짖듯 소리쳤다.

“쇤네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은밀히 하여야 할 것이야!”

“예. 태자비마마! 하오나 태자마마의 용정을 잉태하고 숨길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상궁의 입장에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것이다.

“그렇지. 숨길 일이 아니지.”

“그렇사옵니다.”

“그래도 모르니 확인을 해 보시게. 혹여 누가 알 것인가? 잘못된 씨를 잉태했을지도.”

백화의 말에 상궁이 기겁했다.

“태, 태자비마마!”

“왜 그러는가?”

“아, 아니옵니다.”

“그렇다는 거지. 은밀히 확인해 보게.”

“예. 태자비마마!”

“물러가시게.”

-태자비마마! 옥화이옵니다.그때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벡화의 명이 떨어지자 말자 검을 든 여 무사가 안으로 들어와 군례를 올렸다.

“무슨 일이냐?”

“참지정사의 시신이 황도에 도착했다 하옵니다.”

“도착을 했어?”

“그렇사옵니다.”

“아버님의 시신은 어떠하더냐?”

백화의 물음에 옥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그것이,,,,,,,.”

“그것이 뭐?”

“참담하다하옵니다.”

옥화의 말에 백화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부녀의 정이 없다고 해도 부녀인 것이다.

“아버님은 어디에 모셨느냐?”

“사택에 모셨다고 하옵니다.”

“알았다.”

백화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오셨군요. 아버님!”

그 순간 다시 한 번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백화였다. 비누!왕비의 눈물!드디어 백화가 아무런 사심도 없이 부친을 위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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