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1권 -- >그런데 자신들이 죽은 수만큼 죽이고 죽겠다고 외치는 부족장의 말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니 이미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이 부락의 족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거칠게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투항 따위로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투항해서 노예로 살고 싶지 않은 그들이었다.노예가 되기 싫어 도망쳐 이곳까지 온 그들이니 말이다.
“뭘 하고 있는 것이냐? 혈족들의 시신을 수습해라! 우리마저 죽으면 그마져도 할 수가 없다.”
우렁찬 외침이었으나 부락 족장의 외침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족장님! 어린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젊은 청년 하나가 달려와 족장에게 물었다.
“노예로 살기보다는 싸우다 죽게 하자. 우린 인간이지 오랑캐도 개돼지도 아니다. 아니 저것들이 오랑캐일 것이다.”
“허나 아직 어립니다.”
젊은 청년의 말에 족장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미를 잃었다. 이제 곧 아비까지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족장님,,,,,,,.”
“탕개!”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족장이 외쳤다. 그러지 아직 어른스럽지는 않으나 아이의 때를 벗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다.
“예. 족장님!”
“아이들과 여자들을 데리고 토굴로 피해라!”
“예?”
“네가 이제 푸른 사슴 부족의 족장이다.”
푸른 사슴 부족?회생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비련의 부족이 바로 푸른 사슴 부족이었다. 아니 푸른 사슴 부족의 한 갈래의 부족일 것이다.
어찌 되었던 이 부락의 족장은 자신들을 푸른 사슴 부족이라고 했다.작은 부족이 밟히고 약탈당하고 도망치고 그렇게 무너졌다가 다시 잡초처럼 피어났던 부족이 바로 푸른 사슴 부족일 것이다.
아니 모든 힘없는 부족이 그럴 것이다.
“족, 족장님!”
“두려운 것이냐?”
“그, 그게,,,,,,.”
“나도 너 만할 때 이 부락의 족장이 됐다. 그리고 그때도 이렇게 도망쳐왔다. 하지만 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이제 우리 부족의 족장이다. 네가 바로 큰 푸른 사슴인 거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네가 아니면 우린 다 죽는다. 내 혈족들을 노예로 살게 할 수는 없다.”
족장의 말에 탕개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숨어라! 토굴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악귀들이 물러가면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라. 이곳을 떠나라 더 멀리 도망쳐라. 그리고 살아다오.”
“족, 족장님!”
“이 가엽고 힘없는 운명을 너는 제발 이겨내 다오.”
“알, 알겠습니다.”
“떠나라! 곧 저놈들과 똑같은 악귀들이 몰려 올 것이다. 어서 도망쳐라! 어서!”
“예. 죽장님!”
“이제 네가 족장이다.”
“예. 탕게르!”
그렇게 탕개라는 소녀는 이 부락의 어린 소녀들과 아이들을 이끌고 비밀토굴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본 족장 탕게르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마을의 청년들을 봤다.
“횃불을 밝혀라!”
“예. 족장!”
“우리들이 이곳에서 다 죽지 않으면 저 아이들을 살릴 수 없다.”
둥둥! 둥둥!그때 다시 한 번 북소리가 울렸고 그 북소리에 이 부락의 족장과 청년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왔군! 곧 온다. 악귀들이 온다.”
“예. 족장!”
“술을 가지고 와라! 취하지 않을 만큼 마시자. 하하하!”
“예. 족장님! 어서 술을 항아리 째 가지고 와라!”
“우리가 죽어 저 아이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서경 황궁 지하의 뇌옥찍찍! 찍찍!어둡기만 한 뇌옥의 주인은 죄인들과 쥐새끼들일 것이다.황궁으로 쓰이기 전에는 이곳은 서경 유수관이니 지하 뇌옥이 있는 것도 이상할 이유가 없었고 이 지하뇌옥에 갇히게 되는 첫 인물이 바로 조경호였다.
조경호는 임시대전에서의 회생에게 간언한 죄로 지하뇌옥에 갇혔다. 그리고 고문이 회생의 지시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사실 회생 역시 조경호의 간언은 의외였다.
그저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문신의 쥐새끼라고만 알았던 조경호가 상황을 직시하는 눈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그를 인재라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뇌옥에 가둔 회생이었다.
“으으윽!”
조경호는 뇌옥에 갇혀 더러운 지푸라기가 깔린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억울함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지금 토해내는 신음소리는 하찮은 육신의 고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소리에 불과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처음 조경호는 조정에 출사를 하면서 문하시중의 심복으로 문신으로 대성하기 위해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발휘했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마치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손오공과 같이 여겨지는 회생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고려 문신들 중에서 조경호처럼 손오공 노릇도 하지 못하는 족속들이 대부분이니 옆에 두고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회생이었는데 그런 참이 조경호가 대전회의에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이렇게 뇌옥으로 가둔 거였다.
어쩌면 이것은 고육계일 것이다.
“중, 중히 쓰려고 이곳에 가두셨겠지.”
조경호는 회생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뛰어난 인재였다.
“킥킥킥! 겁 많은 문하시중보다는 목숨을 걸고 영달을 쫒아 권력을 쥘 수 있는 태자마마가 더 좋겠지.”
그는 고려에 대한 충심보다 또 회생에 대한 충심보다 자신의 영달이 우선인 인물이었다. 허나 그를 그런 위인이라고 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니 말이다.저벅! 저벅!낮고 무거운 발자국 소리에 찍찍 거리던 쥐새끼들의 소리도 사라졌다.
저벅! 저벅!그 저벅거리는 소리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돌아누워 있던 조경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도착해 있는 자의 모습도 확인하지 않고 조경호는 온 자가 누구인지 가파한 거였다.
“역시 마음이 급하신 것 같사옵니다.”
둥둥~ 둥둥~거친 북소리가 다시 울렸다.두두! 두두!멀리 들리던 북소리가 가깝게 들려왔고 이제는 거대한 말발굽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제 갑산군 제 19제대의 대병력이었다.
이 부대를 이끄는 자는 갑산부사 조충의 둘째 아들인 조양이었다. 지금 그가 푸른 사슴 일족을 참살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거였다.
“정찰 기병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겠지요.”
20대 청년인 조양의 목소리를 담담하면서도 차가웠다.
“그렇습니다. 제대장님!”
마상에 올라 있는 그의 모습은 용맹한 장수의 모습 그 자체였다. 찡그린 표정에는 간파할 수 없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았고 꼭 다문 입술은 두툼한 것이 고집과 아집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난 이번 출정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양의 말에 부관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예?”
“내 부하들이 저런 약탈자가 된다는 것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부장에게 경어를 쓰는 조양이지만 굳어진 표정은 건방짐과 당참이 교차하고 있었다.
“저기 저런 모습들은 정말 보기가 싫군요.”
조양의 눈에는 거대한 원통에 매달려 있는 정찰기마병의 조장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어, 어떻게 저, 저런 일이,,,,,,.”
“저런 모습만 봐도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인상을 찡그리는 조양이었다.두그락! 두그락!조양이 말을 천천히 몰아 앞으로 나섰고 부장이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
“활을 가진 오랑캐들이 꽤나 보입니다.”
“저들이 오랑캐?”
“그렇습니다. 제대장님!”
“지금은 우리가 오랑캐이지 않나?! 우리가 오랑캐지!”
바드득!스스로의 굴욕감에 어금니를 꽉 깨무는 조양인 거다.‘대의! 대의라는 것이 모든 것을 덮어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허나!’어금니를 꽉 깨물던 조양은 맹호처럼 두 눈을 부릅떴다.
“허나! 오랑캐가 되어야 한다면 되어주지! 그게 속말말갈족의 운명이라면!”
서경 황궁 지하의 뇌옥
“역시 마음이 급하신 것 같사옵니다.”
조경호는 내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나를 기다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쏜 화살이 급히 북변으로 향하니 급할 수밖에.”
“그렇사옵니까? 태자마마!”
“놀랍고 재미있군. 아니 그대는 나를 놀라게 했어. 그저 재주를 부릴 줄 아는 원숭이 새끼인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이라 참으로 놀랍고 기문이 좋아! 그건 그렇고 몸은 좀 괜찮으신가?”
“으윽!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옵니다.”
“송을 속일 고육계에 고문이 빠져서야 되겠나! 살은 찢겨도 뼈는 상하지 않게 하라 지시를 했으니 크게 몸이 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황공하옵니다라고는 하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런가?”
“송구하옵니다.”
“내가 올 줄도 알고 나를 기다렸으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겠군.”
“소신이 무엇을 하면 되겠사옵니까?”
조경호는 내게 무엇을 하면 되냐고 물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것은 내게 복종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 그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목숨을 걸고.
“그대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책사는 두 분이 계시니 저는 모사꾼이 되겠나이다.”
“하하하! 모사꾼!”
“그렇사옵니다.”
“그럼 내 하나만 묻지?”
“하문하십시오. 태자마마!”
“왜 문하시중의 휘하에서 벗어나 나를 택했나?”
어쩌면 조경호는 나를 택한 걸 거다. 그는 분명 문하시중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가랑비에 젖어도 옷은 젖는 법이옵니다. 천천히 느리게 젖는다고 해도 옷은 끝내 흠뻑 젖게 되어 있지 않사옵니까? 그래서 태자마마를 택했나이다.”
“그래?”
“그렇사옵니다. 끝내 문하시중과 나약한 문신들은 권력에서부터 도태될 것이옵니다. 저도 그들과 같이 구멍 뚫린 배처럼 침몰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내게 왔다? 어떤 대의도 없이 어떤 사명감도 없이?”
난 조경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제 대의는 권력이옵니다. 사내로 태어나 모사가가 되고 권력을 손아귀에 쥐어보는 것이야 말로 사내의 꿈이지 않겠사옵니까?”
나를 상대할 때 거짓보다는 이렇게 겁 없는 솔직함이 더 좋다.
“권력? 권력을 쥐고 싶다?”
“그렇사옵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는 되지 못해도 강성해질 고려의 한 축에서 지방의 왕처럼 군림하며 살고 싶사옵니다.”
“배포는 있군!”
“황공하옵니다. 태자마마!”
“좋다! 성공만 한다면 네 그리 원하는 권력을 주지.”
“감사하옵니다. 소신은 그러면 달갑게 송으로 갈 것이옵니다.”
“그대가 송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은,,,,,,.”
잠시 난 말을 멈췄다.
“예. 태자마마!”
“그대는 내 숙모님을 만나 그분의 아드님이 송의 황제에 등극하도록 보필하라!”
내 말에 조경호는 놀라 날 뚫어지게 봤다.
“예?”
“왜 놀라는 거지?”
“소, 소신은 그저 송을 움직여 금을 압박하여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소신의 소임인 줄 알았나이다.”
“그런 하찮은 것으로 고육계가지 쓰겠나? 하하하!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송이다.”
나를 압박했던 송나라 공주 조연은 이미 송으로 갔다. 그녀가 비록 3천의 악비군을 잃었지만 5만에 육박하는 도천밀군을 얻었다.
허나 그녀가 아무리 여걸이라고 해도 그것도 회임한 몸으로 송 전역에 흩어진 도천밀군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수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보좌할 인물이 필요했다.그 소임을 할 인물을 난 조경호로 택한 것이다. 또한 신라방 총방주도 도울 것이다.
그럼 조연은 송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그것이 내가 송을 찾지 하는 대업의 시작인 거다.
물론 그것은 아주 오랜 후의 일이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조경호가 가서 해야 할 일은 조경호가 말한 것처럼 송을 움직여 금을 압박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금 황실은 쉽게 요동에 있는 대타발의 15만 기마군단을 고려로 남진시킬 수 없게 된다.한 마디로 금을 진퇴양란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북변은 손쉽게 고려의 영토가 되고 바로 일사천리로 요동까지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금과 고려가 철천지원수가 된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나약하기만 한 송은 바로 내 고려에 머리를 조아릴 것이니 말이다.
그럼 고송연합군이 금을 치고 그 승리에 대한 축배는 고려만이 들어 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조경호는 송으로 가야 한다.‘하나가 성공을 하면 천하가 내 손에 들어온다.
’난 놀라움에 떨고 있는 조경호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송으로 갈 텐가?”
난 답이 정해진 물음을 조경호에게 했다.조경호는 조심히 고개를 들어 날 봤다.
“태자마마의 황명 받잡겠나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그리 해 준다면 그대에게 내가 쓰고도 남을 권력을 주지.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