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1권 -- >법이 없는 곳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대충은 알겠다.”
“그렇사옵니까?”
“원망을 하느냐?”
“원망을 하지요. 허나 어찌 하겠습니까? 힘이 없는 부족인 것을.”
창부의 말을 듣고 난 다시 술을 마셨다. 내 모진 생각과 창부의 서글픔 때문에 술이 취하지 않았다.‘외숙은 지금도 달리고 있겠지.’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가 볼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내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이의민은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비련아!”
“예. 나리!”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나가 보거라. 내 다시 나중에 부를 것이다.”
난 비련의 이 서글픔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서글픔이 오늘 따라 끌렸다. 비가 오기 때문일 거다. 또한 모진 생각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 일 거다. 내가 비련을 품게 된다면 비련의 팔자는 바뀔 것이다.
'말갈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겠지.'요동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으로 흩어져 있는 말갈을 하나로 만들어 내 아래 모이게 해야 한다. 비록 속말말갈족 족장인 조충이 갑산부사로 있다고는 해도 그것으로 말갈이 모이기는 부족했다.'나쁠 것이 없지.'난 비련을 이용해 말갈을 통합할 생각을 했다.
문제는 말갈족이 세운 금이 가만히 있겠냐는 거였다. 물론 이건 내 기우일수도 있다.
“알겠사옵니다.”
비련은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통보는 했나?”
“예. 그렇사옵니다.”
“그럼 곧 오겠군.”
“따로 제가 준비할 것이 있사옵니까?”
아마 내가 술을 마시고 있을 동안 이의민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산 외곽에 아주 은밀한 곳에 목장 하나를 만들어야겠다.”
“목장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목장이다.”
난 그렇게 말하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일을 실행에 옮긴다면 나는 반드시 지옥으로 갈 것이다.허나 예맥의 번영을 위해 더 많은 고려군이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생각한 것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그러기 위해서 온 것이다. 참으로 모진 일만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였다.
“무엇을 키우려고 하십니까?”
이의민이 내게 조심히 물었다.
“알고 싶나?”
“표정이 어두우시기에,,,,,,,.”
“쥐다!”
내 말에 이의민이 영문을 몰라 날 빤히 봤다.
“쥐라니요? 쥐를 키워 무엇을 하시려고,,,,,,,,.”
이 시대에 사는 사람이니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 턱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지. 은밀히 준비를 하라.”
“예. 나리!”
이유는 알지 못해도 내가 명을 내렸으니 이의민은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럼 된 것이다.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이번 일은 나와 이의민 그리고 갑산부사 조충과 박현준만 알아야 하는 일이다. 그만큼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일인 것이다.물론 다른 일도 마찬가지지만.
“좀 더 밤이 깊으면 오겠지?”
“그렇사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라고 명하셨으니 그럴 것입니다.”
“그럼 나는 형님과 술을 마셔야겠군.”
난 술병을 들었다.내가 술을 따라주겠다는 말에 이의민은 감격해 벌떡 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황공하옵니다.”
“어허! 이래서야 어디 내가 일을 하겠소. 자리에 앉아요.”
그제야 이의민은 급히 자리에 앉았다.
“송구하옵니다.”
“그냥 받아요. 좀 험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요.”
“무슨 일이든 마다하겠나이까.”
“그렇지. 형님은 그런 사람이지.”
대마도가 멀리 보이는 압수 하류.장대비가 쏟아지는 이 순간에서도 회생의 밀명을 받은 이고는 30인의 직속 무인들을 이끌고 이 압수 하류까지 모질게 달려왔다.
“워워워!”
이고가 말을 멈추고 서자 검은 옷을 입은 직속 무인들도 모두 말을 멈췄다.
“저곳이 대마도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위화도는 고려시대에는 대마도로 불렸다.
“그렇사옵니다.”
“장대비에 물어 불어 넘어갈 수가 없겠군.”
“그렇사옵니다.”
“그럼 넘어 올 수도 없고?”
“그럴 것이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무인의 대답에 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장대비에 옷은 젖었고 한기까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고의 입가에는 흰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참으로 모진 것이 태자마마시다. 나라면 그리 못할 것을!’이고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회생과 독대를 했던 그때를 회상했다.
“태자마마!”
이고가 회생의 말에 놀라 목소리가 커졌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외숙!”
회생이 차갑게 말했다.
“예. 태자마마!”
“놀라셨지요?”
“,,,,,,, 그렇사옵니다.”
“놀랄 일이나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어찌 그런 마음을,,,,,,,.”
“외숙께서는 지독히도 싫어하시지만 백화가 내 조강지처입니다.”
회생의 말에 이고는 회생을 빤히 봤다.
“차마 버리시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버리려 한다면 버려야 하기에 이러는 것입니다.”
그제야 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백화는 고려 최고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강일천가의 딸이다.
그 시조가 강감찬이니 고려 최고의 가문이 분명했다.그런 가문의 여식을 내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한다면 또 회생이 조강지처를 끝내 버려야 한다면 그 가문부터 멸문을 시켜야 했다.
허나 지금은 백화를 버리지 않기 위해 또 고려 태자의 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이 엄청난 것을 이고 외숙에게 말하고 있는 거였다.참으로 아이러니 한 순간이며 무서운 순간이었다.
“허나 지금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사옵니까?”
“그렇지요. 외숙! 서경으로 천도를 한 이 마당에 또 그분이 금으로 가기 전에 김보당의 발고로 역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정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오시면?”
“내 장인답게 대우를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세요.”
“결국은,,,,,,,.”
“나라는 사람이 모진 것입니다. 태자라서 모진 것입니다. 나 이외에 이 고려에 큰 힘을 가진 존재는 없어야 합니다.”
“하오시면 그 다음은?”
이고 외숙은 아마도 개경공이 된 이의방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을 겁니다. 개경공은 그럴 수가 없을 겁니다.”
“예. 태자마마!”
“만약 그리 된다면 난 장인을 모두 잃게 되겠지요.”
“알겠사옵니다.”
“누구도 몰라야 할 일입니다.”
“하오나 백화 비를 꼭 태자비로 삼아야 하시겠습니까? 영화공주도 있지 않사옵니까?”
이고 외숙의 말에 회생이 피식 웃었다.
“외숙!”
“예. 태자마마!”
“내가 모든 황족을 다 죽여야 하겠습니까? 그리한다면 아바마마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또한 병환중인 할마마마께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회생의 말에 이고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난 황실을 흔들고 고려를 흔들 강한 외척은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예. 알겠사옵니다. 소신도 참으로 조심하고 조심하겠나이다.”
이고는 회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자신이 외숙이라고 해도 회생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반기를 들고 권력의 단맛에 빠진다면 자신도 회생의 살생부에 이름이 오를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안 이고였다.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
“너무 걱정하시지는 마세요. 아무리 내가 독하다고는 해도 하나뿐인 외숙을 어찌하겠습니까? 얼굴도 모르는 모후를 내 죽어 어찌 뵙겠습니까.”
“황공하옵니다.”
회생이 그렇게 말해도 이고는 만약 자신이 경거망동을 한다면 회생은 모질게 마음을 먹고 자신을 벨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조심하세요. 난 어미의 정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 말이 진정 회생의 마음일 것이다.
“예. 알겠사옵니다.”
“가세요. 자꾸 이런 일만 부탁드립니다.”
“혈족이기에 믿고 내리시는 명이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진도의 일도 그렇고,,,,,,,,.”
“소신은 다 잊었습니다.”
“휴우!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못 잊고 있으니,,,,,,,.”
“소신! 태자마마의 크신 고충을 이제야 알겠사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려를 위해 살 것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가 주세요. 이번에도 잘 처리해 주세요.”
“알겠사옵니다. 태자마마!”
이고는 자신의 대답을 떠올리며 회상에서 깨어났다.
“잠시 머물 곳을 찾아라!”
“예. 나리!”
이고의 직속 무장도 이고를 대장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리라 불렀다.
“혹시 모를 일이다. 대마도에서 뭍으로 넘어오는지 잘 감시를 해라.”
“알겠나이다.”
무장의 대답과 함께 이고가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대마도를 봤다.
그 대마도에서는 몇 개의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어찌하오리까. 이 모진 것이 다 운명인 것을!’이고는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섰다.
대마도(위화도)에 설치되어 있는 사신단의 숙영지.두두두! 두두두!천막 위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참지정사 강일천은 차분히 탁자에 앉아 독주를 마시고 있었다. 홀로 마시는 독주는 빨리 취하는 법인데 참지정사 강일천은 취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걱정을 하기 때문이었다.
“김보당 그 놈이 죽으면 나를 역신으로 몰았다는 말이지.”
물론 이 사실은 백화가 보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회생이 강일천이 금으로 갈 때 함구령을 내렸으니 백화의 서신을 통해 알게 된 거다.
“내가 역신이라,,, 역신,,,,,,,,.”
이 엄청난 사실을 알면서도 강일천은 고려로 귀환하고 있었던 거였다. 또한 회생이 그 모든 것을 덮었다는 것 역시 알기에 회생을 믿고 귀환하는 것이기도 했다.
“태자께서 그 일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을 지지해 달라고 하시겠지.”
강일천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 한 단 말인가? 태자마마의 뜻을 받아드리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것이 없는데,,,,,,,,.”
서경으로 고려가 천도를 하면 개경을 중심으로 힘을 비축해 둔 개경출신 귀족들이 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은 권력에서 멀어진다는 것이고 자신의 권력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딸인 백화가 태자비의 자리에 또 황후의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어찌 한단 말인가!”
고민스러운 강일천이었다. 그래서 다시 독주를 들이켰다.
“대감!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이 숙영지를 경계를 서고 있는 무장이 천막 밖에서 물었다.
“들어오시게.”
그리고 비에 잔뜩 젖어 있는 무장과 문신 몇이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내일 뭍으로 나가시는 것은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비 때문인가?”
“그렇사옵니다. 강이 너무 불었사옵니다. 위험할 것 같사옵니다.”
어제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신단 일행이 무법지대라고 할 수 있는 북변에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또 모든 사신들이 다 그렇게 귀환을 할 때 대마도를 통해 귀환을 한 것처럼 강일천도 이렇게 대마도에 들어왔다가 고립된 거였다.
“그렇사옵니다. 달포나 장마가 빨리 와서 이리 황망하게 되었습니다.”
“달포나?”
“그렇사옵니다.”
“그럼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 것이군.”
강일천은 담담히 말했다.
“아마 이 상태로 비가 온다면 7일은 발이 묶일 것 같습니다.”
무장의 말에 강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