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9권 - 황후적화(皇后赤化)! -- >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내가 바란 것이다. 걸림돌은 되지 말아야지. 이제 짐은 미련도 없고.”
의종황제는 자신의 태자가 그리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었을 때부터 옥좌와 자신이 황제라는 것에 환멸을 느낀 것 같았다.황제였으나 아들인 태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든 거였다.
무한한 환멸이 득도의 길일까?모든 것을 달관해버린 의종황제였다. 또한 그러면서도 높은 망루에서 회생을 내려 보며 회생이라면 자신이 꿈꿨던 것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의종황제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애증이 공존했을 것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회생은 이제 마지막 남은 황자라는 거였다.옥좌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도 가질 것이니 가지고자 할 때 내어줄 생각을 한 의종황제였다.
어느 심파처럼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라는 말이 딱 의종황제의 마음일 거다. '짐이 부덕한 탓이니라,,,,,,.'
그때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찻물을 대령했나이다.”
무장이 묵직하지만 다소곳하게 말했다.
“들이라.”
머리를 조아린 무장이 조심히 안으로 들어섰고 의종황제와 정도전의 앞에 뜨거운 물이 담겨 있는 다기와 찻잔을 내려놨다.
“멀리 물러가고 이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라.”
정도전이 말에 무장이 대답 대신에 군례를 올렸다.
“조금씩 드시오면 6개월이 걸리실 것이옵니다.”
정도전은 담담하지만 무겁게 말했다.
“6개월이나?”
“그렇사옵니다. 황자저하께서 아직 태자전하가 되시지 못했나이다. 황제폐하!”
정도전의 말에 의종황제는 괘씸한 마음이 들 것도 같은데 침착하기만 했다.모든 것을 포기한 마음.또 만감이 교차하고 애증이 공존하는 마음이 그를 이리도 침착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이 전란이 6개월 안에 끝이 난다는 것인가?”
“이 전투는 바로 끝이 날 것이지만 중원 정벌을 위한 북벌은 계속 될 것이옵니다.”
정도전의 말에 의종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회생의 꿈이 그리 클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중원 정벌이 쉬운가?"
"어렵지요."
"그렇지. 어렵지."
"허나 황자저하시라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회생에게 무한한 믿음을 보이고 있는 정도전이었다."그런가? 그대에게 회생은 그런 존재인가?"
"그렇사옵니다. 황제폐하! 6개월이옵니다. 은은한 차향에 차가운 독기가 담겨 있사옵니다. 천천히 고통없이,,,,,,."정도전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 되는 것인가? 6개월이라 참으로 길군.”
"황, 황제폐하!"
"알았네. 그리하지. 그리 해야겠지. 그래도 아비이고 그래도 자식인 것을 짐이 회생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알겠네."의종황제가 너무나 담담하기에 정도전의 마음이 울컥했다. 정도전은 이 순간 의종이 회생처럼 가신을 잘 만났듯 그가 신하를 잘 만났다면 이 북벌의 첫걸음에 걸림돌이 아닌 주인으로 임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구하옵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소신이 어리석었사옵니다. 황제폐하! 소인이 조급했나이다. 아니옵니다. 때가 아니옵니다.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정도전이 급히 보합을 닫으려 했다.
“보합 안에 찻잎 통이 두 개더군.”
의종황제의 말에 정도전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송구하옵니다.”
“하나는 짐의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의 것인가? 그대는 그 나머지 하나를 내가 누구에게 주기를 원하기에 온 것이 아닌가? 또한 그가 아무런 의심이 없이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이것만 봐도 회생의 명석함이 어쩌면 의종황제의 영향도 있었을지 몰랐다. 비록 회생의 몸에 든 영혼이 현대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말이다.
“황. 황제폐하!”
“누구인가?”
“그것이,,,,,,,,.”
“말하게. 자네가 함부로 움직일 사람이던가? 때인 것이지. 누구인가?”
“연후 대 스승이옵니다.”
정도전의 말에 의종황제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
의종황제도 연후의 인품과 덕망 그리고 능력이 인간능력을 넘어섰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런 존재가 회생에게 왔다는 것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회생이 독살하려는 존재가 연후라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길이 다르옵니다. 추구하는 것이 황자저하와 다르옵니다.”
“그대의 뜻인가?”
“송구하옵니다.”
“회생의 뜻이군.”
“그렇사옵니다.”
“좋지 않군. 회생의 질주를 막아줄 큰 스승이 되실 분인데 회생이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버리려하다니.”
“뜻이 다르옵니다.”
“그럼 누가 있어서 회생의 독주를 막을 것인가? 황제에게 간언하는 자가 없다면 폭군이 된다. 짐처럼!”
“소신이 있사옵니다. 또한 참지정사가 있사옵니다. 위위경이 있사옵니다. 영화공주가 있고 백화께서 계시옵니다.”
“그들을 모두 합해도 연후를 따르지는 못하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주군이 통제하지 못하는 가신은 필요 없는 법이옵니다. 또한 주군을 통제하려는 가신은 역신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저는 그리 아옵니다.”
“회생의 뜻이란 말이지?”
“그렇사옵니다.”
“내 아들 놈도 그 그릇의 바닥이 보이는군.”
의종황제가 인상을 찡그렸다.
“보인 바닥 아래에 또 깊은 바닥이 있을 것이옵니다. 항상 발전하시고 벽을 넘으시는 분이시옵니다.”
“그렇겠지. 찻물이 식네. 한잔 마셔 볼까?”
의종황제는 자신이 직접 다기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닫은 보합에서 찻잎 통에서 차를 꺼내 조금 떨어트렸다.
“차라! 참으로 참 오랜만에 마시는군.”
“소신도 마시겠나이다.”
“짐과 연후만 마셔야 하는 차가 아닌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의종황제였다.
“한두 잔은 괜찮사옵니다.”
“이것도 형제의 우애이겠지.”
의종황제는 정도전에게도 찻물을 따라줬다.
“내 이제 어찌하면 되는가?”
“황제폐하께서는 서경 성으로 가셔서 황자저하를 태자에 봉하시면 되옵니다.”
“그리고 나면?”
“서경 천도를 하시는 것이옵니다.”
“서경 천도?”
다소 놀라는 의종황제였다.
“예. 그렇사옵니다. 북진을 위해서는 황성이 개경이 아닌 고구려의 황성이었던 서경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흩어진 예맥의 뿌리들이 하나로 뭉칠 것입니다.”
정도전의 말에 의종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는?”
“송구하옵고 황망하옵니다.”
“하하하! 연후와 길동무를 하면 되는 것이지?”
“황제폐하!”
“이것은 짐이 잘못 살은 벌이다. 고려의 황제로 짐이 잘못 살은 벌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 흥선 너는 마음에 담지 마라. 아니 고맙구나! 그래 이런 방법이 있었어.”
의종황제의 말에 정도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너와 황자가 짐을 중원을 일통한 천제로 만들어 줄 것이 아니냐? 그리 사서에 기록 되게 해 줄 것이 아니냐? 하하하!”
의종황제의 웃음에 정도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밖에 있는 무장을 부르라.”
“예. 황제폐하!”
“그래 맞아! 연후에게 짐이 주면 아무런 의심이 없지.”
의종황제의 말을 듣고 정도전이 일어났다."도전아!"
"예. 황제폐하!"
"형이라 불러 보아라."
"어, 어찌 감히,,,,,,,,."
"아니 듣고 가면 짐의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
"황, 황제폐하."
"어서!"
"형, 형님 폐하!"
"하하하! 좋구나!"의종황제가 정도전을 물끄러미 봤다."네가 키가 좀 큰 것 같구나!"
"예?"
"그리 보인다."회생도 정도전에게 키가 좀 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종황제도 그리 말했다. 허나 같은 말이지만 다른 의미가 분명했다.
회생의 의미는 건방져졌다는 경고였고 의종황제는 마음에 품은 웅지가 커졌다는 의미였다. 물론 정도전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말 키가 조금씩 크고 있었다."감사하옵니다.
형님 폐하!"
"부르거라."
"예."정도전은 공손히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정도전이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무장이 달려와 정도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폐하께서 찾으시네.”
“예. 책사님!”
무장이 의종황제의 군막으로 뛰었고 정도전은 물끄러미 그 군막을 봤다.
“황제폐하! 찾으셨나이까?”
“좋은 차가 생겼어.”
의종황제는 뜨거운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런 좋은 차는 혼자 마셔서는 아니 되지. 가서 황자의 대 스승을 모시고 와라. 짐이 가는 것이 옳으나 그래도 짐이 황제라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구나.”
“예. 황제폐하!”
“짐이 차를 권한다고 전해라.”
“예. 그리 전하겠나이다.”
무장이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의종황제는 다시 비어진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모진 세상! 이리 가는 것도 나쁠 것이 없지. 그래도 짐의 황자인 것을.”
의종황제는 다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물을 아무렇지 않게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연후가 의종황제의 군막 안으로 조심히 들어섰다.
“연후!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연후가 머리를 조아리자 의종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황자의 스승이 되셨다고요?”
“예. 황자저하께서 그리 명하셨사옵니다.”
“좋은 스승이라고 황자에게 들었습니다.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시는 스승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사옵니까?”
“앉으세요. 오늘은 황제와 그대의 신분을 모두 버리고 스승과 아들을 스승에게 맞긴 아비로써 좋은 차를 같이 드십시다.”
이미 다시 뜨거운 물은 준비되어 있었다.
“차를 즐기시옵니까?”
“하하하! 짐이 독주를 끊었기에 뭐라도 마셔야 해서 구했습니다.”
의종황제는 보합에서 찻잎 통 하나를 꺼내 찻잎을 조금 덜어 뜨거운 두 잔의 다기에 조금씩 떨어트렸다.
“그렇사옵니까?”
“짐이 듣기로는 황자의 스승께서는 차를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모신 겁니다.”
“예. 조금 즐기는 편이옵니다.”
“하하하! 잘 되었습니다. 찻잎이 잘 우러났습니다. 드시지요.”
의종황제는 그리 말하고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를 조심히 마셨고 그 모습을 보고 연후도 찻잔을 들어 마시려 했다.‘그대는 내 듣기에는 오래 살았다고 했으니 원망 따위는 마시오. 내 아들 놈의 속이 그대를 품기에는 좁나 보구려!’의종은 차를 은미하며 그렇게 마음속으로 연후에게 대화를 하듯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히 찻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연후도 차를 은미하기 위해 조금 마셨다. 그 순간 연후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셨다.
‘차에 뭔가가 있군.’역시 200년을 산 연후라 달랐다. 단 한 모금으로도 찻잎에 미세한 독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감지한 연후였다.
‘어찌 독이 발린 찻잎을 스스로 마시는 것이지?’연후는 의문이 생겼다.
“좋지요?”
의종황제의 물음에 연후는 미소를 머금었다.
“예. 향이 참으로 오묘하옵니다. 황제폐하!”
“한 잔 더 드시구려!”
의종황제는 연후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를 마셨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연후도 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어찌 스스로 독이 든 차를 마실까? 모르시는 것인가?’오만가지 생각이 나는 연후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차에 독이 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연후였다.
자신 말고는 이 찻잎에 독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 말이다.‘6개월을 마시면 서서히 말라죽겠지.’연후는 찻잎에 묻어 있는 독의 효능도 간파했다.
“황자가 매우 부족합니다. 바른 길로 이끌어주십시오.”
의종황제의 말에 연후는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황자저하이신가? 황자저하께서 나를 품을 그릇이 못 되는 것인가?’연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차의 향을 음미하는 것처럼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연후는 만감이 교차했다. 서경의 품었던 웅지를 버리고 회생을 택했을 때 그래도 옳은 선택이라고 여겼다. 또한 평지 대전투를 보면서 서경 반란군을 살리는 것을 숨어 지켜볼 때도 하늘이 내린 군주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죽은 자들을 모두 위로하고 서경 병사들을 포로가 아닌 고려의 백성으로 품으려는 회생을 보고 뜻이 넓고 가려는 길이 참된 군주의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선택한 회생에게 내쳐지는 자신이기에 착잡한 마음이 하늘에 어둠이 넓게 깔리듯 차고 넘쳤다.‘영웅은 이기적이기에 영웅이고 군주는 치졸하기에 군주인 것인가?’지금 이 순간에도 회생을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연후였다.
‘이 차를 받아 마셔야 한단 말인가? 알면서도,,,,,,,,.’독차를 음미하며 자신의 마음을 음미하고 있는 연후였다. ‘나를 황자에게 이끈 것은 천명일까? 아니면 내 죽을 자리를 모르고 온 것인가? 어찌 한단 말인가?’200년을 살아도 판단이 서지 않는 순간이었다.
‘이 고려가 그를 잃으면 큰일이 날 것인데,,, 그러니 내가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연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고 그런 연후를 의종황제가 찬찬히 지켜보고 있었다.‘연후야! 내게는 대안이 있는가? 이 고려를 새롭게 할 대안이 있는가? 황자 말고 대안이 있는가? 있다면 말해 봐라! 있느냐? 없느냐?’연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안이 없다. 이 고려에는 황자저하 말고는 대안이 없어.’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연후는 결심이 선 듯 했다.
‘없다면 마실 수밖에! 너무 급히 움직인 내 잘못이지. 황자저하의 급함을 깨우치려고만 했지 내 급함은 몰랐구나! 200년을 살고도 이리 어리석구나! 숨을 수도 없고 후일을 기약할 수도 없으니 나를 탓할 수밖에. 연후 너는 헛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