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7권 서경 대전투 -- >
“소신은 황제페하의 큰 지략이 실패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습니다.”
문하시중으로 불리는 조위총의 말에 대령후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점점 아첨에 귀가 멀고 있었다. 그 예리했던 감각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령후의 현실일 것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없다는 것.그건 끝내 한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의종황제도 대령후와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의종황제는 스스로 당당하고 또 회생에게 항상 문제를 확인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한 번 옥좌를 일어본 의종황제니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보다 어쩌면 물러나야 할 순간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사옵니다. 황제폐하! 또 어리석은 회생이 바다를 봉쇄한다고 해도 큰 바다를 다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렇지 황해는 넓고 넓지. 또 전령 선은 가장 빠른 배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자비 령에서 진영을 펼친다면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옵니다. 밀어붙일 때는 밀어 붙여야 하옵니다. 5천의 용맹서러운 기마대가 있습니다. 폭풍처럼 달린다면 막을 자 없습니다.”
조위총의 말에 대령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판 전투의 강자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기마대일 거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마대를 잡고 무력화시킨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마대를 잡기 위해서는 기마대가 움직여야 했고 그 기마대의 수가 얼마냐에 따라 그 군대가 강한지 아닌지가 판가름 난다고 해도 될 거였다.
그런 면에서 고려 중앙군은 확실히 서경 반란군에게 기마대 전력에서는 밀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개경 군대도 기마대의 수가 꽤 되옵니다. 족히 1만은 될 것 같습니다.”
“전마가 많다하여 기마대는 아니요.”
다시 한 번 악비군 장군 왕평달의 말을 무시하는 조위총이었다.
“북쪽에서 사나운 야생말을 길들여서 타고 달리던 우리와 겨우 말 같지도 않은 것들 타고 작대기 몇 번 휘두르는 것들과 비교하시면 안 되는 거요.”
완벽한 무시였다. 조위총은 왕평달을 무시하고 개경 중앙군을 무시했으며 미래의 기억이 있는 회생을 무시했다. 아니 회생이 미래의 기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렇게 대범해지고 안하무인으로 변한 것은 회생이 의도적으로 자비 령을 내어준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러십니까?”
“아니었소?”
“내 알기로는 송의 100만 대군이 금의 10만의 군사들을 꺾지 못해 정강의 변이 난 것이 아니요?”
조위총의 말에 왕평달이 처음으로 조위총을 노려봤다.
“그, 그것은,,,,,,,.”
“수가 많다고 해서 전쟁에 진다면 난 이 거병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요. 이기지 못하는 전쟁은 난 안하오.”
참으로 거만해진 조위총이었다.
“그리 되었으면 좋겠소.”
악비군 장군 왕평달은 그리 말하고 대령후를 봤다. 이제 모든 결정은 대령후의 몫이었다. 그리고 대령후도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왕평달 자신을 보는 눈빛은 차갑게 변해 있는 대령후였다. 그리고 그건을 간파한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기도 했다.
“옳소. 큰 바다를 막을 능력이 없는 회생이요. 내일 날이 밝으면 자비 령을 넘읍시다.”
대령후의 말에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멀리 본다면 개경을 함락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대령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몰락하고 처절하게 무너지는 대령후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참으로 현명하시옵니다. 황제폐하!”
조위총이 거만하게 말했다.만약 이 순간 개경 중앙군 중 누군가가 회생의 앞에서 의종황제게 이런 말을 했다면 목이 열 개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감히 신하가 황제를 판단하고 칭찬할 수 있단 말인가? 조위총은 이제 점점 스스로 모르는 상태에서도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마치 대령후 너는 내가 세운 황제다. 그러니 내 말을 따라야 한다.
이런 느낌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평지로 이동해 진을 구축할 것이오.”
“예. 알겠사옵니다. 그렇다면 악비군은 어찌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대령후!”
더는 말을 해 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안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 대령후에게 물었다.
“악비군이 자비 령을 점령하는 노고가 컸으니 공격 진영의 후방에 배치해 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제폐하!”
악비군 장군 왕평달은 대령후에게 물었으나 조위총이 무례하게 악비군 장군 왕평달의 말을 무시하고 대령후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이 자비 령을 점령한 것은 모두 짐을 돕는 악비군의 공이니 휴식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짐이 악비군 전체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고 계집을 내릴 것이요.”
대령후의 말에 다시 악비군 장군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폐하!”
처음으로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 대령후를 황제라 불렀다. 허나 그의 말에 충심 따위는 없었다.
“이제야 짐을 황제라 부르는군.”
순간 표정이 밝아지는 대령후였다.
“황제이시옵니다.”
“고맙네. 그대가 그리 불러주니 짐이 이 고려를 진정으로 얻은 것 같군.”
“황공하옵니다.”
“이 자비 령을 점령하느라 노고가 컸네. 물러가 쉬시게.”
“예. 황제폐하!”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 조심히 돌아섰다. 그리고 악비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남송을 망친 진회가 환생을 했군. 딱 그 형국이야! 대령후가 이제는 고종이 되셨군.’진회는 악비장군을 모함해 죽게 만든 남송의 대표적인 난신적자였고 고종은 악비장군이 죽을 때 남송의 황제였다.
고종이 1126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혀 송나라 왕실의 혈통이 중단된 정강의 변을 극복하고 남송을 재건한 황제였으나 난신적자 진회에게 속아 악비장군을 버리는 과오를 범한 것처럼 대령후는 지금 진회를 능가하는 난신적자를 옆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비군 장군 왕평달은 대령후가 그렇게 자신에게 듣고 싶어 했던 황제라는 칭호를 불러주고 대령후에게 등을 돌렸다.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 도착하고 한참 후에 대령후가 말한 것처럼 술과 고기 그리고 이곳까지 오면서 징발(?)한 계집들이 악비군이 주둔한 곳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술과 고기 그리고 여자를 본 악비군 장졸들이 놀라 악비군 장군 왕평달을 봤다.
“어찌 된 것이옵니까? 아직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술과 고기와 계집이 내려지다니요?”
“황제께서 내린 것이니 마음껏 먹어라.”
“진정 그런 것입니까?”
“나도 오늘 대취할 것이다. 이별주이니 대취를 해야지.”
“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몰라도 된다. 그냥 너희들은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계집이 있지 않느냐? 즐기면 되는 것이다. 즐기면.”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 그렇게 말하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큰 영웅이 될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구나! 이 작은 땅에 난 자에게 영웅을 기대하다니 내가 어리석었다.
공주께서만 불쌍한 것이지.’악비군 장군 왕평달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술과 고기 그리고 계집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대령후가 곧 끝장이 난다면 그 다음이 남송이겠지. 금은 강성하고 회생이라는 자도 크게 성장하고 있으니 결국 망하는 것은 대령후와 남송이지. 참으로 큰일이다.
공주님의 바램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야. 수포로. 허나 만약 공주님께서,,,,,,,,.’순간 악비군 장군 왕평달의 머리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남송의 공주 조연이 대령후에게 시집을 간 것은 정략결혼일수도 있었으나 고려에서 악비군을 키워 남송을 지키고자 한 그녀의 부친의 생각을 받아드렸기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남송을 위해 고려의 황제가 되어줘야 할 대령후가 나락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으니 남송 공주 조연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 순간 악비군 장군 왕평달은 참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생각만 달리하신다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아직 기회는 있음이야!’참으로 엉뚱하고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 악비군 장군 왕평달이었다.묘향산 산기슭에 응거하고 있는 북변 갑산군.동굴 안에서 갑주를 고쳐 입는 별초낭장 박현준의 모습이 보였고 그 옆으로 북변 갑산군들의 고위무장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별초낭장 박현준을 차분히 보고 있었다.
“서경 반란군이 서경 성을 떠난 지도 보름이 지났다.”
갑주를 다 입은 별초낭장 박현준이 돌아서서 차분히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장군!”
낭장이었던 박현준은 북변 갑산군에게는 장군이라 불렸다.
“말에 건초를 잔뜩 먹여라. 병사들도 배불리 먹여라. 다 먹고 나면 서경으로 진격한다.”
“예. 장군!”
“5천의 병력이면 충분하다. 아니 1천이면 충분하지.”
박현준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예. 알겠사옵니다.”
“빠르게 진격할 것이다. 그리고 서경 성을 지키고 있는 놈들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공성전 무기는 어찌 하면 되겠사옵니까? 부대가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묘향산에서 응거하고 있는 상태에서 큰 석포나 화포 충차 같은 것을 가지고 올 수는 없었고 지금 북변 갑산군에게는 공성전 무기로 쓸 것들은 아예 없는 상태였다.
“필요한가?”
“성을 공격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문이 스스로 열릴 것인데 성을 깨 부술 필요는 없지.”
“예?”
북변 갑산군 무장들이 박현준을 다시 봤다.
“빈집털이보다 더 쉬운 것은 안에서 문을 열어주면 들어가 주인행세를 하는 거지. 두고 보면 알 거네.”
“예. 장군!”
“그나저나 자비 령 첫 전투가 중요할 것이데. 첫 전투가!”
자비 령 남단 10만의 개경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는 평지.10만이나 되는 대병력이 이 평지에 주둔하고 있기에 북적이는 것이 군영이 아니라 마치 저잣거리 시장 통 같았고 그런 분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장이나 병사 같지 않은 백성들이 주둔지 뒤편에 모여 있다는 거였다.
“자자! 줄을 서시오. 줄을!”
무장 하나가 자루나 항아리를 들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소리쳤다.
“정말 이 겨울에 곡식을 나눠주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줄을 서고 있는 백성들의 몰골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의 몰골이었다.
“황제폐하의 어명을 의심하는가?”
무장 하나가 자신에게 말한 남자를 보며 호통을 쳤다.
“그, 그게 아니옵고,,,,,,,.”
“너! 너부터 곡식을 받아.”
무장이 질문한 사내를 노려보다가 손가락으로 정말 곡물을 주는지 물은 남자를 가리켰다.
“저, 저부터요?”
“그래 너부터.”
“예. 예. 알겠습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얼른 앞으로 나와 쌀섬 앞에 섰다. 그리고 무장은 바로 그 남자에게 1말 정도의 쌀을 내줬다. 한 말의 쌀이면 적은 양은 분명 아니었다. 쌀 한말이니 여기서 받아가 다른 곡물로 바꾼다면 그 양은 몇 배가 될 것이다.
“이 쌀을 가져가서 보리나 콩으로 바꿔서 죽이라도 끓여 먹으면 두어 달 버틸 거야!”
이것이 개경 중앙군이 쌀을 구휼미로 내어주는 이유였다.
“감사하옵니다. 나리!”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황제폐하께 감사하고 황자저하이신 왕회생 저하께 감사해라!”
“예. 나리! 황제폐하 감사하옵니다. 황자저하 감사하옵니다.”
“됐지. 이제 주는 것을 알겠지?”
“그렇사옵니다. 나리! 이놈의 주둥이가 실성을 했나봅니다.”
쌀을 받은 사내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주둥이를 때렸다. 그 모습이 꽤나 익살스럽기에 쌀을 나눠주고 있는 무장들과 병사들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